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
사비나가 놀란 듯 작게 탄성을 질렀다. 움찔 놀라 어깨를 굳힌 것은 에르잔도 마찬가지였다. 제게 이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손 안에서 훅 불거져 나온 금색의 따스한 빛이 검은 꽃을 휩싸고는, 그대로 화르륵 불타올랐다는 이유가 더욱 컸다.
“사비나 아가씨, 꽃이…… 사라졌습니다.”
“저주의 대상을 없애 버린 거예요.”
죽음의 저주를 받으면 대부분의 생물은 그대로 죽어 버린다. 드물게 죽지 않고 생명을 보전하는 경우는 저주와 하나가 되어 버려, 본질이 변해 버린 경우뿐이다.
카림이 나이를 먹지 않고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처럼.
어제 만난 일그러진 얼굴의 여인이 상처를 몸에 지닌 채 계속 그대로 살아가야 했던 것처럼.
저주의 주술에 잠식된 이상, 그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한들 저주와 떨어질 수 없는 몸이 된다.
그래서 에르잔처럼 저주를 지우는 정화의 빛을 접하면, 정화의 빛은 저주의 주술과 저주와 결합한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전부 태워 버리는 것이다.
“에르잔. 혹시 저주만 지울 수는 없나요?”
“저주만, 이라고 하셔도…… 이 꽃도 어떻게 태울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꽃을 태우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곰팡이가 핀 벽을 닦는 생각을 했습니다.”
“…….”
청소한다고 생각한 걸까.
틀린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죽음의 저주라는 것은 결국 생명을 오염시키는 부정한 것이니까. 사제가 베푸는 신성 마법이 마물을 물리치는 것 또한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니 에르잔이 더러운 곳을 청소하는 상황을 떠올려서 저주가 깃든 꽃을 태워 버린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에르잔의 정화술이 저주와 결합한 대상 자체를 없애 버리는 거라면…… 저주의 핵만을 지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네.’
사비나는 동쪽 첨탑의 지하에서, 에르잔이 괴물 남자를 상대했을 때를 떠올렸다. 바르셀다라고 했던가. 사비나를 구하고자 남자를 제압했던 에르잔의 손에서 황금색의 불길이 치솟아 남자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 로스카옌 사제가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에르잔의 황금빛 정화의 불길은 바르셀다를 완전히 태워 없애 버렸을지도 모른다.
“에르잔.”
“예, 아가씨.”
“당신이 정화술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을 때, 어쩌면 당신의 힘으로 저주의 핵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했거든요.”
“아…….”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마을의 네 귀에 감금된 제물, 저주의 핵을 가진 사람들. 만약 에르잔의 정화술이 저주만을 지울 수 있다면, 저주의 핵을 품은 이들을 구할 수 있다. 그건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해서 다시 갈무리하다가 이성을 잃고 또 몸을 섞게 되는 것보다 훨씬 깔끔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에르잔은 저주만을 골라서 지울 수 없다. 에르잔이 정화하고자 한다면 저주의 핵을 지닌 사람 또한 목숨을 잃게 된다.
결국 사비나가 저주의 핵을 흡수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죄송합니다. 제가 불민하여 아가씨께 도움이 되지 못해…….”
“아니에요. 당신이 저주에 오염되지 않고, 정화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안 것만으로 충분한 수확이에요.”
금세 우울한 표정을 지은 에르잔을 위로하며 사비나는 가만히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죽음의 화신인 그녀가 이렇게 접촉해도, 에르잔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의 몸에 감도는 것은 아주 강력한 정화의 기운. 사악한 주술을 물리치는 신성함.
“에르잔은 굉장한 사람이에요.”
“제가 말입니까?”
“네. 만약 세상에 에르잔 같은 사람만이 가득하다면, 더 이상 귀족 가문은 주술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그럼 더 이상 저주로 누군가를 죽이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을 거고.”
