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3화 (13/189)

13화

“사비나 아가씨!”

“에, 에르잔?”

사비나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에르잔의 얼굴과 붙잡힌 손목을 번갈아 보자, 그가 얼른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밤중에 혼자 돌아다니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밤 산책을 하실 거였다면 제게 말씀을 하셨어야지요…….”

거기까지 말하고, 제 과실을 눈치챈 에르잔은 그녀의 곁을 비운 일을 사과했다.

“말씀도 드리지 않고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괘, 괜찮아요.”

얼굴을 가릴 후드가 없어, 사비나는 고개를 숙여 에르잔의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인 탓에 시선이 그의 손에 닿았다. 에르잔은 뭔가 천으로 된 뭉치를 들고 있었다.

“에르잔, 그건……?”

“사비나 아가씨께서 입으실 새 옷을 구해 왔습니다. 더 좋은 것을 구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에르잔이 사과할 때마다 사비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민망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에르잔이 건네준 옷을 받아 들었다.

아버지가 준 것처럼 고급스러운 재질은 아니지만, 제법 깨끗한 옷이다. 주홍색과 금색 실로 기하학적인 문양이 수놓인 루바하에, 흰색과 검은색실로 수놓은 문양이 격자로 들어간 붉은 치마(Plachta)15)였다.

“이건 어디서 구해 온 건가요?”

“로스카옌 신부님께서 구해다 주셨습니다.”

“구해다 줬다고요?”

로스카옌은 사제가 아닌가. 그가 여자 옷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옷을 빌려 가져왔을 터인데.

‘이 마을에 여자가 살고 있나?’

첨탑의 지하에는 수상한 남자가 감금되어 있었고, 밤늦게 연못가에 나온 어린아이도 있었으니 마을에 여자가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로스카옌 사제 말고는 아무도 없는 유령 마을 같았는데, 어딘가에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거였구나.’

사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르잔. 이 마을에 사람이 몇이나 살고 있나요?”

“글쎄요, 그것은…….”

호위 임무를 맡은 만큼, 사비나가 잠든 사이에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기는 했지만 인구수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에르잔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직 인구수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바로 조사에 착수하겠습니다.”

“아, 아뇨. 그…… 수치상의 의미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대략 어느 정도의 인구 규모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자신은 저주의 화신이 아닌가. 부적과 같은, 저주를 막기 위한 보조적 수단 없이 그녀와 접촉하면 평범한 사람은 곧바로 죽음의 저주에 씌게 된다. 만약 생각보다 이 마을의 사람 수가 많다면 사비나의 행동반경은 지극히 제한되고 만다.

‘차라리 낯선 사람이라고 경계하면 다행이지만, 호기심에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두 사람은 날이 밝은 뒤 함께 로스카옌 신부를 찾아가기로 하고,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4. 여명이 밝아 오는 순간

그저 조용하게 살아가던 이 산속 마을에 군대가 쳐들어온 것은 15년 전 겨울이었다.

짙은 녹색의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쓴 군인들은 집마다 불을 지르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산적이라도 하지 않을 법한 극악무도한 짓이었다.

동쪽에는 분노, 서쪽에는 욕망, 남쪽에는 증오, 그리고 북쪽에는 체념.

마을의 네 어귀에 ‘저주의 핵’을 심은 그들은 이곳을 저주의 마을로 만들었다. 저주에 씐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몸이 녹아 사라져 가고, 살아남은 이들의 시간은 멈춰 버렸다.

아니, 과연 이것을 ‘살아 있다’고 말해도 좋을까.

어쩌면 저주의 주술에 잠식된 순간, 그들은 모두 죽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무엇일까. 유령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리지 않을까.

이곳은 저주받은 마을.

살아 있는 유령들의 무덤이다.

* * *

“후우…….”

사제 로스카옌은 일기장을 덮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질이 나쁜 양가죽으로 책등을 싼 탓에 꽤 거칠고 무거웠지만 어차피 그에게 일기란 현재를 기록하여 과거로 보내는 것이지, 과거의 기록을 현재에 살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문제는 없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로스카옌은 일기장을 책장에 꽂았다. 그곳에는 15권의 일기장이 꽂혀 있었다.

‘15년인가…….’

이 마을의 서쪽에 있는 교회를 지키는 신부였지만 그는 신의 종이 아니었다. 교회에서는 미사가 열리지 않고 사제는 신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검은 사제복에 검은 법모를 쓰고 있는 이유는, 이 마을의 사제였다는 사실 단 하나만이 그를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신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제라는 껍데기를 사수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은 이미 놓아 버린 지 오래였다.

로스카옌은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마을에서 혼자서만 폭삭 늙어 버린 자신의 얼굴은 언제 보아도 낯설었다. 밤하늘처럼 새카맸던 눈동자는 흐리멍덩해졌고, 빛조차 사라졌다.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뻣뻣한 피부, 주름이 없는 곳을 찾는 것이 더 빠를 만큼 나이를 먹어 버린 제 얼굴을 바라보던 로스카옌이 가만히 제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데, 문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로스카옌 신부님.”

자신을 부르는 젊은 청년기사의 목소리에 로스카옌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복장을 다시금 가다듬고, 품 안의 금색 목걸이를 살며시 쥐었다 놓았다.

“지금 나가겠네. 기다리게, 에르잔.”

