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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27화 (27/189)

27화

사비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신들은 위험한 사람이 아니며, 이제 멀어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였다.

덜컹.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서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뛰쳐나오더니, 사비나를 향해 달려왔다.

“저기, 헉, 있잖아!”

에르잔이 막아설 필요도 없이, 여자는 사비나에게 달려들기는커녕 딱 얼굴만이 보이는 거리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깡마른 어깨가 그녀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들썩였다.

자세히 보니,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어제 얼굴을 치료해 드린……?”

“으응. 맞아.”

여자는 아는 척을 하는 게 민망한지 어색한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사비나의 발밑 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을 마주치는 걸 두려워하는 것도 같고, 그녀의 발밑에 그림자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기, 어제는…….”

“당신이 제게 옷을 빌려줬군요. 고마워요.”

“으, 응?”

여자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선이 발밑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 올라와 가슴께에 머물렀다.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랑 제가 빌려 입은 옷, 소매에 수놓인 눈꽃 무늬가 똑같아요. 로스카옌 신부님께서 누가 빌려준 옷인지 말씀해 주지 않으셔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거든요.”

“로스카옌 신부님은 원래 말이 짧은, 아니,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

거기까지 말하고, 여자는 이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 그냥 도망쳐서 미안해.”

“이해해요. 많이 놀라셨을 테니까.”

“……나도 고마워.”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뱉고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이제 와서 인사해도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고, 인사하자마자 이런 부탁하는 게 너무 속 보이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뭐를요?”

“카이라트…… 우리 오빠가 앞을 못 봐.”

그녀가 다리를 절고 얼굴 한쪽이 무너져 내렸던 것처럼, 그녀의 오라비는 눈이 먼 모양이다. 그 또한 저주의 영향일까. 사비나는 가볍게 수긍하고는 여자 쪽으로 걸어갔다.

“저주 때문이라면 제가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가죠.”

“아닙니다, 아가씨.”

오두막 쪽으로 다시 걸어가려는 사비나를 멈춰 세우고, 에르잔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뭐, 뭐야?”

“어제는 아가씨께 그런 폭언을 퍼붓고, 문을 두드렸을 때는 없는 척을 하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도와 달라고? 꿍꿍이가 뭐지?”

“꾸, 꿍꿍이라니…….”

“에르잔, 그만해요.”

“아닙니다, 사비나 아가씨. 수상한 사람입니다. 확실한 목적이 무엇인지, 배후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데 수상한 자들의 거처에 발을 들이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딱딱한 표정으로 사비나를 막아서는 에르잔은 거대한 체격 탓에 오솔길에 세워 놓은 장벽처럼 보였다. 이 남자를 또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하는 사비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자가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야! 이 마을에 사람이 몇이나 산다고 배후야, 배후는! 그리고 목적은 아까 말했잖아! 우리 오빠 눈 고쳐 달라고! 내 입장에선 외지인인 너희들이 훨씬 더 수상하다 뭐!”

갑자기 다다다 쏘아붙이는 여자의 말에 에르잔의 입이 벌어졌다. 미약하게 떨리는 푸른 눈동자가 “그게 부탁하는 태도인가?”라는 말을 건네는 듯했으나 여자는 입술을 샐쭉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무서운데도 용기 내서 달려왔더니, 수상한 사람 취급이나 하고…….”

“쌍방 과실로 치죠.”

사비나는 에르잔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는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내내 아래만 내려다보던 여자의 눈이 처음으로 사비나를 향했다. 흐트러진 갈색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녹색 눈이 조금 불안하게 흔들렸다.

“넌 대체 뭐야?”

“사비나 에이다나 콘바야젠입니다. 수도에서 왔어요. 에르잔은 제 호위기사입니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당신 이름은요?”

사비나의 질문에 내내 어딘가 초조해하던 여자의 얼굴이 벙쪘다가, 천천히 평정을 되찾았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미지의 대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았다는 것처럼.

“카밀라.”

* * *

청소를 하기는 하는 건지, 카밀라의 집 안은 먼지가 가득했다. 사비나는 어두운 곳도 지저분한 곳도 익숙해서 별로 관여치 않았으나 청결하지 못한 것에 아무래도 먼저 눈길이 가버리는 에르잔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둡네요…….”

“창문이 많이 낡아서 닦아도 닦아도 금방 먼지가 껴 버리니까 소용이 없더라고.”

“청소하기 귀찮아서 내버려 두신 게 아니었다고요?”

“너 말 진짜 못되게 한다. 사비나. 네 호위기사, 원래 이래?”

한 번 마음을 놓은 사람은 편하게 대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천성적으로 말이 많은 건지 카밀라가 에르잔을 가리키며 투덜거리자, 사비나는 그에게 눈짓했다.

“에르잔. 얌전히 있으세요.”

“……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테이블 앞의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발소리를 들은 건지, 남자는 사비나가 서 있는 문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카이라트, 데려왔어.”

“제 동생이 신세를 졌다고 들었습니다.”

