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25화 (25/189)

25화

“정보?”

“그래! 다른 녀석들은 너희를 상대도 안 하려고 할 거야. 내가 아니면 너희가 정보를 얻을 상대도 없을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로스카옌 사제는 중요한 단서는 무엇 하나 알려 주지 않았고, 카림은 마을의 북쪽에 사는 사람들이 돌보고 있다. 그리고 어제 사비나가 얼굴과 다리를 고쳐 준 여자는 그녀를 괴물 보듯 진저리 치며 도망쳤다.

“왜 우리에게 정보를 주려는 거죠? 우린 외지인이잖아요. 수상하게 여기는 게 보통일 텐데.”

“너희가 바르셀다를 다치게 했다며.”

“바르셀다?”

사비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나자예프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에르잔으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지 세 걸음쯤 떨어지더니, 어깨를 풀 듯 팔을 돌렸다.

“동쪽 첨탑 지하에 있는 내 동생.”

“아……!”

팔이 검은 털로 뒤덮여 있던 괴물 같은 남자. 그는 사비나를 상처 입혀 제 저주를 그녀에게 쏟아붓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저주를 빨아들이고는 괴로워했다.

그리고 몸부림치던 그를 에르잔이 제압하던 와중, 로스카옌 사제가 나타나 만류했다.

‘마을의 네 귀에 자리 잡은 저주의 핵. 그 핵을 품은 제물에게는 소중한 사람…… 가족이 있다고 했지. 나자예프가 그 남자의 가족이었구나.’

사비나는 나자예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나자예프. 당신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온 건가요?”

“응? 아니.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자예프는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보였다.

“바르셀다가 내가 받을 피해를 대신 받아 주고 있어서 말이지, 너희가 그 녀석을 죽게 만들기라도 했다간 나를 보호해 줄 수단이 사라져서 나까지 죽게 되거든.”

“……네?”

자신이 받을 피해를 대신 받는다니, 그건 바르셀다가 나자예프의 제물이라는 뜻인가.

‘마을에 저주를 내린 주술사의 반동을 대신 받아 내는 저주의 핵이라며. 그렇다면 이 남자가 저주를 내린 주술사인가?’

사비나가 눈을 가늘게 하자, 나자예프는 꼭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데, 난 주술사가 아니야. 물론 이 마을에 저주를 내린 것도 내가 아니지. 난 그저 이 마을의 저주받은 구성원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

“생각해 봐. 누구는 걸을 수 없게 되고 누구는 피부가 눌어붙고, 누구는 장기가 꼬이거나 계속 피를 토해야 해. 가뜩이나 시간이 멈춘 마을에 사는 것도 곤혹스러운데 육체적인 고통까지 받으라니, 너무하잖아? 그래서 바르셀다에게 대신 맡아 달라고 부탁한 거라고.”

어차피 그는 저주의 핵으로서 동쪽 첨탑의 지하에 갇혀 있으니까, 괴로움에 괴로움이 조금 더해져 봤자 상관없다는 뜻인가.

“……진짜 형 맞아요?”

“세상엔 남보다 못한 형제도 있는 법이지.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도 피해자라고. 나와 바르셀다로 실험한 게 성공해서 형이…….”

나자예프는 눈가를 문지르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사비나는 조금 기가 막혔으나 그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사실은 나자예프가 인간쓰레기라는 사실이 아니라, 동쪽 첨탑 지하에 감금된 남자가 그와 형제이며, 나자예프의 신체에 가해지는 저주의 압력 또한 대신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주술사가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주술도구가 있으면 가능해.”

나자예프는 검은 장갑 끝을 이로 물어 잡아당겼다. 그러자 의외로 고와 보이는 흰 손등이 드러나면서, 그의 엄지와 중지를 감싼 반지가 반짝이는 빛을 냈다. 심플한 금색 링이었다.

“……반지?”

