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괜찮다니까요! 그만 말해요!”
역시 알몸을 봤구나. 사비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울거나 비명을 지른다면 에르잔이 얼마나 놀라 할까. 일만 더욱 커질 뿐이다.
그녀에게 간밤의 사고는 잊고 싶은 일이고 덮어 두고 싶은 일이었으며 다시 떠올리는 것마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정말로 괜찮으니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명령에 확답까지 받고 나서야 사비나는 진정했고, 에르잔은 간신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사비나 아가씨는 역시 다정하시구나. 내가 그런 무례를 범했는데도 벌은커녕 화조차 내지 않으시다니. 어쩜 이런 분이 있을까…….’
에르잔의 안에 또다시 오해가 쌓여 갔다. 마음이라는 호수 위에 팔랑팔랑 하얀 깃털이 떨어졌다. 그녀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과 감동이 가슴속에서 뒤섞여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몸이 약해 콘바야젠 저택 밖으로 거의 나간 일이 없다는 사비나. 에르잔이 가까이만 다가가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타인을 두려워하는 사비나. 간밤에는 악몽에 시달릴 만큼 아팠음에도, 사비나는 불편한 것이 없고 괜찮다고 말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제까지, 줄곧.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타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상냥한 마음, 그리고 에르잔처럼 지위도 명예도 없는 일개 기사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고고한 신념 때문이 아닐까. 분명 그럴 것이다.
‘사비나 아가씨는 다정한 것 이상으로 강인한 분이로구나.’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할 만큼 에르잔은 입이 가볍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그의 뇌내망상을 정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비나 아가씨. 주제넘은 요청이지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혹 제 안의 격정을 내비치면 반성하지 않는다고 여길까 봐, 에르잔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정중히 물었다.
“질문이요? 뭔데요?”
“콘바야젠 백작께서 사비나 아가씨를 보필하라 말씀하셨는데, 제가 아가씨의 병에 대해 무지하여 의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어떤 병인지, 제가 해야 하는 일을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병이요?”
사비나는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아버지가 그에게 몸이 약한 그녀를 보필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을 떠올리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에르잔은 나를 환자라고 오해하고 있었지.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꼭 오해를 풀어야 할까?
음식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늘 후드를 뒤집어쓴 채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제 모습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사비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병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두는 것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둘러대면 좋을까. 저주의 반동으로 몸이 아플 때는 있어도 사실 사비나는 병약한 것이 아니었다. 병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다.
“으음, 그러니까. 제 병은…… 좀 희귀한 병인데요…….”
“예.”
“다른 사람과 몸이 닿으면 안 되는 병이에요.”
“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와 몸이 닿으면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에 걸리니까. 물론 그 병에 걸리는 것은 사비나가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다른 사람과 몸이 닿으면 안 된다는 건…… 일종의 알레르기 같은 건가?’
에르잔은 이곳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 사비나가 최대한 그와 떨어져 앉으려고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에르잔은 희귀병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사비나의 말을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믿었다. 제멋대로의 해석을 덧붙인 것이 문제였으나,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기에 사비나는 몰랐으므로 또한 문제는 없었다.
“그렇군요. 혹시 그 ‘다른’에는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포함이 되는지요?”
“동물이요?”
사비나는 동물을 가까이했던 적이 없다. 그녀의 몸에 감도는 저주의 기운이 동물에도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의 저주는 칼날이나 독극물 같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술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사비나가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잔은 의문이 풀렸다는 듯이 눈가를 누그러뜨렸다.
“그래서 간밤에 이불을 밀쳐 내신 거였군요. 이해했습니다.”
“네? 아니, 그건!”
간밤의 일을 떠올리자 사비나의 얼굴이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 벌거벗고 잠든 것을 들킨 것도 부끄러운데, 기껏 덮어 준 이불까지 걷어차 버렸단 말인가. 그 꼴을 에르잔에게 보였다고 생각하니 사비나는 정말 죽고 싶어졌다.
“혹시 지금 입고 계시는 옷도 불편하시지는 않으십니까?”
“불편하긴 한데…… 아, 아니! 괜찮아요! 아주 정말로 완전히 괜찮아요!”
사비나는 뻣뻣하게 경직된 팔을 허우적거리며 극렬히 부정했다. 옷을 입는 것이 어색하긴 했으나, 에르잔 앞에서 알몸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의 몸에 발정하여 덮치려 드는 여느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도 그랬다. 이것은 기분의 문제다. 노출증 환자로 여겨지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에르잔이 호위로 있는 동안은, 절대로 옷을 벗지 않을 거야!’
사비나는 굳게 다짐했다. 그것이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아직 몰랐지만.
“그럼 사비나 아가씨, 아침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네? 아, 음…… 네.”
“예, 아가씨. 그럼 요리를 가져오겠습니다.”
사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어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모습을 에르잔에게 보여 버렸다. 평범한 사람은 세 끼 식사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러지 못했으니, 에르잔에게 의심을 사는 것도 당연했다. 그가 사비나의 정체를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뭘 가져오든 다 먹을 거야.’
