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9화 (19/189)

19화

“다가오지 마세요.”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치한 취급부터 하는 거야? 너무하네. 도회지의 아가씨들은 쌀쌀맞다고 듣기는 했지만.”

“당신은 누구죠?”

“나자예프. 이름 멋지지? 나, 이래 봬도 우리 마을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인기인이거든.”

사비나는 조금 당황했다. 놀리는 건지 원래 대화 방식이 저런 건지, 손에 들고 있는 도끼만 아니었더라면 길거리에서 헌팅을 하는 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가벼운 말투로 흥얼거리며 남자가 가까워졌다.

사비나는 나자예프라고 자신을 지칭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위협적인 무기를 들고 다가온 것과는 달리, 남자는 그것을 휘두를 생각이 없는 듯 무기를 잡지 않은 왼손을 사비나를 향해 내밀었다. 커다란 손을 감싼 새까만 장갑 위로 반지르르한 윤기가 흘렀다.

“아가씨가 로스카옌이 말한 방문객이지? 잘 부탁해.”

“…….”

“내민 손을 무안하게 만드는 건, 수도 쪽의 문화일까? 이해하기 어려운데.”

“악수는 할 수 없어요.”

위험해 보이는 행색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건네는 수상한 인물이지만, 남자로부터 저주의 기운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함부로 몸이 닿았다간 자신의 ‘죽음의 저주’에 오염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사비나는 나자예프의 손이 자신에게 닿지 않도록 옆으로 물러났다.

“로스카옌 신부님께서 마을 사람들과 마주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나이를 먹으면 다 그렇게 편협해진다니까. 서로 만나서 부대껴야 친해지는 거지. 어려워할 것 없어. 난 꽤 개방적인 성격이거든. 미인에게는 특히.”

싱글거리며 웃는 눈빛이 섬뜩했다. 남자에게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 착각이었다. 물론 그는 도끼로 사비나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가씨, 이름은?”

“이러지 마세요.”

“이름도 알려 주지 않는 거야? 이게 그건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도 세 번은 튕겨야 한다는?”

긴 다리가 척, 울타리에 걸쳐졌다. 나자예프가 길 한중간을 가로막고 있었기에, 사비나는 울타리와 남자 사이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금방이라도 몸이 닿을 것 같아서, 사비나는 허리를 뒤로 빼며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저기, 그렇게 무서워하면 내가 진짜 치한이라도 된 것 같은데.”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거죠?”

“이름 알려 줘.”

“……사비나예요.”

마지못해 대답하자, 나자예프가 씩 웃었다.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오른손에 들고 있던 손도끼를 한 바퀴 휘둘렀다. 사비나는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도끼에 찍혀 다칠까 두려웠던 것이 아니다. 다친 부위에서 피가 튀면 남자에게 저주가 퍼질까 경계했던 것이다.

“왜 이러는 거예요? 이름 알려 줬잖아요.”

“원하는 게 이름 하나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다른 것도 있어.”

“또 뭐예요?”

“사비나. 데이트하지 않을래? 도시에서 온 사람이 보기엔 별 볼 일 없는 마을이겠지만, 이쪽 숲은 꽤 괜찮거든.”

나자예프가 손가락으로 광장의 반대편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키가 큰 나무들이 우거진 숲은 산으로 이어지는 까닭에 상당히 어두웠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청춘을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지.”

“그럼 혼자서 즐기러 가시면 되겠네요.”

“상당히 직접적인 거절이네.”

“저는 로스카옌 신부님을 만나러 가야 해요.”

“놀라운걸. 제 나이보다도 더 늙은 할배보다는 젊은 내가 낫지 않아? 아니면 사비나는 취향이 그쪽인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자예프가 사비나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검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청록색 눈동자 안에서 뭔가 빛이 반짝이는 듯했다. 사비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이 남자로부터 멀어져야 하는데, 뒤는 울타리가 있고 앞은 이 남자가 버티고 있어서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사비나. 나는 미인에게 상냥한 남자니까.”

“그럼 상냥하게 잠들면 되겠군.”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나자예프의 목을 움켜쥐고는 마치 물건을 치우듯 휙 옆으로 던져 버렸다. 나자예프는 꽥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커다란 그림자가 사비나를 감싸듯이 다가왔다. 뛰어왔는지 에르잔의 결 좋은 금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나자예프가 사비나의 앞에 버티고 서 있을 때는 상당히 위압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는데, 에르잔에 비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자예프와는 달리 에르잔은 이렇게 덩치가 커다란데도 위협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거지만.

“아야야…… 뭐야. 기사가 일반인을 이렇게 막 밀치고 그래도 돼?”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나자예프가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상체를 일으켰다가, 날아온 도낏자루를 맞고 다시 늘씬하게 뻗었다.

에르잔이 날과 자루를 분리해 버린 까닭에 날에 베이지는 않았지만, 워낙 자루가 두껍고 무거운 데다 밑에는 징까지 박혀 있던 탓에 무방비한 상태로 얻어맞은 나자예프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에, 에르잔! 괜찮아요? 그 사람은……!”

“이런 아침부터 도끼를 들고 다니며 부녀자를 위협하는 인간이라면 뻔하지요. 두세 시간은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로스카옌에게 데려가 위험인물을 가둘 곳을 물어보겠지만, 에르잔과 사비나의 행선지가 바로 로스카옌이 있는 교회였기에 그는 나자예프의 로브 끈을 풀어 고목나무에 손발을 꽁꽁 묶는 정도로만 처리하고, 사비나를 데리고 서쪽의 교회를 향해 넘어갔다.

