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 *
사비나의 몸을 휘감은 검은 뱀은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뱀에게 다리를 붙들린 탓에, 뱀이 요동치는 대로 천장과 벽에 사바나의 몸이 부딪혔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브로치가 떨어져 나가고 케이프가 벗겨졌다.
뭔가 뾰족한 것에 찔린 건지, 곳곳에 피가 배어나 루바하에 수놓인 붉은 문양이 새빨간 피로 뒤덮였다.
사비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또다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등에 아픔이 달렸다.
피부가 찢어진 건지, 싸한 느낌이 들면서 등허리 아래로 뭔가 흘러내려 질척해졌다.
검은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말려 올라간 루바하 아래로 보이는 하얀 다리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안 돼, 피가 닿으면……!’
사비나의 피에는 가장 짙은 저주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직접 만나서 피부를 맞대지 않더라도, 피를 이용하면 초상화만으로 죽일 수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사비나는 잊을 수 없다.
“조, 조심, 하세요…… 제 피에 닿으면 안 돼요!”
남자를 괴롭히던 저주의 실체는 이 검은 뱀일까. 제 피에 닿아 저주가 더 심해지지 않을까. 사비나는 걱정이 되었다.
사비나는 핏물이 고여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빛이 들지 않는 지하는 어두웠지만, 어둠에 익숙했던 그녀는 곧 제 눈앞에 드리워진 커다란 인영을 분별할 수 있었다.
“읏, 저기. 괜찮으세요?”
“죽…… 는다…….”
“움직일 수 있다면, 밖으로 나가서 도움을 청하세요. 에르잔이…… 아!”
커다란 손이 사비나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털로 뒤덮이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그것은 짐승의 손과도 같았다.
찌익, 얇은 루바하가 그대로 찢어지고 맨가슴이 드러났다.
“꺄아!”
“가만, 안 둬…….”
짐승의 손을 가진 남자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씩씩거리는 숨을 내뿜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기이한 안광을 내뿜었다. 진득한 저주가 마치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왜지? 모르는 사람인데…….’
분명 언젠가, 사비나는 저 눈빛을 본 기억이 있다.
기억을 되짚어 보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가다듬자, 사비나의 심장이라도 파낼 듯 바짝 손톱을 세웠던 남자의 팔에 힘이 빠졌다.
“읏, 으……?”
붉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던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굽히더니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커다란 혀가 날름거리며 피부를 핥기 시작했다.
“꺄악! 안 돼요!”
하얀 피부 위로 낭자한 선혈을 핥아 먹던 남자가 보드랍고 말랑해 보이는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남자는 감촉을 확인하려는 듯 주물거리며 입술을 문대다가, 입을 크게 벌려 가슴을 깨물었다.
“아윽!”
날카로운 이빨이 가슴을 찌르고, 축축한 혀가 젖꼭지를 핥으며 쪽쪽 빨아 당겼다. 사비나는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남자의 몸이 너무 크고 무거웠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제 몸에 닿으면……!”
“달아…… 조금 더…….”
짐승의 손이 사비나의 허벅지를 잡아 좌우로 벌렸다. 남자의 얼굴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자, 사비나는 기겁해서 주먹으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다.
“싫어! 떨어지란 말이야!”
돌처럼 단단한 피부였다. 타격음이 울린 순간 충격은 남자의 피부가 아니라 사비나의 손에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찢어진 피부에서 흘러내린 피가 검은 기체로 산화하며 주위로 흩어졌다. 그때였다.
“크으, 아, 아, 아아아악!”
사비나의 몸에서 흘러나온 저주의 기운이 남자의 눈과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남자는 저주를 뱉으려는 듯 괴성을 지르며 캑캑 숨을 토하다가, 그르륵, 하고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붉은 눈알에서 빛이 번뜩였다. 남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송곳니가 길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는 날카로운 이를 사비나의 가슴 아래에 박아 넣었다.
“아아악!”
날카로운 것에 꿰뚫리는 아픔만이라면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가 난 피부 속으로 뭔가 꾸물거리는 검은 것이 흘러드는 것을 느끼자 사비나는 소름이 끼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그녀의 팔다리를 붙잡고 남자가 또다시 허리에 이를 박아 넣었다. 쭙쭙거리며 피를 빨듯 저주를 빨아 낸 자리엔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시커먼 저주가 고였다.
마치 몸속에 진흙이 들어차는 것 같아, 사비나는 컥컥거렸다. 숨이 막혀 왔다.
“악, 안 돼, 안…… 꺄악!”
찌익, 찍.
사비나의 몸에 남은 천과 속옷까지 찢어 낸 남자가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엎어져서 얼굴도 마주할 수 없는데도 뒤에서 섬뜩한 붉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사비나는 고통에 익숙했고 늘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손발이 차갑게 굳어갔다.
“흐윽, 싫어……!”
“사비나 아가씨!”
