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29화 (29/189)

29화

“여긴 어디지?”

사비나는 우물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주가 깃든 땅. 검은 사철나무가 늘어선 모양으로 보아 아직 마을 안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카밀라와 카이라트가 머무는 세 채의 오두막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 우물은 마을의 다른 우물과 연결되어 있었던 건지도 몰라. 물살에 휩쓸려서…… 내가 다른 우물로 나와 버린 걸지도.’

젖은 옷에 한기가 스며, 사비나는 어깨를 안고 손바닥으로 팔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은 검은 숲. 다른 한쪽은 광장.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몇 채나 되는 집이 모여 있었다.

‘카림이 마을 북쪽에 머물고 있다고 했는데, 이곳이 북쪽인가?’

로스카옌 사제는 카림을 만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했으나, 우선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에르잔과 카밀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서.”

오두막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면 위치를 물어볼 사람이 있으리라 여겨 마을 쪽으로 걸어가려던 사비나를 누군가가 멈춰 세웠다.

“그 이상 마을에 가까이 다가가면 죽일 거야.”

뒤를 돌아보니 우물가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사비나가 계속 들었던 끼익, 하고 도르래가 돌아가던 소리는 이 여인이 도르래를 감던 소리였을까.

“너, 외지인이지?”

백금발에 자주색 눈을 한 장신의 여인이었다. 머리쓰개16)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는 땋아 뒤에서 갈무리해 두었음에도 이리저리 잔머리가 뻗쳐 나와 있었다.

도축에나 쓸 법한 칼을 들고 있는 여인의 몸에서는 역시 검은 안개가 피어나오고 있었다. 분명 그녀의 몸에 휘감긴 것은 저주의 주술이지만, 사비나가 알고 있는 「죽음」의 주술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넌 대체 뭐야? 로스카옌과 함께 뭘 꾸미고 있는 거지?”

그녀는 사비나 같은 외지인을 배척하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로스카옌 사제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로스카옌 사제와도 별로 우호적인 관계는 아닌 듯했다.

“……로스카옌 신부님과는 아무 관련 없어요.”

“이 마을을 어쩔 생각이야!”

여인이 사비나를 향해 칼을 들이댔다. 하지만 그것은 위협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태세에 가까웠다. 아마도 진짜로 사람을 찔러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필사의 수단으로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도(牛刀)를 들고 나왔겠지만, 그녀의 자주색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어떻게도 하지 않아요.”

“거짓말하지 마! 내가 또 속을 것 같아? 너희들 대체 뭐냐고!”

“저희는…… 아니, 저는.”

저주의 화신으로, 그 몸으로 다른 저주의 주술을 흡수할 수 있는 존재. 분명 평범한 인간은 아니지만, 사비나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인간들을 돕고 싶었다.

“당신들을 도우러 왔어요.”

사비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인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사비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칼질을 피했다. 죽일 생각이 없기에 일부러 둔하게 휘둘렀는지, 아니면 진짜로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손속을 늦춘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사비나를 두려워하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여전히 우도를 겨눈 채로 노려보고 있었다.

단순한 경계가 아니다.

위협도 아니다.

그녀로부터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제발 우리들을 내버려 둬. 더는 괴롭히지 말라고!”

「우리들」이라는 표현에서, 사비나는 그녀가 누군가를 지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마을을 내버려 두라고 말했으니, 아마도 가족이나 친구를 말하는 거겠지.

“로스카옌 신부님이 당신들을 괴롭혔나요?”

“모르는 척하지 마! 그놈이랑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 다 봤어!”

“확실히 만나기는 했지만…….”

거처를 안내받고, 이 마을에서 지내기 위한 주의사항을 들었다. 사비나가 동쪽 첨탑의 지하에서 괴한을 만나 공격당하고 카림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마을에서 떠나 달라고 했으니, 분명 이 마을이 범상치 않은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그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자신도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했고.

하지만 로스카옌 사제는 사비나와 에르잔에게 속사정을 들려주지 않았다. 외부인인 자신들이 사정을 듣기 위해 억지로 입을 열게 하는 것도 실례라 생각해 캐묻지 않았다.

‘로스카옌 신부가 분명…….’

마을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이 마을의 저주를 거둬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을 때, 난감해하면서 몇 사람인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사비나를 쫓아왔던 것은 나자예프라는 청년이었고, 마을의 호위대장이었다는 오딜은 청년이니 이 여인의 이름은 아닐 것이다.

「남쪽으로는 가지 말게. 그쪽은 네나뷔스테의 구역이니까.」

분명 로스카옌 사제는 그렇게 말했다. 사비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멀리 광장이 보인다. 첨탑이 있는 동쪽과 교회가 있는 서쪽은 다녀 보았으니, 주위의 풍경이 처음 보는 거라면 아마도 북쪽 혹은 남쪽일 것이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싸늘한 바람이 사비나의 젖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당신이 네나뷔스테인가요?”

이름을 불린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동공이 살짝 커지더니, 우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칼끝이 사비나의 어깨를 스쳤다. 사비나는 칼끝에 걸려 찢겨 나간 어깨를 움켜쥐었다. 찢어진 옷섶 너머로 뜨끈뜨끈한 피가 배어났다.

아픈 것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사비나는 칼에 베였다는 것보다도, 방금까지 덜덜 떨며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던 여인이 삽시간에 냉정해진 얼굴로 칼을 휘둘렀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역시 로스카옌과 한패였구나.”

“아니에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마을의 시간이 멈춰 버렸는데, 그놈 혼자 나이를 배로 먹고 있으니까…….”

