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20화 (20/189)

20화

사비나가 무엇을 생각하며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지 못하는 에르잔은 눈만 깜박이다가 로스카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주를 풀 방법은 전혀 없는 겁니까?”

“없는 건 아니지. 나머지 셋의 희생을 감수하도록 설득하면 자네들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건 해결책이 아니지 않습니까!”

최악의 가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는 로스카옌에게 에르잔이 달려들 듯이 물었다. 그 바람에 로스카옌의 법모가 흔들려 바닥에 떨어졌다.

“어허, 이것 참.”

“……죄송합니다.”

에르잔이 얼른 바닥에 떨어진 법모를 주워 건네주자, 로스카옌은 그것을 긴 소매로 한 번 털고는 다시 머리에 뒤집어썼다.

“아가씨께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고, 넷 중에 셋을 희생하게 만드는 것도 싫다고 한다면, 다른 방법은 없네. 세상일이란 한 가지를 얻으면 나머지를 잃을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방법은 있어요.”

사비나가 조용히 답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방법이 있다고요. 네 사람 중 누구도 죽지 않고, 저주의 균형도 무너뜨리지 않을 방법이.”

이 마을에 저주의 술법을 건 술자는 저주의 핵을 넷으로 나누어, 네 명의 제물을 이 마을 네 어귀에 감금해 두었다.

저주의 반동은 저주의 핵에 깃든다.

저주의 핵은 술자로부터 제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는 것은, 제물에 옮겨간 핵을 술자가 거두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내 몸으로 핵을 옮기면 돼.’

저주의 핵을 사비나가 흡수하면, 저주의 반동도 자연히 그녀의 몸으로 옮겨 온다. 어차피 자신은 죽지 않으니,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괴로워질 뿐이다. 네 개의 핵을 모두 수거하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감금되어 있던 네 사람은 저주의 반동에서 해방될 것이다.

“저는 사실…….”

자신은 저주의 화신이며, 모든 죽음의 저주를 흡수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렇게 말하려는데, 로스카옌이 사비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가씨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에르잔.”

“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네가 모시는 아가씨가 결정할 일이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 주겠네. 우선 남쪽으로 가서는 안 돼. 그쪽은 네나뷔스테의 구역이니까.”

“네나뷔스테?”

신기한 이름이었다. 사람의 이름으로는 그다지 쓰이지 않는 단어인데.

에르잔은 의아해했지만 사비나는 로스카옌 사제의 말에 수긍했다. 어쨌든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된다는 것 아닌가. 행동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 에르잔과는 달리 들으면 그대로 수긍하는 사비나는 왜 가서는 안 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카림은 어제부터 마을 북쪽에 머물게 했다네. 아마 안정이 될 때까지는 나오지 않을 게야. 어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벅찬 아이가 자네들에게 인사하러 오는 것은 무리겠지. 연못이 시신을 건져 준 것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감사 인사를 하지.”

사비나는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카림과 만나 벌써 감사 인사를 들었지만, 끼어들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나자예프라고, 손버릇이 나쁜 데다 걸핏하면 시비를 거는 녀석이 있네. 흰 로브를 걸치고 도끼를 들고 다니는 녀석이라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울 거야. 가급적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부딪혔다. 부딪힌 정도가 아니라 거하게 두들겨 패서 고목나무에 꽁꽁 묶어 두기까지 한 에르잔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눈만 굴렸다.

“만약 오딜이 자네와 아가씨께 호의를 표하게 만들 수 있다면, 협조할 이들이 늘어날 거라네.”

“오딜이요? 어떤 사람입니까?”

“오래전, 이 마을의 호위대장이었던 청년일세. 에르잔 자네보다 나이가 많아.”

“아마 대부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갓 성인이 된 에르잔은 기실 이 마을에서 상당히 어린 축에 속했다. 어린아이인 카림이야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아니, 만약 카림도 어린아이인 채로 보낸 세월이 상당했다면…… 어쩌면 에르잔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사비나는 에르잔의 허리께에나 올 법한 카림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그 아이가 에르잔보다 나이가 많다면 에르잔이 카림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얼른 고개를 붕붕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로스카옌 신부님. 그럼 우선 그 오딜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면 될까요? 어디에 있나요?”

