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2화 (12/189)

12화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이 사비나의 모습을 비추었다. 보드라운 피부는 아직 분홍빛을 띠고 있었고 붉은 입술에서는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고 잠든 사비나의 얼굴은 포만감을 느끼며 잠든 짐승처럼 온화했다.

‘오늘 일도 아가씨의 병 때문이었을까?’

희귀병이라고 했으니 어떤 증상이 동반되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비나가 말한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것은 단순한 알레르기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잃을 만큼 격렬한 성적 충동을 일으킨다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자연스러웠다.

‘귀족 가문에서 보호받아 온 아가씨인걸. 차마 남에게 말하기 낯부끄러운 병이니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겠지.’

에르잔은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납득했다. 그가 다가오기만 해도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피하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작금의 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에르잔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상황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내가 접촉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배려가 부족했어. 죄송합니다, 아가씨.’

잠든 사비나에게 무언으로 사죄를 마친 에르잔은 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왔다.

‘그런데 대체 그 남자는 뭐였지?’

출입 금지 팻말이 걸린, 첨탑의 지하에 갇힌 수상한 남자. 온몸에 짐승처럼 털이 덮여 있고, 송곳니도 인간의 것으로 보기엔 너무 길었다. 차라리 괴물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까.

‘내 손이 닿은 곳부터 황금색으로 타들어 갔어…… 대체 왜지?’

아마 그대로 계속 제압하고 있었다면 남자의 몸은 완전히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로스카옌 사제가 혼비백산하여 달려온 거겠지. 교회의 위치는 분명 서쪽일 텐데, 그가 어떻게 동쪽 첨탑의 지하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달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죄수는 아닐 거야. 어쩌면 격리 수용해야 하는,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 마을이 유령 마을처럼 고요하고 침체된 분위기인 것은, 전염병이나 그에 준하는 어떤 불길한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로스카옌 신부를 찾아가 보자.’

어차피 사비나의 옷이 찢어졌으니 걸칠 것을 구해야 한다. 에르잔은 창 너머로 사비나가 편안히 잠든 것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교회를 향해 달렸다.

그날은 달빛이 무척 밝은 밤이었다.

* * *

“으응…….”

침대에서 비척거리던 사비나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날이 어두운 것을 보니 시간은 아직 새벽일까. 늘 어두운 방 안에 있었던 사비나는 피로를 풀기 위해서만 수면을 취했다.

날이 밝을 때 활동하고 어두워지면 자야 한다는 일반적인 생활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사비나는 더 이상 몸이 피로하지 않음을 깨닫자 곧바로 일어났다.

“읏……!”

허리가 욱신거려서 사비나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허리, 정확히는 허리 아래가 아려 왔다. 허벅지의 근육이 긴장으로 굳었는지, 눌러 보니 알이 배겨 있었다.

‘밑이 조금 부은 것 같은데…….’

사비나는 허벅지 안쪽을 천천히 주물렀다. 근육통이 조금 있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오히려 기분은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발가벗고 침대에 누워 있는 일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밑이 조금 욱신거릴 뿐 몸은 갓 목욕이라도 마친 것처럼 깨끗했다.

‘에르잔은 헛간에서 자고 있나?’

살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온 사비나는 옷을 걸치기 위해 선반에 손을 뻗었으나, 그곳에 걸려 있는 것은 자신의 옷이 아니었다.

두툼한 붉은 색의 외투를 보자 불현듯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에르잔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 동쪽 첨탑의 지하에서 수상한 남자를 만났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짙은 죽음의 저주를 휘감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사비나를 공격하려다가 에르잔에게 붙들렸다. 에르잔이 남자를 제압하려던 찰나 로스카옌 사제가 오고. 그리고…….

‘그런 뒤에, 어떻게 되었더라?’

사비나의 옷은 남자의 손에 찢겨 나갔다. 알몸이 된 그녀에게 에르잔이 외투를 걸쳐 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사비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릿속은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하기만 했다.

어쩐지 몽실몽실한 구름이 제 머릿속을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의문스럽기는 한데 싫은 기분은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묘했다.

사비나는 헛간으로 통하는 나무문을 살짝 밀어젖혔다. 끼익, 하는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텅 빈 어둠이 그녀를 맞이했다. 에르잔이 없었다.

‘에르잔, 어디 나갔나?’

문득 아침 식사 때가 떠올랐다. 사비나가 먹을 양고기를 구하기 위해 어젯밤 사냥을 다녀왔다던 에르잔의 말이 기억난다. 어쩌면 또 밤 사냥을 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하긴. 에르잔은 무척 식성이 좋았으니까. 로스카옌 신부에게 빌리는 식량으로는 부족할 거야.’

사비나는 멋대로 넘겨짚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잔이 사냥을 나섰다면 자신이 이렇게 한가하게 늘어져 있을 수는 없다. 자신도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했다.

‘이곳에 연못이 있었지. 물가에서 약초를 구할 수 있을 거야.’

저주는 독이 아닌 주술이지만, 고통을 경감하는 약초를 사용하면 통증은 줄일 수 있다. 사비나는 음식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으나 약초에는 해박했다. 약초를 구해 로스카옌 사제에게 건네면 그 저주에 씐 남자의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다.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는 약초도 구해 놔야지.’

