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22화 (22/189)

22화

* * *

낡은 문이 끼익, 하고 흔들리는 소리에 사비나는 눈을 떴다. 어느새 그녀는 제 방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런. 언제 돌아왔지? 에르잔은…….’

그녀를 방에 데려다주고 나간 것일까.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려 했지만 어쩐지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온몸이 무겁고 눈앞이 어찔해, 사비나는 옆으로 누운 채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가씨. 깨어나셨습니까?”

“에, 에르잔?”

완전히 혼자 있다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다가온 에르잔이 사비나가 누운 침대 앞으로 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괜찮아요. 참을 수 있으니까…….”

치료를 위해 로스카옌 사제를 불러올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했는데, 그다음 순간 에르잔의 손이 사비나의 뺨을 감쌌다. 그 온기에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얼굴을 가까이하려던 에르잔은 사비나에게 키스하는 대신,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흘러내린 앞머리가 피부를 간지럽혔다.

“저기, 에르잔…….”

“혼자서 힘겨워하지 마십시오.”

“네?”

“얼굴이 뜨겁습니다.”

열이 있었던가. 사비나는 조금 어깨를 움츠렸다가 의식적으로 몸을 바로 했다. 아까는 어지러웠는데, 에르잔이 뺨을 감싸고 이마를 맞댄 순간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정신은 오히려 몽롱해졌다. 어쩐지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 부끄러워, 사비나는 시선을 피했다.

“하, 한숨 자면 나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귓전에 들린 목소리에 심장이 쿵 울렸다. 사비나는 놀란 눈으로 에르잔을 바라보았다. 늘 맑다고 생각했던 푸른 눈동자가 유달리 깊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맑기 때문에 그 깊이를 더욱 잘 알 수 있다고 해야 할까.

에르잔의 푸른 눈에 비친 제 모습이 꼭 물속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에르잔…….”

“아가씨께서 쓰러지셨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는 저도 압니다.”

무엇을, 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코끝에 걸리는 숨결을 느낀 순간부터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건드린 적도 없는 다리 사이가 간질간질해, 사비나는 허벅지에 힘을 주어 다리 사이를 압박했다.

자각은 없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옷자락 사이로 파고드는 커다란 손을 느끼고, 사비나는 뜨거운 한숨을 흘렸다.

“읏, 에르잔……!”

“저는 주술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만, 그 힘을 사용하신 후에 아가씨께서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 아니. 저…….”

첫날 그 괴물 같은 남자의 저주를 흡수한 것이나, 연못을 정화하느라 저주를 흡수했을 때는 흘러드는 저주의 기운에 잠식되어 금방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비나는 이성을 잃고 욕망에만 몸을 맡겨 에르잔과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힘의 소모가 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여자의 얼굴을 치료하면서 흡수한 저주의 기운이 별로 강하지 않았다고 할까. 의식을 잃어버리지도 않았는데 성욕만을 느끼는 상태로, 에르잔을 마주하는 것이 사비나는 부끄러웠다.

“에르잔. 다, 당신이 이런 것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아가씨를 모시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에르잔은 아직 자신에게 그다음 말을 할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말을 삼켰지만, 사비나는 에르잔이 삼킨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지. 에르잔은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니까…….’

마치 마차에 치이려는 사람을 보면 달려가 끌어당기고,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헤엄쳐 가서 뭍으로 끌어 올려 주는 것처럼. 사비나가 성욕을 느낄 때 그것을 풀어 주겠다는 걸까. 측은지심과 인류애라는 것을 단어로만 접해본 사비나는 에르잔의 행동 또한 그런 감정의 연장선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아가씨와 함께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에르잔…….”

“저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사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르잔은 충분히, 과분할 만큼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비나로서는 에르잔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도와준다면 마을을 정화하는 것도 수월해지고, 저주의 주술을 컨트롤하기도 쉬워진다.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정말 이대로 관계를 가져도 좋은 걸까. 한 번 결심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비나는 혼란스러웠다. 에르잔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미안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제 속마음을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뭐가 두려운 거지?’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면서 몸이 떨려 왔다. 이유는 모른다. 사비나는 그저 혼란스러운 얼굴로 에르잔을 올려다보았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흡.”

망설인 것이 실책이었을까. 에르잔이 입을 맞춰 오자, 사비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낡은 침대는 사비나 한 사람이 눕기에는 충분했으나 덩치가 큰 에르잔까지 감당하기에는 다소 비좁았다. 하지만 사비나는 침대가 비좁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런 것을 파악할 만큼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에르잔, 아……!”

커다란 손이 손목을 붙잡고 들어 올리더니, 손바닥에 촉촉한 혀가 닿았다. 손금이 뻗어 나간 형태를 혀로 파악하듯 천천히 훑던 혀는 위로 올라가 손가락을 삼켜 버렸다.

“어맛!”

“후우…….”

커다란 혀가 손가락을 감싸 쪽쪽 빨아들이자, 목 뒤부터 시작해서 오싹하고 짜릿한 감각이 등뼈를 타고 내려가 엉덩이까지 훑고 지나갔다. 손가락 사이사이의 여린 살 부위를 혀로 핥을 때는 저절로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앗, 아. 에르잔…….”

손가락을 핥던 혀가 멀어지더니,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허리를 붙잡았다. 구불구불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가슴 위를 스쳤다. 양손으로 허리를 감싸 더듬어 올라온 손끝이 가슴 밑을 살짝 들어 올리자, 빳빳하게 서 버린 유두에 따끈한 것이 와 닿았다.