“아니요, 오딜은 이제 호위대장에서 물러났습니다. 더 이상 이 마을에는 자신이 필요 없을 테니 조용히 살겠다면서 숲으로 들어갔거든요.”

“그렇다면…….”

“작은 마을이니 소식은 금방 도는 법이지요. 만날 생각이 있다면 그쪽에서 찾아올 겁니다.”

한 번 숨은 사람은 너무 찾지 않는 게 좋습니다, 라고 덧붙이며 로스카옌 사제는 복슬복슬한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수염 사이로 얼핏 보이는 황금색 목걸이를 발견한 사비나가 무심코 소리를 높였다.

“아!”

“음? 왜 그러십니까?”

“로스카옌 신부님. 그 목걸이…….”

로스카옌 사제가 목에 걸고 있는 황금으로 만든 목걸이에는 성인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하던 것과 똑같아.’

아버지의 제안으로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의 광장까지 마중을 나와 있던 것이 로스카옌 사제였다.

‘어쩌면 로스카옌은 아버지와 상당한 친분이 있는 건지도 몰라.’

사비나가 목걸이를 유심히 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로스카옌은 긴 수염으로 목걸이를 덮어 버리고는 수염을 쓸었다.

“이것은 성물(聖物)입니다.”

“성물이요?”

“교회에 반드시 모셔야 하는 세 가지 것 중 하나지요.”

“반드시 모셔야 한다고요?”

“저주를 막고 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요. 대부분의 사제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아가씨께서는 처음 보시는 모양이로군요.”

“아…….”

법모나 사제복처럼, 사제라면 반드시 지니고 있는 것. 신의 상징물이라는 건가.

“처음 보는 건 아니에요. 사실은 아버지도 같은 것을 하고 계셨거든요.”

“호오. 그렇습니까.”

로스카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며 긴 소매로 몸을 가렸다.

“성물은 주로 신전에 보관하지만, 독특한 취미를 원하는 귀족들이 수집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모조품을 만드는 곳도 있으니 구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얼마든지…… 그런가요.”

그렇다면 아버지의 목걸이는 그저 수집품일까? 귀족들이 성물을 수집하는 데다 모조품까지 있다면 같은 모양의 목걸이가 여러 개 존재하는 것도 특이한 일은 아니다.

사비나는 과민반응 했다는 생각에 조금 민망해졌다. 아는 것이 아버지의 목걸이밖에 없으니 같은 모양의 목걸이를 한 로스카옌 사제와의 사이에 무언가 있으리라고 넘겨짚었다.

‘내 착각이었구나.’

머쓱해진 사비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눈가를 누그러뜨렸다. 로스카옌 사제는 목걸이를 가리듯,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또 궁금하신 것이 있습니까?”

“네? 아…… 아니요.”

“그럼 돌아가 주셨으면 하는군요. 기도를 해야 하니까요.”

미사는 보지 않지만 기도는 하는 걸까. 하긴 사제라면 그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비나와 에르잔은 로스카옌 사제에게 인사하고 교회를 빠져나왔다.

저주에 물들었다고는 해도 고요한 산속 마을이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늘의 하늘은 조금 색이 탁하기는 해도 구름이 없어, 상당히 높아 보였다.

해가 떠 있는 대낮에, 이토록 한가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사비나는 조금 감격했다. 이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비나 아가씨.”

뒤따라오던 에르잔이 나직이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가요?”

“뒤를 돌아보지 마시고, 그대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심상치 않은 대화의 내용에 사비나의 어깨가 흠칫 굳었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으려 목을 크흠, 하고 가다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말하세요, 에르잔.”

“저희를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6. 과거의 그림자를 거두는 방법

뒤따라오는 사람이라니?