혹 또다시 전투가 일어나면 에르잔이 다칠지도 모른다. 사비나는 에르잔을 위해 치료약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옷을 구해야 하는데…….”

우선 에르잔의 외투를 몸에 걸치고 단추를 채웠지만, 체격 차이가 상당하다 보니 옷이 커서 단단히 여며도 쇄골과 어깨가 드러났다.

“몸은 다 가렸으니 괜찮겠지?”

의복이란 본래 피부를 가리고 체온을 유지하는 용도였으니 이만하면 괜찮을 것이다. 사비나는 옷이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고정하고, 살며시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나왔다.

‘달이 무척 밝네.’

사비나는 오솔길을 걸으며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았다. 지하에서 있었던 일은 제 실수였다. 제 다리로 기어오는 검은 뱀을 피해야 했는데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에르잔을 끌어들였다.

‘에르잔은 다정하고 성실하지만, 저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았어.’

저주도 주술도 모르는 에르잔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있으면 언제고 그를 크게 다치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사비나는 우선 집 주위를 둘러보며 위험한 것이 없는지 살피기로 했다.

‘이상하네. 저주의 농도가 옅어졌어.’

처음 도착했을 때는 땅에 스며들어 있던 저주의 기운이 신발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기운이 미약했다.

‘저주의 기운은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흩어지기도 하는 건가?’

사람이 아닌, 장소 자체가 저주에 휩싸인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비나는 의아해했다.

울타리로 감싼 텃밭을 지나자 넓은 연못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 로스카옌 사제를 만났던 광장에서도 연못이 보였다.

사비나는 달이 비친 연못을 바라보았다. 문득 달의 모습이 흔들리더니, 연못에 파문이 일었다.

“어?”

연못의 맞은편에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가느다란 팔이 휙, 흔들리더니 퐁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멩이라도 던져 넣은 걸까.

어두워서 상대편의 모습은 잘 모이지 않았다. 작은 체구에 가느다란 팔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을 뿐이다.

‘어린아이인가?’

아이는 돌멩이를 주워 던지고는, 쭈그리고 앉아 돌덩이가 일으키는 파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서 돌멩이를 던져 넣고, 다시 쭈그리고 앉아 수면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뭘 하는 거야?’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던 사비나는 무심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가 슥 일어났다.

아이는 연못의 맞은편에 있었다. 달이 밝다고는 해도 밤인 데다, 연못의 규모가 제법 커서 상대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터인데도, 사비나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아이가 갑자기 어깨를 떨더니 울기 시작했다.

“으아앙…….”

낯선 사람을 보고 놀라워하거나 무서워하는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떼를 쓰는 것도 짜증을 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구슬프게 우는 소리였다. 그 울음은 수면을 타고 사비나가 있는 곳까지 전해졌다.

“흐앙, 흐어엉…….”

아이는 훌쩍훌쩍 울면서 연못 주위를 걸었다. 몇 걸음도 걷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자신의 곁에 바짝 다가온 아이를 보고 사비나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체구가 작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뼈대도 가늘고 작은 것이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는 훌쩍훌쩍 울면서 연못을 가리켰다.

“우리 엄마가 저기 빠졌어요.”

“사람이 연못에 빠졌다고?”

사비나는 깜짝 놀라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달빛을 비추는 연못은 무척 깊고 탁해,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짙은 저주의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무서운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와서, 나와 엄마를 이 연못에 던졌어요. 나는 헤엄쳐서 연못을 빠져나왔는데, 엄마는 못 나왔어요.”

그러고 보니 아이의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아이의 옷에서 뚝뚝 떨어지는 검은 물에서는 퀴퀴하고 탁한 냄새가 났다.

죽음의 냄새다.

“우리 엄마를 구해 주세요.”

“아니, 하지만 이 연못은…….”

“엄마를 구해 주세요, 네?”

아이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사비나의 옷깃을 붙잡았다. 사비나는 본능적으로 아이의 손을 탁 쳐 냈다. 자신의 몸에 닿으면 저주에 물들까 두려워 반사적으로 거부한 것이지만, 도움을 요청했던 아이는 상대가 자신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생각했는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흐아앙. 안 돼. 엄마아…….”

아이는 또다시 작은 어깨를 떨며 훌쩍거렸다. 사비나는 당황해서 옷자락을 추스르며 허리를 숙여 연못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저주의 기운이 가득한 연못. 그 안에서 생명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연못에서는 물고기는커녕 물이끼조차도 살 수 없다.

그러니 아마도 ‘엄마가 연못에 빠졌다’는 아이의 말은 현재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지. 아이의 엄마는 이미 연못 속에서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저기, 너는 괜찮니? 이 연못은…….”

연못에 저주의 기운이 가득한데, 아이는 피해를 입지 않았을까. 사비나는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아이를 달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할 셈이었는데, 이미 아이는 그곳에 없었다.

‘어디로 갔지? 벌써 돌아갔나?’

방금까지 옆에서 울고 있었는데. 아이를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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