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8화 (18/189)

18화

“에르잔. 몸은 괜찮아요?”

에르잔은 알몸이었다. 저주를 피하는 부적 같은 것도 두르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깃든 저주가 에르잔을 상처 입히지 않았을까?

사비나는 상처 나거나 멍들거나 썩은 자국이 없는지 에르잔의 모습을 훑다가, 허벅지 사이에 자리한 커다란 물건을 보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이런 걸 보려고 한 게 아니라고!’

이유는 알 수 없고 믿기도 어렵지만, 놀랍게도 에르잔은 멀쩡했다. 상한 곳 하나 없어 보였다.

‘저주가 통하지 않은 걸까? 왜?’

사비나는 에르잔이 동쪽 첨탑의 지하에서 괴물 같은 남자를 상대했을 때를 떠올렸다. 사비나조차도 괴로워할 만큼 강한 저주에 잠식되어 있던 남자였는데, 에르잔이 그를 붙잡는 순간 황금색의 불길이 치솟았다.

마치 저주를 태우는 강렬한 태양의 빛처럼.

“에르잔. 당신은 정화술사인가요?”

“그게 무엇입니까?”

“…….”

저주를 없애는 정화의 술법. 신성마법을 구사하는 사제만이 베풀 수 있다는 그것을 에르잔이 사용할 수 있다면 아귀가 맞는다. 하지만 에르잔의 반응으로 보아 그는 정화술사는커녕 주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체질……이라는 걸까?’

사제는 아니지만 타고나기를 정화의 주술을 구사할 수 있게 태어난 게 아닐까.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여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겨우 납득 가는 이유는 찾아낸 사비나는 조금 안심했다.

“다행이에요.”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은 나에게 닿아도, 괜찮은 것 같아서…….”

자신에게 닿아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 아버지 이외에 그런 사람을 처음 만났다. 문득 눈가가 촉촉해져, 사비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

어깨를 따스한 손이 감쌌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러길 바랐습니다.”

“…….”

“사비나 아가씨께 닿고 싶었습니다.”

단단한 굳은살이 박인 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애정 어린 손길에 사비나는 당황했다.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것은, 이토록 따스한 일이었던가.

“제가 아가씨를 원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르잔…….”

“그러니 제게 사과하지 마십시오. 부끄러워하지도 마시고요. 그리고…….”

에르잔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그는 말을 고르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크게 심호흡하고는 진지한 눈으로 사비나를 마주 보았다.

“아가씨께서 더는 홀로 괴로워하시지 않도록,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이 사람은 어쩌면 이토록 헌신적일까. 사비나는 에르잔의 푸른 두 눈을 마주하는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에르잔은 상냥해. 다정하고…… 그러니까 나를 도와주었던 거야.’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고 하던가. 에르잔은 남들보다 그 마음이 배 이상 강한 남자일 것이다. 그러니 이성을 잃고 헐떡이는 사비나를 보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녀와 몸을 섞어야 하는 기분 나쁜 행위에도 기꺼이 따라 준 것이리라.

에르잔의 눈가와 귀가 빨갛게 물든 이유를 짐작도 못 하는 사비나는 홀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성욕이나 공포 이외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 사비나는 너무 오랜 세월을 저주의 화신으로서 살아왔다.

“고마워요, 에르잔…….”

에르잔이 그녀를 받아 주는 것이 이성적인 호감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사비나는 불쌍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충성스러운 기사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 * *

사비나는 본래 아침을 먹지 않았으나,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에르잔의 얼굴이 너무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이어서, 사비나는 어쩔 수 없이 에르잔이 만든 요리를 전부 먹어야 했다. 물론 사비나는 맛만 본 정도고, 접시를 비운 건 에르잔이었지만.

에르잔이 뒷정리를 할 동안 사비나는 오두막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죽음의 저주가 가득하여 숨조차 쉬기 불편한 곳이었는데, 어느새 주위의 공기가 맑아졌다.

‘전부 내 몸에 흡수되는 건가?’

어제 연못을 정화한 일이 아니었다면 ‘자연적으로 저주의 농도가 옅어졌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한 번 저주를 흡수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이 흡수하는 게 아니라면, 하루가 다르게 주위의 저주가 옅어지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이런 체질이라서 쓸모가 있을 때도 있구나.’

사비나가 단순히 이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 저주의 농도가 옅어진다면, 매일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것만으로 이 마을은 조금 더 살기 편한 곳이 되지 않을까.

사비나는 창 너머로 에르잔의 뒷모습을 흘끗 보았다. 그는 설거지를 하고 방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낡은 집이라 청소한다고 그렇게 깨끗해지는 것도 아닐 텐데, 워낙 성실한 성격이라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첫날에도 엄청 깔끔하게 청소를 했지.’

원래 깔끔한 남자인가 보다. 그렇게 넘겨짚은 사비나는 발소리를 죽여 오두막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졌다.

에르잔이 그녀를 찾으러 나온다면 안전한 길로만 다녀야 할 것이다. 그가 나오기 전에 혼자서 가 볼 수 있는 곳은 가 봐야 했다.

“누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잿빛 머리에 회색 눈동자. 창백한 피부에 앙상한 팔다리. 사비나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카림이구나.”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요.”

마치 이웃에게 인사하듯, 카림이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어른에게 건네기에는 다소 무례한 인사였으나 사비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카림의 얼굴이 밝아진 것으로 충분했다.

“어제 로스카옌 신부님이 사람들을 보내 주셨어요. 이제 엄마가 더 이상 추운 물속에 있지 않아도 된대요.”

“그러니? 다행이구나.”