“마력을 담은 주술도구지. 반동을 받을 목표물과 동일한 액세서리를 지니도록 하면 제물을 만들 수 있어. 바르셀다도 똑같은 걸 갖고 있거든.”

그런가? 털에 뒤덮여서 반지를 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나자예프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력을 불어넣은 동일한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것만으로 주술사가 아니라도 제물을 마련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나자예프. 잠깐 손 내밀어 보세요.”

“이런, 손 터치부터 시작하자는 거니? 너무 구시대적인걸. 유행이 빠른 수도 아가씨라면 더 화끈한 스킨십을 시도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입은 다무시고요.”

사비나는 나자예프의 손끝에 제 손끝을 살짝. 아주 살짝 스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와 닿는 것만으로 살이 썩어 들어가겠지만, 저주에 잠식된 마을 사람이라면 큰 영향은 없으리라는 계산하에서였다.

그러나 나자예프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의 주위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물음표가 하나 떠오른 것도 같았지만.

“……당신은 내게 닿아도 괜찮은 거군요.”

“괜찮지 않아. 미인에게 닿는 기분은 아주 찌릿찌릿한걸. 허리 아래가 지끈지끈해.”

“아가씨. 역시 이 자는 치우는 게 좋겠습니다.”

정색하며 나자예프의 멱살을 틀어쥐는 에르잔을 사비나는 말리지 않았다. 저주에 잠식된 사람일지라도 사비나의 몸에 닿으면 반응이 있다. 카림도, 어제 치료해 준 얼굴 한쪽이 일그러진 여자도 그러했다. 그러나 나자예프는 사비나에게 닿아도 멀쩡하다. 그 사실에서 사비나는 두 가지 가정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하나는 나자예프도 에르잔처럼 저주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정말로 바르셀다라는 남자를 제물로 두고 있어, 나자예프에게 가해지는 저주의 충격이 전부 그에게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

에르잔에게 멱살을 잡혀 거꾸로 탈탈 털리다 호흡곤란이 온 듯한 나자예프의 얼굴을 보며 사비나는 눈을 흐리게 했다. 나자예프를 에르잔과 한데 묶고 싶지 않다는 본능 아닌 신념아래 사비나의 예측은 후자로 기울었다.

‘그렇다면 내가 저주를 빨아들이지 않더라도, 저주의 핵을 품은 사람과 동일한 주술도구를 지니게 하면 저주를 옮겨올 수 있다는 뜻이네.’

물론 사비나는 주술도구를 만들 줄 모르고, 설령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제물의 제물로서 누군가가 대신 괴로움을 받을 뿐이니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방법의 하나로서 다른 해결책을 찾게 된 것만은 좋았다.

“에르잔. 나자예프를 그만 놓아주세요.”

“사비나 아가씨. 이 남자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합니다.”

“아직 물어볼 게 남아 있거든요.”

사비나의 말에 에르잔이 나자예프를 놓아주었다. 바닥에서 반 뼘가량 들어 올려진 채로 매달려 있던 나자예프의 발이 겨우 바닥에 닿았다.

“고마워, 사비나. 나를 구해 준 답례는 몸으로 갚도록 할게.”

“필요 없어요. 그보다 나자예프에게 물어볼 게 있는데요.”

“사비나가 내게 궁금한 게 뭘까. 내 신체 사이즈? 수치로 답해 주는 것보다 나는 몸으로 알려 주는 쪽이 취향인데.”

역시 이 남자에게 물어보는 건 헛수고다.

“그냥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어요. 에르잔. 이 사람 좀 조용히 시켜요.”

“예, 사비나 아가씨.”

“잠깐! 사비나, 내가 알고 있는 중요한…… 커헉!”

에르잔에게 뒷목을 맞은 나자예프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는 옆으로 쓰러졌다.

자신에게 오는 피해를 동생이 대신 받고 있다는 소리는 역시 허세가 아니었을까? 사비나는 조금 의심이 갔다.

