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 *
“하하. 완전히 유령산인 줄 알았는데, 사냥감을 이렇게 쉽게 발견할 줄은 몰랐는걸.”
밤 사냥을 다녀온 에르잔은 전리품인 검은 털의 산양을 축사에 휙 던져 넣었다. 내일 아침에는 사비나에게 양고기 수프를 만들어 줄 것이다. 벗긴 가죽으로는 외투를 만들어 줄까. 아니, 털모자가 좋을지도 모른다.
‘늘 후드를 쓰고 계시던데, 정수리가 추워서 그런 걸지도 몰라.’
바느질에는 별로 자신이 없지만, 훈련소에 있을 때 교관들에게 꼼꼼하다는 칭찬을 받았으니 막상 만들면 잘 할지도 모른다.
에르잔은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으나, 여성의 신체나 몸 상태에 관련해 질문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단지 거기서 그쳤다면 좋으련만, 상대의 예민한 반응을 보고 멋대로 넘겨짚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사비나의 검은 머리에 어울리는 검은 털모자의 모양을 상상하며 에르잔은 헛간으로 돌아왔다. 잡동사니를 전부 치워 낸 헛간은 넓고 썰렁했다.
‘사비나 아가씨는 주무시고 계시겠지?’
깨어 있다면 뭔가 소리가 날 것이다. 설마 자신을 찾지는 않았겠지.
주인의 침실 문을 함부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기사도에 충실히 따라, 에르잔은 헛간과 방 사이에 있는 나무문에 귀를 대고 안쪽의 소리에 집중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니, 푹 주무시는…….”
“……흐윽!”
문 너머에서 들린 신음에 느슨해졌던 에르잔의 표정이 단번에 딱딱해졌다.
‘잘못 들은 거겠지?’
에르잔은 신중하게 문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헉, 흐으, 아아……!”
분명히 괴로워하는 음성이었다. 에르잔은 문득 콘바야젠 백작의 당부가 떠올랐다. 분명 몸이 약하다고 들었다. 어떤 병인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 병은 발작을 일으키는 종류일지도 모른다.
‘큰일이다!’
마음이 급해진 에르잔은 노크를 하는 것조차 잊고 문을 열어젖혔다.
“사비나 아가씨! 무슨…… 허억!”
사비나를 부르며 벽에 붙은 침대로 달려가던 에르잔은 그대로 나자빠졌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모르고!”
침대 위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사비나를 보고 에르잔은 황급히 눈을 가렸다.
대체 왜 사비나가 알몸으로 누워 있는 건가. 설마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엄한 놈이 들어와 못된 짓을 하지는 않았나.
에르잔은 도끼눈을 뜨고 문가를 바라보았다. 밖으로 통하는 문에는 열린 흔적이 없었고,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따스했다.
“하, 으…….”
“사비나 아가씨, 괜찮으십…… 으헉!”
또 알몸을 봐 버렸다. 에르잔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지만 아무튼 자신이 지금 엄청난 결례를 범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놀라움과 당혹감에 정신이 혼미해서 에르잔은 제가 눈을 감거나, 사비나에게 몸을 가릴 것을 덮어 주면 된다는 생각조차 미처 하지 못했다.
무릎을 꿇은 채 어떻게 해야 하나 전전긍긍하던 에르잔의 귀에 다시금 사비나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흐, 하아!”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에르잔은 콘바야젠 백작으로부터 사비나의 병명을 듣지 못했다. 무슨 약을 써야 하는지, 어떤 병증이 있으며 어떤 대처를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너무 안이했어.’
에르잔은 가벼운 몸살 한 번 앓아 본 적 없는 완벽한 건강 체질이었다. 그러니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훈련소에서 응급 처치를 하고 부상병을 운반하는 방법은 배웠지만, 사비나는 어딘가를 다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 마을에 의사가 있을까? 아니면 로스카옌 사제에게 데려가야 하나.’
무례하다는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에르잔은 최대한 그녀의 몸 쪽으로는 눈길이 가지 않도록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사비나의 어깨를 안아 일으켰다. 열은 없는데, 몸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어디가 아픈 걸까.
“으응, 읏…….”
사비나가 신음하며 에르잔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품 안에서 움직이는 여체의 감촉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체구가 작고 가녀린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토록 부드럽고 따스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옷자락 너머로 말랑한 무언가가 밀착하여 뭉그러지듯 달라붙었다. 심장의 고동이 뒤섞인다.
“아, 아가씨.”
“싫……어…….”
“사비나 아가씨?”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는 것을 들은 에르잔은 사비나를 고쳐 안고 안색을 살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그는 떨리는 손으로 사비나의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에 닿는 촉촉한 것은 눈물일까.
“싫어…… 죽이지 마세요…….”
손끝에 닿는 숨결이 가늘게 떨렸다. 에르잔의 손도 함께 떨렸다.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초조한 기분이 드는 것은 분명, 제 주군이 병으로 괴로워하기 때문이리라.
“사비나 아가씨.”
“제발…… 죽으면 안 돼요…….”
애원하는 목소리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 같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에르잔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어둠 속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을 만큼 얼굴을 찡그린 채 괴로워하는 사비나의 어깨를 안고, 에르잔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죽지 않습니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죽지 않습니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사비나 아가씨.”
“허윽, 흐…….”
효과가 있었는지, 몸의 떨림이 차츰 가라앉더니 호흡이 안정되었다. 씩씩거리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에르잔은 사비나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히 침대에 도로 눕혀 주며, 얼굴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 정리해 주었다.
“사비나 아가씨.”
“응…….”
어쩌면 단순히 악몽을 꾸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콘바야젠 같은 대귀족 가문의 저택을 떠나 이런 산골 마을에 왔으니,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잠자리가 불편했던 걸지도 모르고.