그리고 그녀의 결심은 정확히 30초 만에 무너졌다.
“에르잔…… 이, 이게 다 뭐예요?”
“사비나 아가씨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몰라 재료가 있는 것은 다 만들어 봤습니다.”
탁자 다리가 부러질 만큼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 사비나는 할 말을 잃었다.
빨간 순무가 든 수프10)에, 양고기 꼬치, 얇고 둥글게 부친 크레페,11) 밀가루 반죽을 귀 모양으로 빚은 만두12)…… 이걸 다 어디서 구해 왔으며, 언제 만든 것일까.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탁자 위의 요리와 에르잔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사비나는 홀쭉해진 아랫배를 쓸어 보았다. 저걸 다 먹는 건 무리다.
‘설마 평범한 여자들은 저 많은 음식을 다 먹는단 말이야?’
물론 그럴 리가 없었으나 사비나는 ‘평범한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난처했다. 이러다가 또 수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저기, 에르잔. 함께 식사하지 않겠어요?”
“주군과 겸상을 하는 기사는 없습니다.”
“저, 하지만…… 제가 아침은 많이 먹지 못하거든요. 음식을 남기는 것도 아까우니까…….”
“그럼 아가씨께서 남기신 것을 먹겠습니다.”
“네? 그건 안 돼요!”
먹다 남긴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은 에르잔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어차피 저것을 혼자서 다 먹는 것은 무리이기도 하고, 처음 보는 요리가 많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일일이 에르잔에게 물으면 수상하다며 더욱 의심을 살 것이 뻔했다.
사비나에게는 식사 예절을 참고할 대상이 필요했다.
“같이 먹어요, 에르잔.”
“……겸상을 하라는 명령입니까?”
명령이 아니면 듣지 않겠다는 걸까. 이런 일로 일일이 호위기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우습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에르잔도 고집을 꺾지 않을 것 같았다. 사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이에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맞은편에 앉더니 식사를 시작했다. 사비나는 에르잔이 먹는 모양새를 보며 적당히 흉내 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10초 만에 무너졌다.
“…….”
양념꼬치13)의 고기를 하나씩 빼서 반으로 잘라먹던 사비나는 에르잔이 포크를 꼬치 끝에 끼우고 고기와 야채를 한 번에 빼서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보통 사람들은 다 저렇게 음식을 빨리 먹는 거야?’
기사들의 먹성이 좋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사비나는 에르잔이 음식을 흡입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당황했다. 최대한 그의 먹는 모습을 따라 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일단 입 크기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제대로 씹지 않으면 삼킬 수가 없어, 속도도 현저히 느렸다.
에르잔이 테이블 위의 모든 음식을 먹어 치운 다음에야 사비나는 안도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저 식사를 했을 뿐인데 기운이 쭉 빠졌다.
‘어릴 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른의 식사란 엄청나게 힘든 일이구나.’
참고 대상이 에르잔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이 힘든 일을 하루에 세 번씩 하며 살아가고 있어.’
평범한 사람들은 이토록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생명력과 의지에 존경심마저 들어, 사비나는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에르잔은 빈 그릇을 날라 세척하고 테이블 주위를 정리한 뒤, 창문을 떼어 환기를 시켰다. 창틀이 썩어 모양이 바뀌는 바람에 열 수가 없어 떼어 냈다가 다시 끼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에르잔은 불평하지 않았다.
청소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찬바람이 사비나에게 바로 가지 않도록 창문과 문을 비스듬하게. 낡은 오두막임에도 에르잔이 청소한 곳은 새것처럼 반질반질했고 곰팡이는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확인한 에르잔이 사비나에게 물었다.
“아가씨. 산책을 나가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산책이요?”
“예.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요.”
여전히 공기는 텁텁하고 흙에서는 저주의 기운이 올라오니 완전히 날이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제보다는 날이 밝았다.
사비나는 산책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저주의 화신인 그녀를 스쳐 가기라도 하면 저주에 씔 테니까.
하지만 계속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호위기사니, 그녀가 외출하지 않는다면 곁을 지키려 할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다고 해도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면 저주가 고인다. 단둘이 있으면 언제고 에르잔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았어요. 산책을 나가죠.”
“예. 모시겠습니다.”
사비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자, 가볍게 미소 지은 에르잔이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참고
10) 보르쉬(Борщ). 육수에 빨간 순무와 고기, 토마토, 양파, 감자, 당근 등을 넣고 끓인 우크라이나식 수프로, 새빨간 색이 특징.
11) 블리니(Блины). 얇게 부친 러시아식 핫케이크. 크레페처럼 말아 안에 고기와 야채를 넣어먹기도 하고, 러시아식 사워크림인 스메타나(Сметана)나 잼을 발라먹기도 한다.
12) 펠르메니(Пельмени). 러시아식 만두. 사람의 귀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
13) 샤슐리크(Шашлык). 양고기나 돼지고기, 쇠고기 등에 양념을 한 후 야채와 함께 끼워 불에 굽는 러시아의 전통 꼬치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