‘그래도 수확이 없는 건 아니야.’

나자예프로부터 얻은 정보 덕분에 사비나는 이 마을의 대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술도구를 사용하면 주술사가 아니라도 ‘제물’을 만들 수 있으며, 제물이 죽으면 그 반동이 고스란히 원래 목표를 향해 돌아온다는 사실도.

“동쪽 첨탑은 알겠는데, 나머지 세 어귀에는 누가 갇혀 있을까요? 그 사람들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사비나 아가씨. 아직 마을을 전부 둘러본 것도 아닌데, 바로 그곳에 접근하는 건 위험합니다.”

나자예프가 또다시 사비나를 찾아와 성희롱 가득한 발언을 지껄이지 못하도록 꽁꽁 묶고 재갈까지 물린 에르잔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알아요. 경계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까. 그럼 우선은 마을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죠.”

두 사람이 머무는 오두막에서 광장으로 가는 길은 확실히 저주가 옅어졌다.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는 까닭인지, 아니면 에르잔의 따스한 기운이 저주를 밀어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밀어낸다기보다도…… 어라?’

사비나는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듯 놀란 얼굴로 에르잔을 쳐다보았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에르잔. 당신이 동쪽 첨탑에서 그 남자를 붙잡았을 때, 그 사람 몸이 황금빛으로 타올랐던 거 기억해요?”

저주는 음험한 기운이기에 주로 어둡고 칙칙한 빛을 띠지만, 그렇다고 전부 검은색인 건 아니었다. 타락의 핏빛 저주나 독의 초록빛 저주도 있었다.

하지만 황금빛은 대체 무슨 주술일까. 그것도 저주를 태우는 빛이라니. 사비나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에게 뭔가 특별한 힘이 있는지도 몰라요.”

“특별한 힘이라고 하심은…….”

“에르잔. 뭔가 짚이는 거 없어요? 이곳에 오기 전에 어떤 신기한 경험을 했다거나.”

에르잔은 그저 평범하게 훈련소를 나와, 황궁 근위대에 입단했을 뿐이다. 물론 그 성적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실로 우수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마법이나 주술 같은 것과는 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오히려 저는 신체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배속도 받지 못했지요.”

“부적합 판정?”

“무엇이 원인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콘바야겐 백작께서는 그 체질 때문에 저를 찾아오셨다고 말씀하셨지요.”

콘바야겐 백작은 에르잔의 존재에 무척 놀라워하면서도, 그가 바로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인재라면서 굉장히 반가워했다. 그리고 에르잔에게 사비나의 호위를 맡겼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 거야. 에르잔이 나의 저주에 영향을 받지 않는 특수한 체질이라는 걸.’

죽음의 저주뿐 아니라 다른 저주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영향을 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의 주체를 공격할 수도 있는 힘을 지녔다.

그것은 아마도, 저주를 없애는 정화의 힘일 터.

“에르잔. 혹시, 이 꽃의 저주를 정화할 수 있겠어요?”

사비나는 울타리 아래에 피어 있는 검은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화…… 말입니까? 제가요?”

사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정화란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에르잔은 주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비나는 마치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에르잔은 머쓱한 듯 목덜미를 쓸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는데 해 보지도 않고 못 한다고 할 수는 없지.’

에르잔이 해 보겠다고 말하자, 사비나는 울타리 아래를 가리켰다. 잡초 사이에 피어 있던 꽃은 죽음의 저주로 검게 오염되어 있었다.

에르잔이 꽃을 건드리자, 검은 꽃잎과 제 손 사이에서 뭔가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흩날렸다. 주술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뭐가 날린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그마한 빛이었다.

‘정화라…… 더러운 것을 청소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에르잔은 검은 꽃의 줄기를 가만히 쥐고, 곰팡이가 가득 슨 벽을 걸레로 닦아 낼 때처럼 깨끗해지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러자 에르잔의 손끝에서 황금색의 빛이 훅, 퍼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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