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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8화 (8/189)

8화

* * *

두 사람은 통나무집을 나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이 눈부셨다.

음험한 기운이 올라오는 질퍽거리는 흙바닥과는 정반대로, 밝은 햇살이 스며든 자리는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저주의 주술을 정화하는 성스러운 빛처럼 느껴져서, 사비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햇살이 내리비치는 장소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창백한 손등 위에 햇살이 동그란 자국을 만들어 냈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정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손등에 닿는 햇빛의 느낌을, 사비나는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에르잔의 손을 잡았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어.’

사비나는 슬며시 옆으로 눈을 굴렸다. 앞서가는 에르잔의 등이 보였다. 오늘은 에르잔도 가벼운 차림으로, 루바하 위에 붉은 외투(Zipun)14)를 걸치고 있었다.

검은 나무와 회색의 바위, 거뭇하고 질퍽한 진흙길뿐인 무채색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붉은색. 그리고 금빛 머리카락.

이 어둡고 음습한 마을에서 에르잔만이 유독 빛나 보인다. 햇빛이 흘러 떨어지는 듯한 굵은 금발에, 곧게 편 등, 우아한 붉은 외투의 소매 끝으로 보이는 마디가 굵고 다부진 커다란 손.

사비나는 문득 에르잔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행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에르잔에게 닿아서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아버지 외의 남자와 이렇게 오래 있어 본 적이 처음이라 어색해서 딴생각이 드는 것이리라. 애꿎은 케이프 끝자락만 구겨 잡으며 사비나는 에르잔의 뒤를 따라갔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통나무 가옥을 몇 개 지나자, 뾰족한 지붕이 있는 첨탑이 나타났다.

“저건 교회인가요?”

“아닙니다, 로스카옌 신부님이 계시는 교회는 이 반대편이거든요.”

확실히 교회라고 보기엔 첨탑만 뚝 떼어 놓은 모양새가 이상했다. 빛바랜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안쪽의 풍경을 살피려고 사비나가 기웃거리는 것을 본 에르잔은 피식 웃으며 첨탑의 문을 열었다.

“안쪽을 구경하시겠습니까?”

안쪽은 텅 비어 있었지만, 벽면과 천장에 그려진 벽화는 무척이나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보수를 하지 않은 탓에 군데군데 낡아 떨어진 것이 아까울 정도로.

벽에 가까이 다가간 사비나는 후드 끝을 들어 올린 채로 벽화를 구경했다.

에르잔은 열심히 벽화를 구경하는 사비나의 모습을 보고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벽화 구경에 열중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에르잔이 다가가면 기겁하고, 차려 준 음식은 거의 먹지도 않고, 무엇을 해도 「아니요」라는 대답부터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뭔가에 흥미를 보였다. 그 사실이 기뻤다.

‘벽화에 대해서 공부해 뒀더라면 아가씨께 설명도 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에르잔은 자신이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한탄했다.

‘섬기는 분의 취향을 파악해 두지 않다니, 호위로서 실격이야.’

보통 호위는 호위만 하지 주인의 취향까지 파악할 필요는 없었으나 에르잔의 생각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사비나 아가씨, 벽화가 이 아래쪽까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내려갈 수 있는 건가요?”

“계단이 나 있군요. 튼튼해 보이긴 하는데, 혹시 모르니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십시오.”

지하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서 에르잔이 사비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나무계단을 밟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는 했으나 썩은 부분은 없는 모양이었다.

사비나는 벽을 짚고 천천히 내려가며 벽면에 그려진 벽화를 보았다. 작은 새들이 줄을 지어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의 끝에는, 커다란 뱀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이런.”

벽화에 그려진 뱀의 섬뜩한 눈빛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동시에 들려온 에르잔의 곤란한 목소리에 사비나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밑을 보았다.

계단의 끝에 다다른 에르잔의 앞에 붉은 밧줄이 처져 있었다. 좌우 벽에 고정된 붉은 밧줄의 가운데는 「출입 금지」라고 써진 팻말이 걸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밧줄을 제거하겠습니다.”

“네? 출입 금지잖아요. 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에르잔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밧줄을 끊으려 하자 사비나는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벽화를 구경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괘, 괜찮아요. 그렇게 해서까지 보고 싶은 건 아니니까…….”

계단을 쭉 내려오며 보았던 벽화의 끝이 섬뜩했던 탓에, 사비나는 아래를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무리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 할지라도 막아 놓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출입 금지 팻말이 걸려 있지 않은가. 대저 누군가의 주의를 무시해서 일이 잘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사비나는 약간이라도 불안한 느낌이 든다면 물러나는 것이 제 몸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부주의하게 그녀의 몸을 만지려던 남자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했기에 더욱 그랬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에르잔.”

“으음, 알겠습니다. 가시죠,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이 몸을 돌려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으으윽…….”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르잔? 방금…….”

