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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31화 (31/189)

31화

아페티트에게 붙들려 있던 건 잠시뿐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산은 해가 빨리 떨어진다. 숲을 다시 건널 용기는 없어, 사비나는 교회를 돌아 연못 쪽으로 난 길을 지나 오두막으로 로 했다.

어쩐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걸음걸이가 불안정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넣고 비틀거리며 걷고 있으려니, 멀리서 커다란 인영이 그녀를 향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맥이 탁 풀려 버려, 사비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광경을 본 에르잔은 날듯이 뛰어와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아가씨, 무사하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요?”

“아, 아뇨. 없어요.”

“하아…….”

그 말에 겨우 안도한 에르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사비나의 어깨를 안은 크고 단단한 손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불러도 아가씨의 대답이 들리지 않아서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아가씨께서 사라지셔서…….”

우물 안에서 저주를 정화하고, 갑자기 솟구친 물에 빠져 휩쓸려 내려갔다가 다른 우물을 통해 다시 올라오기까지. 각각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를 일이나 해가 서쪽으로 기운 것을 보아 에르잔은 상당한 시간을 사비나를 찾아 헤맸을 것이다.

“카밀라는요?”

“아가씨께서 사라진 것을 보고는 그대로 기절해서 카이라트의 거처로 옮겼습니다.”

“카이라트가 걱정하겠네요. 가서 인사를 해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은 여전히 사비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우악스럽게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손을 뿌리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사비나는 어쩐지 에르잔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걱정했던 거예요?”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미안해요…….”

사과하는 순간 에르잔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가, 곧 가볍게 고개를 터는 것과 함께 평소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사과하실 것 없습니다. 아가씨의 호위를 다하지 못한 것은 제 책임이니까요.”

“에르잔을 내버려 두고 간 것은 나잖아요.”

“그래도 제가 지켜 드렸어야 했습니다.”

“내 명령을 무시하고 따라 내려오려 했던 건가요? 에르잔까지 따라 내려왔으면 우물에서 못 빠져나왔어요.”

예상 밖의 지적에 에르잔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에르잔과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따라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거예요. 그게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복잡했죠. 대처할 방법을 제대로 마련해 놓지 않았어요. 그건 제 실수죠. 그래서 이렇게 시간을 지체했고, 당신에게 걱정을 끼쳤어요.”

“사비나 아가씨.”

“미안해요. 하지만 후회는 안 해요. 오늘 결과는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니까.”

우물 속에 에르잔이 함께 있다가 휘말렸더라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다른 우물로 나올 수 있었을지 어떨지 모른다. 어쩌면 그대로 두 사람 다 지하에 갇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사비나야 죽지 않는 몸이니 그렇다 쳐도 에르잔이 지하수 속에서 그대로 죽어 버리기라도 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에르잔이 사비나의 호위기사인 이상, 그의 보호를 거부하려면 사비나는 제 안전을 스스로 보장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결국 자신은 잘못된 판단을 내린 셈이다.

그러니 오늘 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지는 것이 맞았다. 오늘 겪은 일보다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 에르잔이 짊어져야 할 것은 없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당신에게 걱정을 끼친 것, 사과하게 해 주세요, 에르잔.”

“…….”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처지면서 이 정도의 책임마저 회피할 만큼, 나는 어리지도 않고 바보도 아니에요.”

“아, 아닙니다. 아가씨를 그렇게 여겨서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어요. 당신은 성실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었던 일이나, 상대의 실수로 인한 것마저 자신의 책임으로 여긴다.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고지식한 기사지만, 천성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폭주하는 저주의 주술을 잠재우기 위해 몸을 섞어야 한다는 사비나의 상황을 알고도 기꺼이 따르고, 의무감으로 하는 행위에도 정성을 다했던 거겠지.

“그러니까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은 거예요.”

“사비나 아가씨…….”

“성실한 호위기사를 두고, 주인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되잖아요?”

사비나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에르잔은 할 말이 없었는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듯 흔들리던 푸른 눈동자는 곧 빛을 되찾았다. 그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에르잔, 책임과 도리를 아는 주군께 충의를 바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거창한 칭찬은 필요 없는데…….”

어쨌든 판단을 잘못해서 실수한 것은 자신이다. 제 실수에 제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에르잔에게 칭찬받을 일은 하지 않았다. 사비나는 조금 민망해져 뺨을 붉혔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아, 네. 혼자서 걸을 수 있…… 아!”