사비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볼 뻔했다가, 얼른 고개를 앞으로 고정했다.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지만, 그녀의 주의는 온통 뒤에 쏠려 있었다.

“우리를 습격하려는 걸까요?”

“아뇨, 무기 같은 것은 들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비나 아가씨와 비슷한 나이의 여인입니다만…….”

여인이라니, 그렇다면 습격이라기보다는 정찰일까. 마을에 머물기로 한 자신들을 수상한 사람이라 여겨 감시하러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다니요……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데 이쪽에서 먼저 적대할 수는 없잖아요.”

“감시도 문제입니다. 만약 저 여인이 돌아가 다른 이들에게 저희의 상태를 알린다면, 무리 지어 찾아올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닙니다.”

“아…… 그런 문제가 있었네요.”

사비나는 이 마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 생각이 없다. 오히려 돕고 싶었다.

그러나 제 안의 저주의 힘을 사용해 구하고자 한다는 것을 말한다면 과연 누가 믿을 것인가. 저주의 힘에 관한 것은 그녀 자신만이 안고 있는 비밀인 것을.

마을 사람들로선 외부인인 그녀가 이상한 힘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하려 한다고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폐쇄적인 마을에서 외부인을 적대시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쪽이 더 신빙성이 있기도 하고.

“그럼 지금 해결하죠.”

“예? 지금 말입니까?”

사비나는 빙글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 있는 사람이군요.”

흠칫,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그들을 바라보던 여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짙게 그림자가 져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어깨를 떨며 뒷걸음질 치는 상대방을 보고, 사비나는 그녀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목적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었던 걸까. 단순히 수상하게 여겨 살피러 나온 거라면 다행이지만, 빈틈을 노려 무리 지어 공격이라도 한다 치면 곤란해진다.

사비나는 목을 가다듬고 여인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저기, 잠깐만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여인은 사비나가 불러 세운 순간, 눈에 띌 정도로 파드득 떨더니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리가 절뚝거린 탓에 몇 걸음 도망치지도 못하고, 따라잡히고 말았다.

“괜찮으세요? 다리를 다치셨나요?”

“가까이 오지 마!”

여인은 얼굴을 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명백한 거부였으나 사비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여인의 다리에서 스멀거리며 흘러나오는 저주의 기운. 아마도 여인이 다리를 절게 된 것은 저주의 주술 때문일 것이다.

사비나가 그것을 흡수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자, 여인이 다시 진저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저리 가!”

“상처를 보게 해 주세요.”

“싫어, 저리 가! 저리 가아아아!”

거의 절규와도 같은 비명을 지르며 엎드린 여인은 양팔로 얼굴을 가리고 덜덜 떨고 있었다. 이 또한 저주의 영향일까.

이토록 싫어하는 사람에게 다가서는 일은 사비나로서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저주의 주술은 결국 숙주의 몸에 기생하여 생명력을 빨아먹는 존재. 여기서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치료함이 옳았다.

여인을 자극하지 않도록 에르잔에게 물러나라고 눈짓한 사비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듯 엉금엉금 기어가던 여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술 때문에 고통스러우신 거죠?”

“만지지 마! 만지지 마! 나한테 손대지 마!”

“괜찮아요. 치료해 드리려는 거예요.”

“싫어! 싫어! 날 보지 마! 보지 말란 말이야!”

저주를 흡수하려 손을 뻗자, 여인은 발작하듯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손톱을 세워 사비나를 마구 할퀴기 시작했다.

“사비나 아가씨!”

“오지 마세요, 에르잔!”

사비나의 얼굴과 팔을 할퀸 손톱 끝에서 검고 끈적거리는 것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더욱 강한 죽음의 기운을 감지한 주술이, 농도 짙은 쪽으로 옮겨가고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로 야트막한 접촉에도 효과가 있는 걸까.’

사비나는 제 어깨를 꽉 붙들 여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을 잡힌 여인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싫어! 보지 마! 아아아악!”

울부짖던 여인이 제 손목을 붙든 사비나의 팔을 꽉 물었다. 하지만 사비나는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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