연못에 빠진 시신은 대체 몇 구일까. 뼈들이 서로 뒤섞여 골라내는 것도 무리였을 것이다. 뼛조각의 수가 상당했으니 꽤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을 텐데, 이 마을에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까? 사비나는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카림. 연못에 있던 뼈들을 누가 건져 주었니?”

“북쪽 사람들이요. 탑에 빼앗기면 안 된댔어요.”

“탑?”

“동쪽 탑이요. 무서운 사람이 있어서, 가면 안 돼요.”

사비나는 고개를 들어 마을의 동쪽 어귀에 있는 첨탑을 바라보았다. 그 지하에 있던 괴물 같은 남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사비나와 에르잔이 그와 마주친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로스카옌 사제가 했던 말도 기억난다.

사비나는 지하에 갇힌 남자가 괴물 같은 모습에, 공격적인 성향이기에 마을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감금해 두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림은 시신의 뼈들을 탑에 빼앗기면 안 된다고 말했다.

“카림. 저 동쪽 탑은 뭐 하는 곳이지?”

“원래는 저쪽에 교회가 있었어요.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울적해졌는지, 카림이 눈썹을 찡그렸다. 어제 바로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인 아이에게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을까. 사비나는 카림에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말하지 않아도.”

“우으……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어느 날부터인가, 교회가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동쪽 탑은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어요.”

떠올리기 괴로운 기억이라 얼굴을 찡그리는 줄 알았는데, 카림은 그저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 것인지 눈알을 굴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가면 안 된댔어요. 마을의 사방 끝은 위험하다고요.”

“사방 끝? 동쪽 탑만이 아니고?”

“네. 그러니까 누나도 가지 마세요.”

사방 끝이라. 그렇다면 동쪽뿐만 아니라 서쪽과 북쪽, 남쪽에도 뭔가 위험한 것이 있다는 말일까. 어쩌면 동쪽 첨탑의 지하에 남자가 감금되어 있던 것처럼, 다른 곳에도 저주받은 존재가 잡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그런 짓을 하지?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저주의 주술까지 사용해서 취해야 할 이득 같은 게 없을 텐데.’

저주의 화신이 한 명만 있어도, 몰락해 가는 가문 하나를 일으켜 세우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기실 이런 자그마한 마을이라면 저주의 화신을 만들어야 할 필요 자체가 없다. 마을에서 사람이 죽으면 노동력만 줄어들 뿐이 아닌가. 사비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나. 전 이제 가 봐야 해요. 제가 보고 있어야 엄마가 하늘로 갈 수 있다고 그랬거든요.”

장례를 치른다는 걸까. 카림의 어머니는 다른 죽은 자들의 뼈와 함께 불에 태워지는 모양이었다.

“카림. 네 어머니 장례식에 나도 가도 될까?”

“안 돼요. 북쪽은 체념한 이들의 공간이니까.”

“응?”

“외부인이 들어오면 안 된댔어요.”

연못을 정화하기는 했으나, 사비나는 외지인이다. 마을 사람끼리 장례를 치르는 장소에 연고도 없는 그녀가 가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카림의 말을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서 도움이 될 것도 없다고 판단한 사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돌아가 보렴.”

“엄마를 만나게 해 줘서 고마워요, 누나.”

카림은 사비나를 향해 밝게 웃어 보이고는, 작은 등을 돌려 북쪽으로 뛰어갔다. 아이의 가느다란 팔다리가 힘차게 움직이며 재빨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사비나는 이유 모를 따스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고맙다고 그랬어.’

아버지는 저주의 술법을 행하고도 죽지 않는 사비나를 일컬어 「저주의 화신」이라고 불렀다.

사비나는 이제까지 죽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사람을 저주해야 하는 자신의 힘을 혐오했다. 자신은 살아 있어서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와서 처음으로, 아이를 구했다.

제 역할을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해맑아진 카림의 모습을 보고, 사비나는 결심했다.

‘이 마을에 가득한 저주의 술법을 내가 거두어들이자.’

이 마을에 드리워진 짙은 저주의 술법을 과연 자신이 다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비나는 두렵지 않았다. 불로불사인 그녀는 제아무리 많은 저주를 들이마셔도 죽지 않는다. 단지 고통스러울 뿐.

어쩌면 한계를 넘는 술법을 받아들이면 불로불사의 강제력마저 깨져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들 후회는 없을 것이다.

‘죽어 버린다면 더는 누군가를 저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성공해도, 실패해도 사비나에게는 나쁠 것이 없는 일이다. 드디어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사비나는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기지개를 켰다.

그때였다.

“아침 산책이 정말 좋기는 좋구나. 길에서 이런 미인과 마주치다니 말이야.”

혼잣말이라기엔 상당히 진득한 감정이 묻어 나오는 음성이었다. 사비나가 흠칫 놀라 팔을 내리자,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 건너편에서 시커먼 인영이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섰다.

“이런, 그렇게 경계하지 마. 하루의 시작부터 기분을 잡쳤다간 온종일 불쾌하잖아? 이럴 땐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거라고.”

누가 듣는다면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인 줄 알 정도로 친근한 인사를 건네며 남자가 다가왔다. 사비나는 흠칫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에르잔만큼은 아니지만 남자는 상당히 키가 컸다. 사비나와 비슷한 나잇대일까. 햇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듯한 까만 머리를 뒤로 묶고, 하얀 로브를 걸친 젊은 남자는 단정한 생김새에, 웃는 얼굴도 제법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사비나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에게 태평하게 인사를 건넬 수는 없었다.

검은 장갑을 낀 남자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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