만약 에르잔이 귀족이었다면, 아버지의 정적이었다면, 사비나의 죽음의 저주로도 제거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는 콘바야젠 가문에 엄청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사비나는 아버지가 에르잔을 자신과 함께 이 마을로 보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황궁 근위대의 신병으로 아직은 이렇다 할 공훈을 세우지 못했지만, 에르잔은 성실하고 유능한 기사다. 아마도 제대로 근위대에 배속됐더라면 금방 승진을 해서 황제의 오른팔이 되겠지.
그렇다면 황제를 칩거시키고 권력을 휘두르려는 아버지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저주가 통하지 않는 에르잔을 사비나와 함께 이런 외딴 마을로 보내 버린 것이리라.
‘아버지는 에르잔이 방해가 돼서 이곳에 보낸 것 같지만…… 내게는 오히려 잘됐는걸.’
사비나의 죽음의 저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정화의 화신, 에르잔.
그가 베푸는 정화술은 비단 저주뿐 아니라, 그 저주와 결합한 대상까지 황금빛의 불꽃으로 남김없이 태워 버린다.
‘에르잔이라면 나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의 저주에 사랑받는 사비나는 죽을 수 없지만, 에르잔의 정화에 불타 사라지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에르잔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사비나 아가씨. 저는 아가씨께 별로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했는걸요.”
“아뇨.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앞으로는 더욱 도움이 될 거고요.”
“그렇…… 습니까?”
“네. 분명히.”
사비나는 에르잔을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에르잔은, 마치 구원을 얻은 듯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비나의 모습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비나 아가씨…….”
살랑살랑. 가슴속에서 따스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한없이 깊어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친다는 사실이 기뻤다.
문득 숨결이 가까워졌다. 그것이 제가 사비나에게 들이댄 탓인지, 그녀가 가까워져 온 탓인지 에르잔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긴 속눈썹이 스르르 내려와 검은 눈동자를 덮는 것만이 보였을 뿐이다.
코끝에 닿는 부드러운 한숨을 느끼며 에르잔이 고개를 기울이려는 순간, 발밑에서 야옹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엇!”
―캬웅!
이번에는 제법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작은 짐승이 에르잔의 정강이를 할퀴었다. 날쌘 동작이었지만 두꺼운 가죽부츠를 뚫기는 어려웠는지, 켕 하는 울음소리를 내더니 폴짝 뛰어 울타리 뒤로 멀어진다.
“에르잔. 저게 뭐죠?”
“아무래도 고양이 같습니다.”
에르잔의 손바닥만 한, 새까만 짐승이었다. 몸 주위에 검은 안개가 어른어른해 정확한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늘씬한 다리에 긴 꼬리를 가진 짐승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어린 새끼인 것을 보니 어미가 사냥을 간 틈에 빠져나온 게 아닐까 합니다. 광장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니 어딘가로 옮겨 놔야…….”
“에르잔, 잠깐만요!”
사비나는 고양이를 잡으려는 에르잔을 만류했다. 아무 때나 정화의 불꽃이 일어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만에 하나라도 고양이의 몸체에 아른거리는 검은 저주의 안개를 에르잔이 정화하려 든다면, 저 고양이는 황금빛 불꽃에 타 죽어 버릴 것이다.
“에르잔이 만지면 위험해요. 제가 할게요.”
두 사람을 경계하는 듯 바짝 털을 세우며 그르릉거리는 작은 생물을 향해, 사비나는 손을 내밀었다. 검은 안개를 빨아들이는 정도라면 털끝에 손이 스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사비나가 검은 안개를 채 빨아들이기도 전에, 고양이의 날카로운 발톱이 사비나의 손톱을 할퀴었다.
“사비나 아가씨!”
사비나의 손을 할퀸 고양이는 캬오옹 하는 울음소리를 내더니 휙 몸을 돌려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렇게나 작은 짐승이었는데 어찌나 빠른지, 쫓아갈 새도 없이 모습이 사라져 에르잔은 당황했다.
“아가씨, 손등에 피가…….”
“괜찮아요.”