“뭐라고요?”

“아니, 됐어. 이유 따윈 궁금하지도 않아. 나는 널 죽일 거니까.”

여인의 눈동자에서 두려움과 망설임이 사라졌다.

난생처음으로 사람을 해치는 상황에 처한 평범한 여인에서,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지키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냉정한 보호자로 거듭났다.

그녀의 자주색 눈동자에, 마치 타오르는 듯한 증오심이 넘실거렸다.

네나뷔스테는 양손으로 쥐고 있던 우도를 오른쪽 손으로 잡고 치켜들었다. 명백한 공격 태세였다.

“잠깐만요, 네나뷔스테.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이제 와서 연약한 척해도 늦었어.”

네나뷔스테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던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넘겼다. 그러고는 칼을 움켜쥔 채, 사비나를 향해 다가왔다.

사비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물러났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은 칼에 베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아니다.

그녀의 몸은 죽음의 저주에 잠식되어 있고, 네나뷔스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 또한 저주의 주술이다.

정확히 어떤 종류의 저주인지는 흡수하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통상 이런 종류의 주술은 사람을 해치거나 생명을 빼앗을 때 그 농도가 말할 수 없이 짙어진다.

그것은 곧, 사비나를 공격하면 네나뷔스테를 괴롭히는 저주가 더욱 강력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네나뷔스테. 나를 공격하면 안 돼요.”

“그 입 다물어.”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칼을 움켜쥔 여인은 냉혹하게 첫 살인을 결심했다. 한 번에 목을 찌르기 위해 간격을 재는 네나뷔스테를 보고, 사비나는 그녀가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비나에게는 무기가 없었다. 에르잔처럼 체술에 능통한 것도 아니다. 제힘으로는 칼을 쥔 네나뷔스테를 제압할 수 없을 터.

어차피 죽지 않으니까, 라고 해서 상황을 낙관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칼에 베이는 것을 감수하고 네나뷔스테를 붙잡을 수는 있겠지만, 만약 목을 찔려 의식을 잃는다면 제대로 저주를 흡수할 수 없다. 도리어 자신의 몸에 접촉한 네나뷔스테에게 죽음의 저주가 옮겨갈지도 모른다.

그래서는 네나뷔스테를 구할 수 없다.

‘지금은 도망치자.’

그렇게 결심한 사비나가 걸음을 돌려 뛰기 시작하자, 네나뷔스테도 그녀를 쫓았다.

“거기 서!”

작은 마을이었기에 광장도 그리 넓지 않았다. 울타리로 둘러진 광장을 지나자 밭이 나오고, 밭을 넘어서자 숲이 나왔다. 사비나는 숲으로 뛰어들어 갔다.

“앗!”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사비나는 얼른 옆의 나무 기둥을 붙잡았다.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길에 장애물이 많았다.

‘이런, 어쩌지? 이러다가 잡히겠어!’

수풀이나 나무에 몸을 숨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숲에 들어오긴 했지만, 날 때부터 이 마을에서 자란 네나뷔스테는 장애물이 많은 산길에도 익숙했다. 도리어 자신이 도망치기 힘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사비나는 난감해졌다.

그때였다.

「이쪽입니다.」

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렸나?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비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어떤 남자의 목소리라고 인지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발걸음이 저절로 어딘가를 향했다.

자신을 뒤따라오던 네나뷔스테의 인기척이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소리가 끊겼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를 차단한 것처럼 기묘한 정적이 찾아오고,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분명 그녀는 이 숲에 들어오는 것이 처음이었고, 숲길을 홀로 헤매는 것도 처음이었다. 어디로 나가면 무엇이 나오는지도 모르는데, 왜 멋대로 걸음이 앞을 향하는 걸까.

아니, 과연 ‘앞’은 맞을까.

사비나는 마치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커다란 나무 사이로 빠져나오자, 그제야 달라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교회가 보이네…….’

마을을 둘러싼 숲을 반 바퀴쯤 돌았는지, 로스카옌 사제가 머무는 서쪽의 교회 첨탑이 보였다. 그러나 사비나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교회 본당이 아니었다. 그 뒤편에 조금 떨어진, 돌로 지어진 작은 건물이었다.

‘창고일까?’

건물의 벽면에는 새빨간 장미 덩굴이 자라고 있었다. 이토록 새빨간 장미를 본 것은 처음이다. 무채색뿐인 이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분명 스스로 가까워진 것이겠지만 자각이 없었던 탓일까, 사비나는 마치 돌로 만들어진 창고가 제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쪽입니다.」

다시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끼익, 열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문을 짚고 있는 것은 자신의 손이었다. 스스로 문을 연 것일까.

기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비나는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제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

창고 안은 어두웠으나, 작은 창문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분명 그리 맑지 않은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비나는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눈부시다」고 생각해 버렸다.

“이런, 눈을 감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또렷하게 남자의 목소리가 귀 옆에서 들렸다. 흠칫 놀란 사비나가 몸을 뒤로 당기자, 부드러운 것이 등에 와 닿았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등을 감싼 것이다.

“아! 저, 저한테 닿으면 안 돼요!”

당황한 사비나는 순간적으로 남자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는 사비나의 손목을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한 손을 등에, 한 손을 그녀의 손목에 두고 남자는 숨결이 닿을 만큼 지근거리에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아, 역시. 당신이었군요.”

마치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이, 남자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참고

16) 갈바세거스(Galvassegas). 민간 여성들이 머리에 감는 스카프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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