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카밀라, 에르잔. 좀 도와줄래요? 저주를 제거하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해요.”
“예? 위험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그런 일이라면 제가……!”
“에르잔이 내려가면 도르래가 부서질 거예요.”
그 말에 에르잔은 할 말이 없어졌다. 메마른 우물은 무척 비좁아 에르잔이 들어가려면 몸을 한껏 웅크려야 했고, 낡은 도르래는 에르잔의 몸이 매달리는 순간 우두둑 부러져서 그를 우물 속으로 단숨에 처박아 버릴 것이 뻔했다. 사비나 정도로 몸이 마르거나, 어린아이가 아니면 이 아래로 내려갈 수 없을 것이다.
“사비나 아가씨. 우물 안에 혹시라도 위험한 것이 있다면 어찌합니까?”
“15년이나 사용하지 않은 우물인걸요.”
아래서 느껴지는 생명의 반응은 없었다. 연못에 잠긴 시체들처럼 이 우물에 갇힌 사람들은 아마도 오래전에 명을 달리했을 것이 분명하니, 내려가는 도중 두레박의 끈이 끊어지거나 도르래가 부서지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을 터.
“우물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잖아요. 이대로라면 카이라트의 눈은 낫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러다간 해 떨어지겠네. 사비나. 내가 감아 줄게.”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의 에르잔을 뒤로하고, 카밀라는 우물로 다가가 두레박을 끌어 내렸다.
“두레박을 빼고, 이 밧줄을 허리에…… 음. 이렇게 묶으면 될까?”
“제가 하겠습니다.”
손재주가 없는 카밀라가 사비나의 허리에 어설프게 밧줄을 감는 것을 보고 불안해진 에르잔은 냉큼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밧줄을 넘겨받았다.
“아가씨. 위험해지면 밧줄을 당겨 주십시오. 바로 끌어 올려 드리겠습니다.”
“괜찮…… 네. 그럴게요.”
잔걱정이 많은 에르잔 앞에서 계속 괜찮다고 해 봐야 불안감만 가중시킬 것 같아, 사비나는 적당히 그를 안심시키는 대답을 했다.
카밀라도 여기까지 사비나를 데려오는 일에는 태연했지만, 막상 그녀가 저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조금 걱정되기는 했는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이 보였다.
“사비나, 조심해.”
“다녀올게요, 카밀라. 에르잔.”
“조심하십시오, 사비나 아가씨.”
사비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좁은 우물이라 벽에 손을 짚고 발끝을 돌과 돌 사이의 홈에 넣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흘긋 위를 보니, 동그란 하늘의 귀퉁이에 에르잔과 카밀라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스러운 표정. 사비나는 두 사람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서 진득한 저주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 아래는 몇 사람이나 죽어 있는 걸까.’
연못에 빠졌던 시체의 수는 어림잡아 수십 명은 되는 듯했다. 우물은 비좁으니 연못처럼 많은 사람이 갇히지야 않았겠지만, 시체에 막혀 우물이 메마를 정도라면 십수 명은 되지 않을까. 15년 전 이 마을을 침략했다는 군인들의 무자비함을 상기한 사비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끼익. 끼이익.
사비나의 허리에 감긴 밧줄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르래에 뭔가 걸린 걸까. 에르잔이 워낙 사비나의 몸을 꽁꽁 묶어 놓았기에 밧줄이 짧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사비나는 허리에 감겨 있던 매듭을 풀었다. 어지간히 빙빙 둘러 감아 놓았는지, 매듭을 풀자 밧줄이 한참 길어졌다.
‘이걸 붙잡고 아래로 내려가면 되겠다.’
사비나는 밧줄 끝을 왼팔에 감고, 남은 밧줄을 둥글게 갈무리한 다음 오른손으로 서서히 풀어 가며 아래로 내려갔다.
끼익. 끼이익.
사비나의 무게 때문일까, 도르래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비나가 아무리 말랐다고 한들 낡은 도르래가 사람 하나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사비나는 도르래의 부담을 줄이려 다리를 뻗어 벽을 지지한 뒤, 등을 우물의 벽에 기대 무게를 분산시켰다.
끼익. 끽. 끼익.
제법 깊이 내려갔다. 이제 우물 너머의 하늘은 사비나가 엄지와 검지로 고리를 만든 것보다 더 작게 보였다. 작은 마을인데 우물이 상당히 깊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사비나는 어두워진 탓에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하며 양 벽에 손을 짚었다.
꿈틀. 축축한 돌벽 틈에서 실지렁이 같은 저주가 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주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느릿하게 기어들어 와, 여린 살갗 위로 몸을 뉘었다.
‘작은 저주네.’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자, 피부 위를 기어 다니던 실지렁이의 감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파스스 마른 물체가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끼이익. 끼익. 끼이익.
사비나는 더 아래로 내려갔다. 벽면에서 흘러나오는 저주가 상당했다. 사비나는 때때로 멈춰 그것을 흡수하고, 저주의 농도가 옅어지면 다시 아래로 내려가길 반복했다.
물컹.
발아래 뭔가 물컹한 것이 있었다. 사비나는 오른발을 벽으로 뻗고 등을 기대는 방식으로 몸을 지지하고, 왼발을 아래로 내렸다.
끽. 끼이이이익.
물컹물컹한 것들이 바닥을 꽉 채우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시신일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죽은 지 오래된 시신임에도 말라 딱딱해진 것이 아니라 축축하고 물컹물컹했다. 우물 벽을 타고 내려올수록 돌이 축축했던 것을 보아 막혀 있다고는 해도 아래에 물이 흐르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끼이익.