눈은 침침해도 다행히 아직 다리에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걷는 것에는 지장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로스카옌은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온통 저주의 주술뿐인 이 음험한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햇살처럼 밝은 금발. 그 어떤 더러움도 정화해 버릴 듯이 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그곳에 서 있었다.

만난 지는 이제 겨우 이틀이 되었을 뿐인데, 자신을 대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듯 인사해 오는 에르잔의 모습에 로스카옌은 문득 입가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현재를 살아가는 자는 이토록 빛이 난다. 그저 홀로 있어도 태양처럼 빛이 나는 청년에게, 로스카옌은 더 이상 말을 높이지 않기로 했다.

“에르잔. 이번엔 무슨 일인가?”

“여쭐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에르잔은 살며시 왼쪽으로 비켜섰다. 로스카옌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에르잔이 비킨 자리에는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사비나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가씨도, 오셨군요.”

“사비나 에이다나 콘바야젠입니다. 어제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요.”

콘바야젠, 이라는 말에 로스카옌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속을 알 수 없어 보이는 로스카옌 사제의 표정이 흐트러진 순간, 에르잔은 아주 묘한 불쾌감을 감지했다.

“아가씨는 콘바야젠 백작과 어떤 관계입니까?”

자기소개를 하자마자 던지는 질문 치고는 그다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비나는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했기에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묘하게 날이 서린 음색에서 위화감을 감지해 내지 못한 것 또한 그녀가 사람의 적의와 공포를 마주하는 데 익숙한 까닭이었다.

‘아버지와 딸…… 관계라는 것을 밝히지 말라고 하셨지.’

사비나는 이 마을에 오기 전, 콘바야젠 백작이 지시한 대로 대답했다.

“콘바야젠 가문에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신세라……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로스카옌 사제는 두 사람을 방 안으로 안내했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혹 로스카옌 사제가 그녀에게 실례를 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이름을 밝혔을 때 한순간이었지만, 로스카옌 사제가 찜찜한 기분을 내비쳤다. 에르잔은 그것이 신경 쓰였다.

‘사비나 아가씨께서 콘바야젠 백작의 제안으로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것이 로스카옌 신부였지.’

백작 가문에서 비호하던 아가씨를 이곳으로 요양을 보내는 일이니 마을의 유지에게 연락을 해 지시를 내려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문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이곳의 사제와 접촉했을 수도 있고.

그러니 로스카옌 사제와 콘바야젠 백작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연결고리가 평범한 업무상 관계나 친분과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근거는 없지만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오자마자 사비나 아가씨와 나를 그 오두막에 안내하고 돌아가 버린 태도도 관련이 있을지 몰라.’

에르잔이 혼자서 찾아갔을 때는 빵을 나누어 주고 옷도 구해다 주며 말까지 놓게 되었으나, 묘하게 쌀쌀맞은 태도를 보인 적이 있다. 바로 첫 만남과 지금.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사비나가 곁에 있을 때였다.

어쩌면 로스카옌 사제는 콘바야젠 백작과의 사이에 앙금이 있어, 사비나가 있는 자리에서는 좋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로스카옌 신부님, 사비나 아가씨께서 신부님께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에, 에르잔. 그렇게 갑자기…….”

“물어볼 것이 무엇입니까?”

당황하는 사비나와는 달리 로스카옌은 담담하게 물었다. 떨떠름했던 조금 전 태도와는 달리 담백한 대답에 에르잔은 눈을 깜박였다.

“저어, 이 마을에는 몇 사람이나 살고 있나요?”

“궁금하신 것은 그것뿐입니까?”

로스카옌의 질문에 사비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궁금한 것은 마을 인구수가 아니다.

사비나가 흠칫거리며 뒤쪽의 에르잔을 돌아보자, 상황을 파악한 듯 에르잔은 그녀에게 묵례하고 뒤로 물러났다.

사비나와 로스카옌이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대화가 들리지 않는 거리로 멀어진 것이다. 비로소 조금 안도한 사비나는 로스카옌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사실 여쭤볼 것은 다른 거예요.”

“어떤 것입니까?”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사람을 전혀 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간밤에 어린아이를 만나서…….”

“어린아이?”

“저 앞 연못에서 울고 있었어요. 엄마가 연못에 빠졌다고 구해 달라고 하더니, 갑자기 사라졌어요.”

“…….”

로스카옌 사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걸까.

“연못에 빠진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생명을 앗아 가는 죽음의 화신답게, 사비나는 생명의 기척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연못은 아주 오래전부터 죽음에 물들어 있었다. 적어도 십여 년 정도는 그 어떤 생명도 깃들지 못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니 엄마가 빠졌다는 것은 아마 아이가 꾼 악몽이 아닐까. 어쩌면 그 아이는 엄마를 잃고 착란 상태에 빠져 엄마를 구해야 한다고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한밤중에 연못가까지 아이가 나오지 못하도록 누군가 돌봐 주어야 할 텐데.

“만난 사람은 그 아이 하나뿐입니까?”

“네.”

“……그놈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로스카옌 신부님?”

아이가 누구인지, 누구의 보호를 받고 있는지를 말해 줄 줄 알았는데, 로스카옌은 어두운 얼굴로 말을 돌렸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르는 법이거늘, 그 남자는 대체 얼마나 더 저주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야 만족할는지…….”

참고

15) 플라흐타(Плахта). 바느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직물 천을 허리에 둘러 감는 통자 모양의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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