쿵, 하고 발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사비나의 몸을 억누르던 남자가 휙 위로 들어 올려졌다. 에르잔은 남자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에, 에르잔…….”
알몸이 된 사비나가 덜덜 떨며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에르잔의 눈빛이 푸른 불꽃처럼 타올랐다.
“감히 아가씨께……! 용서하지 않겠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충격으로 신음하던 남자의 옆구리를 에르잔이 걷어찼다. 키엑, 하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려들려는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그대로 비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끄아악! 으아아악!”
남자의 손목이 황금빛으로 빛나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에르잔!”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황금색의 불이 붙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에르잔도 당황했으나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아직 남자를 제압하지 못했다. 그가 사비나에게 완전히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 에르잔은 남자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황금색의 불꽃은 남자의 살은 태워도 에르잔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했다. 뜨거운 느낌조차 없다.
에르잔은 남자를 붙잡아 바닥에 눕히고 일어나지 못하도록 왼손으로 어깨를, 왼쪽 무릎으로 허리를 눌렀다.
그러자 에르잔의 손과 무릎이 닿은 부위에서도 황금색의 빛이 퍼져 나오더니 남자의 몸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난다.
“에르잔, 그만! 그러다 죽어요!”
“사비나 아가씨……!”
방금 이 남자가 당신을 위협하려 했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주군을 지켜야 하는 기사의 본분과 주군의 명을 따라야 하는 기사의 본분이 충돌했다. 자신은 어느 쪽의 기사도를 따라야 옳단 말인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괴물 같은 남자의 것도 에르잔의 것도 사비나의 것도 아닌 노성에, 두 사람과 한 마리의 몸이 움찔 떨렸다. 빛이 들어오는,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계단에 로스카옌 사제가 서 있었다.
“로스카옌 신부님…….”
“물러나십시오, 에르잔 무스코바예프 경.”
“하지만 이 자는 사비나 아가씨를 위협했습니다!”
“출입 금지 구역에 들이닥친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까?”
로스카옌 사제의 지적에 에르잔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비나에게 벽화를 구경시켜 주기 위해 팻말을 무시하고 아래로 내려가려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하에서 뻗어 나온 뱀 같은 것이 먼저 사비나를 끌고 가지 않았나. 에르잔이 뛰어든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죽여서는 안 됩니다. 이 남자는 이 마을을 유지하는, 동쪽 탑의 중요한 핵…….”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로스카옌이 에르잔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가, 움찔 떨며 한 걸음 물러났다.
로스카옌 사제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검은 사제복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고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러나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에르잔은 짧게 사과하며 몸을 일으켰다. 에르잔의 몸이 멀어지자 금빛 불꽃은 사라졌지만, 남자는 아직도 닿은 부위가 타들어 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리며 신음했다.
에르잔은 척척 사비나에게 걸어가 제 외투를 벗어 걸쳐주었다. 단추를 잠가 주려 하자, 사비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 옷자락을 여미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입기엔 옷이 너무 컸던지라, 흘러내린 옷자락 사이로 가냘픈 어깨가 드러났다.
“호, 혼자서 잠글 수 있어요.”
“아, 예. 죄송합니다.”
머쓱해진 에르잔은 목덜미를 쓸며 물러났다. 로스카옌 사제가 빨리 가라는 듯 눈짓하자, 에르잔은 그에게 가볍게 묵례한 후 사비나를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사비나 아가씨. 맨발로 흙길을 돌아다니시면 발에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 신발을 드릴 테니 이거라도 신고 계십시오.”
“그러면 에르잔이 맨발이잖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에르잔의 신발은 너무 커서 제 발에는 맞지 않을 거예요.”
듣고 보니 그랬다. 신발 끈을 풀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던 에르잔이 동작을 멈추고 사비나를 올려다보았다.
늘 그녀가 눌러쓰고 있던 후드가 사라진 덕분에, 사비나의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돌리며 뒷걸음질 치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사비나 아가씨. 거처에 도착할 때까지만, 참으실 수 있겠습니까?”
사비나는 에르잔의 질문을 「맨발로 걷는 것이 괜찮은가」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에르잔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 에르잔?”
“신속하게 모시겠습니다. 도착할 때까지 잠시 동안, 아가씨께 닿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아무래도 에르잔은 사비나를 안고 거처까지 뛰어갈 생각인 듯했다. 사비나는 손을 내저으려 했으나 외투가 흘러내리는 바람에 황급히 다시 옷깃을 부여잡았다. 그 틈에 에르잔은 재빨리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꺄, 에르잔!”
“잠시만 참으십시오. 금방 도착할 겁니다!”
옷자락이 흘러내려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에르잔은 사비나를 제 품으로 꼭 끌어당긴 뒤, 거처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사비나는 뭔가 말하려다가 혀를 깨물 것 같아 입을 꼭 다물고 에르잔에게 얌전히 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