사비나는 잡고 있던 밧줄을 놓고 물컹한 시신 위에 발을 디디고 섰다. 죽은 사람의 몸을 밟고 서는 것은 미안했지만 계속 벽에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두운 까닭에 시신의 상태는 보이지 않지만, 저주를 흡수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터.
사비나는 천천히 몸을 숙여, 차갑고 물컹한 살갗 위에 손을 짚었다.
‘저주를 흡수하면, 이 사람들도 연못에 빠진 시체처럼 백골이 되는 걸까?’
공기 중에서의 부패속도는 물속에서보다 빠르다. 15년간 시간이 멈춰있던 까닭에 시신은 축축했으나 저주를 흡수하고 원래의 시간을 되찾는다면 아마도 뼈만 남겠지. 사비나는 눈을 감고 저주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고요한 우물 안에 낡은 도르래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죽음의 저주는 마치 진흙처럼 꿀렁꿀렁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핏줄을 억지로 확장하고 그 안에 진흙을 욱여넣는 듯한 섬뜩한 고통이 잇따랐으나 사비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고통은 익숙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녀에겐 이런 고통마저 달콤할 뿐이다.
기긱. 긱. 기이익.
……그런데 왜 이렇게 도르래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걸까.
내려온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끼긱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것이 신경 쓰여 사비나는 반짝 눈을 떴다.
시야가 온통 까맸다.
‘해가 떨어진 건가? 하늘이 안 보여.’
고개를 들면 우물 위의 동그란 하늘이 보일 줄 알았건만, 위를 보아도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시야가 어두웠다.
“에르잔?”
너무 깊이 내려왔기에 밖까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사비나는 벽을 짚어 제가 붙잡고 내려온 밧줄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사방의 돌을 짚어도 밧줄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끼익, 끼익, 끼이이익.
도르래가 움직이는 소리는 계속 들리는데, 밧줄도 도르래도 두레박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게 여긴 사비나가 다시 자세를 낮춰 아래의 시신에 손을 짚는 순간.
출렁.
바닥이 물로 변해 버렸다.
“꺄!”
분명 산처럼 쌓여 있던 시신을 딛고 서 있었는데, 어느새 바닥을 물이 채우고 있었다.
저주를 흡수하면서 지하수가 시신 틈으로 올라온 건가?
그러나 사방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비좁은 우물 속에서는 헤엄조차 칠 수가 없다.
사비나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읍……! 으읍!”
꾸르륵.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오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명이 들려왔다. 제가 죽지 못하는 몸인 것을 알면서도 사비나는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렸다.
죽지 않는다고 해서 마냥 낙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몸이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우물이 아무리 깊어도 인간이 판 이상 한계가 있는 법인데, 이 우물은 바닥없는 늪처럼 사비나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지하수가 흐르는 곳까지 빨려 들어가 버린다면.
사비나는 아무도 구해 주지 않는 깊은 땅속에 한평생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제 몸을 더욱 아래로 빨아들이는 물살을 느끼며 사비나는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마을의 주술은 거의 한 곳에 고이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으나 물은 다르다. 흐르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 법이니, 그 방향을 반대로 하면 위로 올라가는 것도 가능할 터.
사비나는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숨이 막혀와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 왔다. 귓전에서 폭죽이라도 터뜨리는 것처럼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기에 더욱 괴로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올라가면, 분명 잡히는 게 있을 거야!’
물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으나 우물이 비좁은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비좁아서 헤엄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물은 비좁기에 유속이 빠르지 않고 느껴지는 압력도 강이나 호수의 그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던 사비나는 우물의 돌벽 중 튀어나온 부분을 붙잡는 일에 성공했다.
“푸핫!”
겨우 수면 밖으로 머리를 빼낸 사비나는 콜록거리며 물을 토해 냈다. 시신이 쌓여 있던 탓에 썩은 물을 먹은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불쾌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몸에 끈적거리는 느낌도 없었다. 갑자기 물에 빠졌다가 벗어난 탓에 감각이 제대로 돌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르잔! 카밀라! 위에 있어요?”
끽. 끼이이익. 끽.
낡은 도르래가 돌아가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러나 우물 밖에 있을 두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사비나는 벽돌을 하나하나 짚으며 위로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던 사비나는 우물의 뚜껑이 닫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뚜껑이 닫혀 있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았던 거구나. 그런데 뚜껑을 왜 닫았지?’
사비나가 아래 내려가 있는데 에르잔이 뚜껑을 닫게 두었을 리는 없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령 그들을 의심한 다른 마을 사람이 다가와 사비나를 숨기느라 잠시 덮어 두었다거나.
‘그래. 그럴 거야.’
사비나는 우물 위까지 올라와 머리맡의 뚜껑을 똑똑. 두드렸다.
끼익.
까드득!
이제까지는 그저 감기는 소리만 나던 도르래에서, 갑자기 뭔가를 심하게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사비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고 기다렸다. 하지만 밖은 곧 고요해지고, 이젠 도르래가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뭐지……?’
나가도 되는 걸까. 안 되는 걸까. 더 기다려야 하나. 어둠 속에서 버티는 것은 사비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바깥의 상황을 모른다는 점이 문제였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무기 같은 것을 들고 와서 에르잔과 대치 중이면 어떻게 해?’
아무래도 이대로 있는 것보다는 나가서 상황을 보고 대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사비나는 우물의 뚜껑을 밀어 올렸다.
“어라……?”
뚜껑을 닫을 만한 어떤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한 것과는 달리,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에르잔도, 카밀라도, 그리고.
그녀가 우물에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풍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