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5화 (5/189)

5화

“이, 이제 됐어요. 그만 먹을게요…….”

“예? 아직 한 입밖에 드시지 않았습니다만.”

바구니에 담긴 바트루쉬카의 맛이 어떨지 궁금했지만, 너무 오랜만의 음식이라 먹다가 혹시라도 에르잔 앞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사비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더는 생각이 없다며 스푼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괜찮아. 배고픔은 익숙한걸.’

오히려 몇 년 동안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던 위장에 갑자기 음식을 들이부으면 그것도 독이 될 터였다.

몸이 아픈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고 에르잔이 부축하겠다며 몸을 밀착하기라도 하면 문제가 커진다. 가벼운 저주의 기운은 에르잔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지만, 그가 얼마만큼의 저주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에르잔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사비나는 가능한 한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침대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사비나 아가씨는 몸도 약하신데.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저렇게 침대에만…….’

사비나가 식사를 거르는 이유를 오해한 에르잔의 코끝이 또다시 시큰해졌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모습에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만난 지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은 사비나의 가련한 모습을 마주한 에르잔의 가슴속이 아련한 감정으로 촉촉하게 젖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사비나는 에르잔의 첫 경호 대상이었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은 아닐지라도,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여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내가 이분을 지켜야 해!’

검 한 자루를 쥐고, 기사도를 외치며 살아왔던 젊은 기사의 푸른 눈이 사명감으로 번뜩였다.

부모 없이 자라 기사단에서 다년간 굴러온 에르잔은 검술은 물론이고 청소와 가사 전반에도 능숙했다. 시종도 하녀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호위기사로 따라온 것이 자신이라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황폐한 마을에서 그녀의 몸과 마음이 병들지 않도록 보호하고, 반드시 건강하게 웃도록 만들 것이다.

결심을 다진 에르잔은 아직 따끈한 김이 나는 수프 그릇과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일어났다.

“흡족한 식사를 만들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일은 고기를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네? 아뇨. 필요 없는데…….”

사비나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으나,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을 들은 에르잔의 머리는 그녀의 말뜻을 「서민의 음식은 필요 없다」라고 해석했다.

“오늘 준비한 요리가 입에 맞지 않으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맛있게 드실 요리를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쉬십시오, 사비나 아가씨.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에르잔? 어딜 가는 거예요?”

“호위기사가 주군의 침소에 들 수는 없는 법. 저는 헛간에서 밤새 경호를 서겠습니다.”

“네에?”

주저 없이 뒤돌아 문을 나서려는 에르잔의 뒷모습을 보고 사비나는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 에르잔? 헛간에서 자면 불편하잖아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에르잔이 이 침대를 써요. 내가 헛간에서…….”

“아가씨를 편히 모시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기사가 주군보다 편한 잠자리를 얻는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죠.”

“그래요? 그래도…….”

사비나의 검은 눈동자가 또르르 옆으로 굴러갔다. 돌바닥에서 잠드는 데 익숙했던 사비나는 헛간에서도 잘 수 있지만, 에르잔이 그녀의 호위기사인 이상 그를 방에서 재우고 자신이 헛간에서 자는 것을 납득하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이 방에서 함께 자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저주의 기운이 언제 에르잔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지 모르니까.

‘폐쇄된 공간에는 저주가 들어차는걸. 이 방에 함께 있는 일은 피해야 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으니 남은 방법은 그녀가 방에 머물고 에르잔을 헛간으로 보내는 것뿐이다.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밤은 새우지 않아도 되니까…… 에르잔도 편히 쉬세요.”

“……사비나 아가씨는 다정한 분이로군요.”

“네?”

“아가씨께서 편하시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에르잔은 방을 나갔다.

삐걱거리는 나무문이 닫혔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사비나의 귓가에 에르잔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사비나 아가씨는 다정한 분이로군요.」

다정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저주의 화신인 그녀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목숨을 빼앗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사비나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그녀를 피하고 꺼렸다.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이들조차도 입에 담는 것은 폭언과 매도의 말뿐이었다.

그런데 다정하다니, 아무래도 에르잔은 그녀에 대해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비나가 콘바야젠 백작의 딸이라는 것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아는 것은 가문에서도 지극히 일부였다. 그러니 사비나가 콘바야젠 가문의 주술사라는 것도 에르잔은 모를 것이다.

‘에르잔은 나를 정말로 평범한, 몸이 약한 환자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오해를 풀 방법이 없었다. ‘나는 사실 환자가 아니라 저주의 화신이며 아비의 정적들을 죽여 왔으니 내게 신경 쓰지 말고 피해 있으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좋지? 에르잔이 나를 평범한 여자로 오해하는데, 대체 어떻게 오해를 풀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져, 사비나는 손바닥으로 양 뺨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단정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 눈부신 태양 아래서 땀을 흘리며 뛰는 것이 어울리는 젊은 청년에게 평범한 여자 취급을 받는다니, 어째서인지 얼굴이 뜨거웠다.