“저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후우…….”
“살아서, 언제까지고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에르잔은 황궁 근위대의 기사였다. 배속은 정해지지 않았어도 그는 황실에 몸을 바쳐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가 기사로서 섬기게 된 첫 주군은 사비나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진정한 주인은 사실 사비나가 아닐까.
‘황실도, 근위대 일도, 지금은 다 잊어버리자.’
기사는 오직 주군에게 충성을 바친다. 그 외에는 무엇도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병이든, 꿈이든, 환각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당신을 괴롭게 하는 모든 것을 이 에르잔이 베어 없애 버리겠습니다.”
눈앞의 주군을 지키기로 맹세한 에르잔은 사비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 * *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방 안을 비췄다. 불빛이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구석에 켜 둔 양초는 어느새 짧아져 있었다.
에르잔은 헛간으로 돌아가지 않고, 날이 밝을 때까지 사비나의 곁에서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혹 또다시 그녀가 악몽을 꾸며 괴로워할까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다.
“으응…….”
양모 이불의 감촉이 거슬리는지 사비나가 비척거렸다. 그 바람에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내려가 늘씬한 맨다리가 다 드러났다.
로스카옌 사제가 주고 간 양모 이불로 몸을 덮어 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사비나는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몇 번이나 이불을 밀어냈다.
그때마다 에르잔은 최대한 사비나의 맨살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녀의 몸에 다시 이불을 잘 덮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옷을 입혀 주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사비나의 몸을 만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이불을 덮는 정도라면 몰라도, 옷을 입힐 정도로 몸을 움직이면 그녀가 잠에서 깨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버릇이 안 좋으시군. 여자 시종을 데려왔어야 했는데.’
어릴 때라면 모를까, 어른이 된 후에는 훈련소의 동기 간에도 서로 알몸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기사도 아닌 귀족, 그것도 여성의 몸을 보는 것은 엄청난 결례에 속했다.
지금 이렇게 그녀의 침실에 들어앉아 돌보는 것이 남자인 자신이라는 사실에 에르잔은 못내 미안했다.
‘그런데 사비나 아가씨는 왜 옷을 벗고 주무시는 거지?’
훈련소 시절, 잘 때는 속옷까지 벗고 알몸이 되지 않으면 잠들 수 없다는 이상한 교관이 하나 있었는데. 설마 사비나도 그런 타입인 걸까.
‘사람마다 잠버릇은 다르다고 하니까.’
터무니없는 오해였으나 정정해 주는 이가 없었던 까닭에, 에르잔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납득하려 했다.
에르잔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그가 여자에 대해 무지한 것은 실로 다행이었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드러난 맨살을 볼 때마다 흠칫거리면서도, 제 안에서 살금살금 기어 나오는 이상야릇한 감각의 정체를 깨닫지 못했다.
성욕이 무엇인지 몰랐던 에르잔은 그저 여자 주군을 모신 것이 처음이라 낯설어서 몸이 긴장한 거라고만 생각했다.
‘앞으로 아가씨의 알몸을 보는 일이 없도록 눈가리개라도 마련해야겠어.’
사비나의 모자를 만들고 남은 산양 가죽으로 눈가리개를 만들까. 더울 것 같은데. 역시 로스카옌 사제에게 부탁해서 긴 천이라도 하나 얻어 와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에르잔은 턱을 괴고 앉아 눈을 감았다.
* * *
사비나의 잠을 깨운 것은 창문 너머로 밝아 오는 아침 햇살이었다.
“으응…… 어라?”
사비나는 시야를 밝히는 빛이 낯설다는 듯 눈가를 몇 번 비빈 후에야 눈을 떴다. 햇빛을 가리는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도 빛이 내리비칠 만큼 밝은 햇살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가슴께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양모 이불이었다.
‘내가 이불을 덮고 잤던가?’
사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선반에는 자기 전에 벗어 놓은 옷이 그대로 있었다. 시선이 선반 위에서 다시 양모 이불로, 그리고 침대 아래에 있는 다 쓴 양초 접시에 머물렀다.
‘설마 에르잔이?’
자신이 자는 방 안에 들어왔었단 말인가. 갑자기 밖에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사비나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에, 에르잔? 잠깐만요! 열지 마세요!”
홀딱 벗고 잠든 주제에 알몸을 보이기 부끄럽다는 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비나는 정말로 부끄러웠다. 에르잔에게 알몸을 보이고, 그가 제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고 생각하니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았다.
‘바보같이, 내가 왜 옷을 벗고 잔 거야?’
어젯밤의 자신을 원망해 봐야 이미 늦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비나의 뺨은 불붙은 듯 뜨거웠다.
사비나가 루바하를 걸쳐 입고 케이프를 두른 다음 후드까지 뒤집어쓴 후에야 입실 허락이 떨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에르잔은 살짝 눈을 내리깐 채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에르잔?”
“간밤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어떤 처벌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 아니에요. 처벌이라니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비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묻는 것도 무서웠다.
사비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에르잔의 모습을 살폈다. 살이 썩거나 문드러진 곳은 보이지 않았다.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르잔이 자고 있던 그녀를 덮친 것이 아니었음은 명백했다.
정말로 이불을 덮어 주기만 했던 걸까. 벌거벗고 자는 자신을 발견한 에르잔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정색하며 양모 이불을 덮어 주는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가, 너무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불을 덮어 주었을 뿐이잖아요? 괜찮아요.”
“제가 불민하여 아가씨께서 옷을 벗고 주무시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만 실례를…….”
“괜찮다니까요! 그만 말해요!”
역시 알몸을 봤구나. 사비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