몸집은 작아 보였는데 손톱이 어찌나 길었는지, 사비나의 손등에 빨간 줄이 꽤 깊게 나 있었다.
“아가씨, 소독을 하셔야 합니다. 야생동물이라면 발톱에 독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두면 나으니까.”
독이건 파상풍이건 사비나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설령 야생동물의 발톱이 아니라 맹독을 묻힌 칼날에 베이더라도 그녀는 죽지 않는다.
사비나의 몸에 흐르는 저주의 농도는 무엇보다도 짙어, 그 어떤 독도 그녀의 몸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사비나는 혀를 내밀어 손등에 흐르는 피를 핥았다. 독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극도로 농축된 저주의 주술이 녹아든 선홍색의 피는 아름다웠다. 에르잔은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고양이의 발톱에 상처가 난 그녀의 손등이 안쓰러운 동시에, 혀를 내밀어 상처를 핥는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색스러워 보였다.
저 피를 핥으면 단맛이 느껴질까 하는 황당한 생각까지 들어, 에르잔은 얼른 고개를 털고는 가슴 안쪽 포켓에 든 손수건을 꺼내 사비나의 손등에 묶어 주었다.
“사비나 아가씨. 조금만 더, 당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실 수는 없습니까?”
“에르잔. 난 정말로 괜찮아요.”
“어떻게 그런…….”
주군인 사비나가 괜찮다고 하는데, 기사인 에르잔이 괜찮지 않다고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복잡한 속마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제가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필하겠습니다.”
제 주군에게 다가갈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에르잔은 사비나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앞서 걷기 시작했다. 사비나는 조금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가, 에르잔의 뒤를 따라갔다.
광장을 지나자 잡초가 무성히 자라는 밭이 나왔다. 에르잔은 한쪽이 뜯겨 나간 채 제대로 보수도 되지 않은 울타리를 밀어내고 사비나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잎이 누렇게 변색된 잡초가 무성한 밭을 지나니, 낡은 가옥이 보였다.
‘연기가 나는 걸 보니 사람이 살긴 하는구나.’
문가에 얹어 놓은 통나무의 둘레만 다른 세 채의 집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주위에는 높이 쌓아 올린 돌무더기가 여러 개 있었다. 꼭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만든 듯 삐뚤빼뚤하게 쌓여 있는 돌무더기를 지나, 두 사람은 문 앞에 섰다.
“계십니까?”
달그락. 쨍강.
생활 소음이라기엔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후다닥 뛰어가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안이 고요해졌다.
“…….”
누구냐는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사람이라곤 없었던 것처럼 기묘한 정적이 이어졌다.
‘없는 척을 하는 건가.’
하지만 방금 들린 소음을 기분 탓으로 넘기기엔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너무 확실했다.
“우리가 외부인이라 경계하는 걸까요?”
“문을 두드려 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꼭 저주의 영향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산골 마을은 폐쇄적이라 외부인을 경계하기 마련이다. 옷을 빌려준 보답을 하려 했지만 자신을 기피하는 사람에게 굳이 들이대는 것도 민폐이긴 했다.
‘선물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봐. 그럼 문 앞에 놓고 가도 되는데.’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 두고,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그만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고 다가갔다. 그 순간, 창문에 얼핏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 보였다.
부옇게 먼지가 낀 창문 너머로 자신을 주시하는 두 개의 눈동자가 보였다.
“어!”
놀란 것은 사비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부릅뜬 눈의 주인은 후다닥 몸을 숨겼다. 창문에는 곧 아무것도 비치지 않게 되었다.
“에르잔, 그만 돌아가요.”
“안에 사람이 있는 게 확실합니다.”
“있는데도 없는 척을 한다는 건 우리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잖아요. 돌아가요.”
“……예.”
모처럼 사비나를 데리고 이곳까지 왔는데, 주군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하는 기사의 걸음이 무거웠다. 다시 돌무더기를 지나 오솔길로 들어가려던 사비나는 뒤에서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다.
벌어진 문틈으로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흰 손이 나와 있었다. 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 문 뒤에 서서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