“으응, 아…….”

커다란 입이 가슴을 다 삼켜 버릴 듯이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은근하면서도 집요하게 구속해 오는 에르잔의 애무에, 사비나는 무심코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던 손을 거두고 머리를 끌어안았다.

늘 그녀보다 한참은 키가 높아서 만질 기회가 없었는데, 에르잔의 머리카락은 무척 결이 좋고 부드러웠다.

커다란 체격이나 다부진 손 탓에 제대로 눈여겨볼 기회가 없었을 뿐, 의외로 피부도 매끈하고 속눈썹도 길다.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새파란 하늘을 담은 듯한 맑은 눈동자는 마치 거울처럼 그녀의 모습을 비춘다.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젊은 청년기사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사비나는 하늘이 비친 호수에 빠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비나 아가씨. 뒤로 기대십시오.”

“으응, 네…….”

침대에 양모 이불을 깔아 두었던 까닭에, 등에 닿는 감촉이 푹신했다. 누웠다는 안도감을 느낀 것도 잠시, 아랫배를 다 덮을 만큼 커다란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오자 사비나는 바짝 긴장했다.

무서운 것도 불쾌한 것도 아니지만, 이 야릇한 기분은 도무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쓰다듬기만 할 뿐인데도 얌전히 있을 수가 없어 자꾸 몸을 뒤척이게 된다고 할까.

간지럽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한 이상한 그 느낌을 이제까지 사비나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쓰다듬어 줄 때나, 저주의 제물들이 그녀의 몸을 탐하려 들 때 느꼈던 불쾌한 접촉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처음 몸을 기댔을 때처럼 마냥 기분 좋고 편안한 느낌도 아니었다.

“아, 에르잔! 그만…….”

“죄송합니다. 싫으셨습니까?”

“아,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싫은 건 아닌데, 피하고 싶다.

피하고 싶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사비나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진 것을 거부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건지, 허벅지를 주무르던 에르잔이 움직임을 멈추고 살며시 손을 뗐다. 만지면 견디지 못하고 비척거리면서, 막상 멀어져 가는 그 체온을 아쉽다고 생각해버리는 자신을 대체 어찌해야 할까. 사비나는 혼란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제가 경험이 부족하여…….”

“네?”

“훈련소에서 검술과 체술 외에 가사 일과 간단한 응급 처치도 배웠지만, 이런 일은 배운 적이 없어 서투릅니다. 용서하십시오.”

“아, 아니에요, 그런 게!”

기사를 양성하는 훈련소에서 남녀 간의 교합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야 당연한 것을, 에르잔이 너무 정직하게 사과하는 바람에 사비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미숙한지 능숙한지를 묻는다면 사비나야말로 미숙한 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주의 의식과도 같은 그 행위에서 기실 사비나가 하는 행동은 울면서 부질없는 저항을 반복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남녀 간의 교합이란 결국 두 사람이 함께하는 행위다. 앞서 에르잔과 관계했던 기억이 없는 사비나로서는 어쨌거나 이것이 두 사람의 합의하에 하는 첫 섹스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어떻게든 사비나를 기분 좋게 하려 노력하는 에르잔과는 달리, 사비나는 그저 이 상황이 낯설고 어색하고 민망하여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게 차이점일까.

“에, 에르잔이야말로…….”

“예?”

“그,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게 있어요? 나도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사비나가 알기로는 두 번째, 에르잔이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은 첫날밤을 포함하면 세 번째 관계임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몸에 닿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아니, 사실 어색한 것은 아니다.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다만 앞서는 것은 마음뿐, 몸이 따라 주질 않는다고 할까. 뭔가 하고는 싶은데 뭘 해야 좋을지를 알 수가 없어 사비나는 답답했다.

“사비나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원하는 거라뇨…….”

“편하신 대로 계십시오. 맞추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이럴 때조차도 호위기사다운 성실함을 발휘하는 면이 에르잔답다고 해야 할까?

섹스한다고 해서 바로 에르잔을 끌어안고 매달릴 만큼 사비나는 사람과의 접촉에 익숙하지 못했다.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가 가슴께에 올렸다가 방황하던 그녀는 결국 이불을 부여잡았다.

누군가 본다면 에르잔이 억지로 사비나를 겁탈하고, 그녀는 가만히 누워 참고 있을 뿐인 모양새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굴을 붉힌 채로, 몸이 닿지 않도록 손을 침대에 두고 있으면서도, 사비나의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에르잔을 향하고 있었다.

섹스에도, 여자의 심리를 헤아리는 일에도 미숙한 에르잔이지만 눈을 마주한 사람의 감정을 읽어 내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사비나의 눈에 거부의 뜻이 조금도 없음을 감지한 에르잔은 다시금 그녀의 허벅지를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사비나 아가씨, 불쾌해지면 바로 말씀하십시오.”

“읏, 아뇨…….”

에르잔이 만지는 건 불쾌하지 않아요.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문득 부끄러워져 사비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에르잔은 조금 가까이 고개를 기울여 사비나의 표정을 살피면서 손을 움직였다.

“저기, 에르잔.”

“예, 아가씨.”

“어, 얼굴이 너무 가깝지 않아요?”

“이렇게 해야 잘 보입니다.”

무엇이?

그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골반뼈에서 허벅지 안쪽으로 이어지는 부위를 살그머니 문질러 주는 움직임에 사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절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며 허리가 둥글게 휘었다.

“아!”

“이곳을 만져 드리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좋아, 하는 게…… 아, 아읏!”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