부축하려는 에르잔의 손을 거절하고 스스로 일어나려던 사비나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비나 아가씨!”

“아뇨, 괜찮아요! 잠깐, 갑자기 맥이 풀려서……!”

자각이 없어 몰랐는데, 상당히 몸이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야 그 깊은 우물을 거의 암벽 등반하는 모양으로 타고 올라온 데다, 칼을 든 네나뷔스테를 피해 숲을 헤매다가, 창고에 들어가 난생처음 보는 또 다른 저주의 화신과 마주하기까지 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또 다른 저주의 화신…….’

붉은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아페티트. 그 스스로 저주의 화신이라고 말하면서, 사비나와 동류라고 말했다.

아페티트는 그녀의 몸에 닿고 입을 맞춰도 타격을 입는 일 없이 멀쩡했으며, 반대로 그의 저주를 흡수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그 창고로 들어갔을 때는 마치 뭐에 홀린 것 같았어. 그것도 저주의 화신이기 때문일까?’

몽롱한 기분으로 남자를 마주하고, 입을 맞추는 데도 저항하지 못했다. 그럴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고 할까. 장미 덩굴에 감싸인 창고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사비나는 얼른 고개를 털어 기억 속 영상을 떨쳐 내려 했다.

“에르잔, 미안해요.”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비나가 또다시 사과하는 이유를 모르는 에르잔은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하지만 사비나는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아페티트와 입을 맞췄다고 해서 사비나가 에르잔에게 사과할 이유는 없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정혼을 한 사이도 아니며, 몸을 섞는 것 또한 순전히 그녀의 사정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호위기사로서 주인의 상태를 안정시키기 위해 의무를 다하던 에르잔에게, 다른 남자와 입맞춤한 것을 사과해 봐야 당혹스러울 뿐이겠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사과하는 게…… 오히려 에르잔에게 미안한 일일지도 몰라.’

의무로 몸을 섞던 주인에게 애인 취급을 받았다며 불쾌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사비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 실수할 뻔했네요.”

너무 티가 나게 말을 돌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표정 관리를 했지만, 역시 어색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에르잔의 푸른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아주 살짝 벌어지더니, 나직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셔도 됩니다.”

“네?”

“실수, 하셔도 됩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였냐고 캐묻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명령에 충실하게 침묵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정말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이번에 말문이 막힌 것은 사비나 쪽이었다.

“사비나 아가씨께서 저를 어렵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뇨. 에르잔을 어렵게 여겼던 건 아니에요…….”

“저는 완벽한 기사가 아닙니다. 아직도 사비나 아가씨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실수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사비나 아가씨께서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 무엇을 어려워하시는지.”

“에르잔은 충분히 잘해 주고 있는걸요.”

“이제까지 아가씨를 모시는 데 실수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는 맹세할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수행해 보이진 못하더라도, 최대한 명령을 완수해 보이겠습니다.”

실수할지도 모른다, 는 말은 본래 기사가 주군 앞에서 입에 담아도 될 말은 아니다. 명령은 반드시 완수하는 것이 기사.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임무를 포기하는 건 그의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비나를 만나면서 에르잔의 안에 새로운 욕망이 싹텄다.

완벽하게 명령을 수행하지 못해도 좋다. 질책을 받아도 좋다.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치욕을 설복하는 것보다 주군의, 눈앞의 이 여인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을 갈고닦아 나가고 싶다.

어떻게 보면 실수를 정당화하기 위한 나약한 자의 자기합리화로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르잔은 완벽한 기사로서 그녀의 곁을 지키느니 차라리 실수하여 질책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함께 나아가고 싶었다.

부족한 부분을 함께 메워 나가고 싶었다.

“에르잔, 음…….”

갑작스러운 에르잔의 말에 당황한 사비나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시선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에르잔의 손을 잡았다.

“에르잔, 일으켜 주세요.”

“예, 사비나 아가씨.”

환하게 웃으며 사비나의 어깨를 안아 일으켜 주는 에르잔은, 무엇 때문인지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속에 있던 말을 해서 후련해진 것일까. 어쩐지 서로 속에 있던 것을 한마디씩 주고받은 느낌이 들어, 사비나는 영문도 모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모든 것을 호위기사에게 떠맡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책임감 있는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비나와, 그저 완벽한 기사로서 임무 수행에만 전념하는 기사가 아니라 주군과 같은 길을 함께 나아가고 싶어 하는 에르잔.

진정으로 서로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쩐지 이전보다는 한 걸음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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