“사비나 아가씨, 물러서십시오.”

온화하던 에르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고,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몸을 돌려 벽에 딱 붙어선 에르잔은 허리춤의 장검에 손을 짚었다.

“끄으윽…….”

남자의 신음이었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 그 계단의 끝에 처진 붉은 밧줄과 출입 금지 팻말. 남자의 음성은 그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에, 에르잔? 저 안에 누가 있나 봐요!”

“사비나 아가씨, 위험합니다.”

계단을 내려오려는 사비나를 에르잔이 강하게 만류했다. 그녀에게 벽화 구경을 시켜 주기 위해 출입 금지 팻말을 무시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 너머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혹시 모를 위험에 사비나를 노출시킬 수는 없다. 에르잔은 검의 손잡이를 그러쥔 채로 밧줄 너머의 어둠을 향해 물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크아아악!”

처음에는 앓는 듯이 씩씩거리던 남자의 신음이 차츰 커지더니, 이내 비통한 절규로 변했다.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벽화가 흔들렸다. 아마도 벽화가 진짜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검은 그림자가 햇빛을 가리는 바람에 빛의 각도가 바뀌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겠지. 그러나 고통을 호소하는 처절한 비명은 정말이었다. 사비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에르잔, 혹시 아래에 누군가 갇혀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곳에 갇혀 있다면 위험인물일 겁니다.”

“하지만 괴로워하고 있어요. 어쩌면 출입 금지 구역에 접근했다가 다치는 바람에 구조 요청을 하지 못한 것일 수도…….”

“끄아악! 아악!”

사비나의 말을 자르며 남자의 비명이 이어졌다. 사비나는 두 손을 꼭 쥐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나, 에르잔은 여전히 냉정한 눈빛으로 어둠 속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하에서 저주의 기운이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사비나에게 익숙한 죽음의 저주였다. 남자는 죽어 가고 있었다.

“에르잔…….”

이제까지 숱하게 많은 사람이 그녀 때문에 죽었다. 남을 죽이기보다 차라리 자신이 죽기를 소망했던 사비나는 누군가가 다치고 상처 입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녀를 겁간하려는 남자들이 구역질이 날 만큼 싫은데도, 그들이 죽어갈 때는 슬퍼서 눈물이 나왔다.

죽음은 자연이 거두어 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누군가 죽는 것은 싫어.’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구할 수 있는데도 구하지 않고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싫다. 고통에, 아픔에 무감한 것은 싫다. 사람이 죽는 일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비록 그 자신이 누군가를 저주하는 일밖에 하지 못하는, 죽음의 화신이라 할지라도.

“에르잔, 저러다가 죽을 거예요. 구해야 해요.”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 위험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위험할 일은 없다. 사비나는 죽지 않는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곧 나아 버린다. 그러니 위험 속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위험해진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다 죽는다면 그거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일이니까.

‘하지만 에르잔은 내가 위험해지도록 두지 않겠지.’

사비나는 기사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으나, 그가 그녀의 호위로서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만약 사비나가 지하를 살피겠다고 주장한다면 분명 자신이 대신 내려가 보겠다고 답할 것이다. 에르잔을 위험에 처하게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 저주를 약간만 걸어서…… 에르잔을 기절시킬 수 없을까?’

그를 기절시키고 지하로 내려가 신음하는 남자를 구해올 수 없을까. 에르잔이 들었다면 펄쩍 뛸 생각을 진지하게 하면서, 사비나는 검은 눈동자를 굴렸다.

툭. 무언가가 발끝에 와 닿았다. 내려다보니 새카만 저주가 그녀의 발치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밧줄 같기도 했고, 뱀 같기도 했다.

‘벽화에 그려진, 날아드는 새들을 삼키는 뱀과 닮았어.’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검은 뱀은 진짜가 되어 사비나의 발목을 휘감았다.

“꺄악!”

“아가씨!”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비나의 발목을 휘감은 저주의 뱀이 몸을 키우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녀의 몸을 끌고 내려갔다. 에르잔이 붙잡을 새도 없이, 사비나의 몸은 어둠에 삼켜져 버렸다.

“사비나 아가씨!”

눈앞에서 주인이 납치되는 광경을 본 에르잔은 눈이 뒤집혀서 그대로 지하로 뛰어들었다. 검을 뽑아 밧줄을 잘라 낼 생각도 하지 못했던 탓에, 붉은 밧줄은 에르잔의 몸에 밀려 엉망으로 끊어져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출입 금지 팻말은 에르잔이 발로 밟고 지나간 부분만 글자가 지워져 깨끗했다.

글자가 지워진 자리에, 엷은 금색의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참고

14) 지푼(Зипун). 15~17세기 러시아에 보급되었던 남성복으로, 루바하 위에 입는 겉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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