카이라트가 사비나를 향해 꾸벅, 상체를 굽혀 인사했다. “신세는 무슨…….”이라고 카밀라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카이라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바르게 앉은 것 같은데도 등이 약간 굽은 데다 발뒤꿈치가 살짝 떠 있는 것을 보아 남자는 오랫동안 침대 생활을 한 듯했다.

“카밀라에게 들었어요. 앞이 안 보이신다고요.”

“아, 제가 만나 뵙고자 한 것은 저를 치료해 달라는 말씀을 드리려던 게 아니라…….”

“잠시 실례할게요.”

카밀라처럼 다른 신체 부위에도 손상이 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앞이 보이지 않으면 불편할 것이다. 카이라트로부터 저주의 주술을 거두기 위해 사비나가 손을 내민 순간, 마치 정전기가 튀듯 찌르르한 감촉이 흘렀다.

“읏……!”

사비나는 잠시 손을 물렀다가, 다시 카이라트의 눈가로 옮겨갔다. 그러나 또다시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을 거부하는 진동이 울렸다.

‘뭐지?’

당황한 것은 사비나뿐 아니라 카밀라도 마찬가지였다. 제 얼굴과 다리의 주술을 저절로 빨아들이던 사비나가 카이라트에게는 손을 대는 것조차 하지 못할 줄이야.

“뭔가, 당신에게 닿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어요.”

“역시 그랬군요.”

카이라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 버린 눈을 고쳐 주지 못했는데도 오히려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옮겨갈 리 없는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죄 없는 카밀라와는 달리, 이건 제 업보니까.”

“업보요?”

“인과에 의해 만들어진 업보는 저주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죠.”

사비나가 죽음의 화신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저주를 받으면 누군가는 사고를 당해서 죽고, 누군가는 병이 악화되어 죽으며, 누군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발작적인 증세를 보이며 숨을 거두었다.

서서히 거동이 불편해져 죽음에 이르는 사람부터 즉사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으나, 정작 주술사인 사비나는 상대를 죽일 수만 있을 뿐 ‘어떻게 죽게 하는가’는 선택할 수 없었다.

저주를 흡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못의 저주를 거두고 카림의 저주를 거두었을 때는 신체에 타격이 오지 않는 대신 금세 이성을 잃어버렸고, 카밀라의 저주를 흡수할 때는 몸속에 불쾌한 것을 욱여넣는 듯한 고통이 들었지만 이성을 잃지 않고 에르잔과 몸을 겹쳤다.

‘그러고 보니 처음 동쪽 첨탑의 지하에서 바르셀다라는 남자를 만났을 때는…… 마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 같았어.’

카림이나 카밀라를 만졌을 때 그들은 사비나의 저주에 오염되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셀다에게 접촉했을 때는, 그의 저주가 사비나에게 흘러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사비나의 저주도 그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카이라트의 증상은 꼭 그때의 반대였다.

“저주를 밀어내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제 저주를 거둘 방법은 찾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보다 사비나, 당신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죠?”

“로스카옌 신부님으로부터 당신이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묻혀 있던 연못을 정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 우물의 정화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우물……요?”

카이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나가 카밀라를 돌아보자, 그녀는 조금 질린 듯한 얼굴로 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뒷문으로 나가서 가다 보면 나오는 우물이야. 찜찜해서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곳에 뭐가 있나요?”

“있다기보다는…… 아니, 이걸 있다고 해야 하나? 있어야 할 건 없고 없어야 할 게 잔뜩이라고 해야 하나.”

카밀라의 표정과 카이라트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아마 우물에도 연못처럼 사람들의 시체가 있을 듯했다. 어쩌면 연못을 정화한 후에 카림의 저주를 흡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카이라트의 저주를 풀려면 우물을 먼저 정화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비나는 카이라트의 요청에 수긍했고, 카밀라의 안내를 받아 집 밖으로 나왔다.

우물은 카밀라와 카이라트의 거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지, 우물을 덮은 뚜껑 위에 먼지가 한가득이었다. 에르잔이 먼지를 털어 내고 뚜껑을 벗기자, 진득한 저주의 기운이 뻗어 나왔다.

“카밀라. 이 우물은…….”

“15년 전에 온 군인들이 여기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밀어 넣었어.”

“군인들이 사람들의 시신을 우물에 담갔다는 말입니까?”

에르잔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나 카밀라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우물가로 다가가 아래를 가리켰다.

“너무 깊어서 시체를 건질 수가 없었어. 시신을 끈으로 묶어서 끌어올리면 끈이 끊어지고, 그렇다고 사람이 내려가서 하나씩 짊어지고 기어 올라올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 후로 이 우물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

“그랬군요.”

사비나는 카밀라의 곁으로 다가가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저 새까맣기만 했다. 그러나 저 안쪽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저주의 기운은 무엇보다도 확실했다.

카이라트의 눈을 고치려면, 이 우물 속에 깃든 저주를 먼저 제거해야 했다.

“카밀라, 에르잔. 좀 도와줄래요? 저주를 제거하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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