* * *

“일찍 오셨군요.”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온 에르잔과 사비나를 보고, 로스카옌 사제가 말했다. 두 사람이 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별로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사비나는 에르잔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로스카옌에게 다가갔다. 검은 법모 아래 흰 수염이 덥수룩한 주름진 얼굴에는 지나온 세월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가 살아온 이 마을이 어떤 곳인지, 사비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로스카옌 신부님.”

“……예.”

“저는 이 마을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당당하게 고하는 사비나를 보고, 로스카옌 사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떠나라고 말한 것은 로스카옌 쪽이었으니, 당연히 이유를 들며 반대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순순히 수긍했다.

“아가씨께서 그러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괜찮은 건가요?”

“제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 마을의 신부지 영주가 아니니까요.”

제국에 속한 이상 이 마을도 어느 영주의 땅이겠지만, 이토록 작은 마을에는 세금을 수급하러 오는 관원도 감찰관도 없었다.

워낙 산속 깊은 곳에 외따로이 떨어진 마을이라, 고작해야 얼마 되지도 않을 곡식이며 가죽을 받으려 인력을 파견하는 것이 손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는 외부인이 들어오지 않은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비나와 에르잔이 15년 만의 ‘방문자’인 셈이다.

“다만…… 이 마을 사람들이 다 당신들을 환영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알고 있어요. 괜찮아요.”

저주의 화신인 자신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사비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적은 이 마을에서 머물 곳을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역할을 찾는 것.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아닌, 살리고 구하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이 마을에 남기로 한 이유였다.

“로스카옌 신부님. 저희가 이 마을에 머물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에르잔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사비나의 호위만을 하는 거라면 안전하기 지키기만 하면 되니 문제가 없지만, 사비나가 마을 사람들을 돕기로 한 이상 필연적으로 충돌은 생길 것이다.

그녀를 습격하려 드는 괴한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마을 사람을 상대로 무력제압을 할 수는 없다. 에르잔은 자신의 역할을 파악해야 했다.

“에르잔.”

로스카옌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 그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깨달은 에르잔은 조금 긴장했다.

“동쪽 첨탑에 갇혀 있던 남자를 기억하나?”

“예.”

“그 남자를 가두어 둔 것은 이 마을의 균형을 위해서야. 다시는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지만…….”

“아가씨께서 그를 구하려 들면, 기껏 시간을 멈춰 둔 이 마을의 균형이 무너지고 마니까.”

“균형이 무너진다고요?”

“그래. 저주의 균형이 무너진다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가씨라면 알고 계시겠지요?”

로스카옌이 사비나를 돌아보자,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주의 주술에는 반드시 반동이 되돌아오지만, 그 반동을 없애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제물’을 따로 두는 것.

저주의 술법은 술자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나면 술자에게로 되돌아오나, 저주가 되돌아오는 궤적에 술자의 각인을 새긴 제물을 두면, 의지가 없는 저주는 제물을 술자로 착각하고 그 몸에 엉겨 붙는다.

그래서 술자는 저주의 주술을 행하고도 반동을 받지 않는다.

‘나는 죽지 않는 몸이니까, 따로 제물을 둘 필요가 없었지만…….’

죽여도 죽지 않는 죽음의 화신이란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마을 단위로 저주의 술법을 행한다면 필연적으로 술자는 사망하게 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제물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는 걸까.

“그럼…… 이 마을의 저주를 그 남자 혼자서 전부 감당하고 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마을의 네 귀에 나뉘어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저주의 핵이라고 부릅니다.”

저주의 ‘핵’. 제물에 옮긴 술자의 각인. 저주는 핵에서 출발하여 성과를 내고는 핵으로 되돌아온다. 술자가 저주를 베풀고, 자신의 핵을 제물에 옮기면 저주를 베풀고도 반동을 입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한 사람에게 옮겨 놓으면 그가 죽고 핵마저 잃게 되니, 넷으로 나누어 딱 죽지 않을 만큼으로 조절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건…… 이 마을 사람들이, 네 사람을 제물로 저주의 술법을 행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로스카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용히 가라앉은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확인한 사비나는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사람을 죽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만드는 것으로 마을의 저주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인가. 대체 무엇을 위해? 사비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는 그 사람들을 구할 거예요.”

“저주의 네 핵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명을 구하는 순간 나머지 세 명은 목숨을 잃게 되지요.”

“그럼 그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그냥 두겠다는 건가요?”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로스카옌은 사비나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의 탁한 눈동자는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소중한 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구해야 하는 거잖아요.”

“만약 사비나 아가씨께서 그들 가운데 하나를 구하고자 한다면, 나머지 세 ‘핵’의 가족이 그것을 막을 테지요.”

사비나가 어느 한 명을 구하는 순간, 세 명이 목숨을 잃게 될 테니까.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이 죽지 않도록 그들은 사비나를 막을 것이다.

아니, 그저 막는 것이 아니라, 사비나의 원래 목적을 알게 된 순간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

사비나는 죽을 수 없으니, 죽을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녀를 감금하려 들까.

‘나 하나라면 몰라도, 그렇게 되면 에르잔이 위험해.’

도끼를 든 남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제압하는 용맹한 기사를 진심으로 걱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그녀 하나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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