한참을 번민하다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살핀 사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진다고 했던가. 어느새 밖이 깜깜해졌다.

마차를 타고 오래 달린 탓인지 몸 구석구석이 아팠다. 고통에는 익숙하다지만, 옷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치적거리네. 잘 때는 옷을 벗고 싶은데.’

돌방에서 늘 알몸으로 잠들었던 사비나에게는 질 좋은 천도 화려한 장신구도 낯설 뿐이었다. 가슴과 음부를 감싸는 속옷마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에르잔은 헛간에 있겠다고 했으니, 벗어도 괜찮겠지?’

잠금장치 하나 없는 나무문을 사이에 두고 젊은 남녀가 잠든다는 건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성장 환경을 거치지 못했던 사비나는 조신한 귀족 아가씨의 몸가짐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에르잔과의 접촉을 피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에게 저주의 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였지, 남녀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성적인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어둠에 익숙한 사비나는 초를 켜지 않은 채로 옷을 벗었다. 케이프와 루바하를 벗어 곱게 접은 다음, 속옷까지 벗어 선반에 올려놓았다.

‘몸에 닿는 게 없으니 홀가분하네.’

창을 가릴 커튼은 없지만 이 마을에는 아무래도 주민이 극히 적은 듯했다. 불도 켜지 않았으니 누군가 지나가다 우연히 그녀의 알몸을 볼 일도 없을 것이다.

사비나는 짚 침대에 올라가 옆으로 누웠다. 마른 짚을 깔아 놓은 침대는 푹신했다. 외관이 낡은 것과는 달리 의외로 잘 관리가 된 것인지, 아니면 에르잔이 만지면 나쁜 성분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건지 베개에서는 햇볕 냄새가 났다.

차가운 돌바닥이 아닌 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한편, 이 포근한 감촉이 그립기도 했다. 아주 어릴 적,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침대가 이랬던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콕콕 쑤시는 기분이 들어, 사비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다.

* * *

꿈을 꾸었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하얀 젖가슴에 음험하고 끈적끈적한 시선이 얽혀 들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들이 핏발이 선 눈으로 제 알몸을 훑어볼 때마다, 사비나는 소름이 끼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싫어! 보지 마……!」

차가운 돌바닥에 팔다리가 억눌린 채로는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사비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피부의 솜털이 곤두서고 근육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차라리 터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름답구나, 사비나. 이런 네 모습을 보고 반하지 않는 남자는 없을 거야.」

「싫어. 싫어요,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딸. 이 아버지는 네 덕분에 살아가는 거란다.」

아버지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예리한 칼날이 피부에 닿는 감촉이 오싹했다.

신경이 얼어 버릴 만큼 섬뜩한 냉기가 최초, 피부가 베이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다음, 타들어 가듯 뜨거운 아픔이 이어졌다.

매끄럽던 하얀 피부에 그어진 붉은 실선이 차츰 굵어지더니, 새빨간 피가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이런, 사비나. 그렇게 힘을 주면 고통만 배가 될 뿐이야. 긴장을 풀렴.」

아버지가 눈짓하자 사비나의 팔을 억누르고 있던 남자가 그녀의 왼쪽 젖가슴을 쥐었다.

「흐윽!」

가녀린 몸이 파드득 떠는 것과 동시에, 동그란 핏방울이 팍 터지면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런, 이 귀한 것을.」

아버지는 그녀의 피를 바닥에 흘리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이 구겨진 초상화를 등허리 아래에 깔았다. 사비나가 고통과 수치심에 몸을 비틀 때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몸에서 흘러내린 붉은 핏방울이 초상화의 잉크와 섞여 검붉은 색으로 번져 나갔다.

죽음의 색이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 단지 누워 있을 뿐인데도, 사비나에게는 꺼져 가는 생명의 불꽃이 보였다.

알지도 못하는 무수한 인간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검은 늪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죽으면 안 돼…… 죽이지 마세요…….」

훌쩍거리며 몸을 떠는 사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는 자상하게 웃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아무래도 살이 별로 없는 부위를 베이는 바람에 아픈 모양이구나. 다리를 벌려 보렴.」

「시, 싫어요!」

「허벅지와 엉덩이는 제법 살집이 있어. 목이나 허리를 베이는 것보다는 나을 거란다.」

사비나의 발목을 억누르고 있던 남자가 가느다란 발목을 잡은 채 좌우로 이동하자, 그녀의 다리가 벌어졌다.

「꺄아아!」

「이곳의 살은 무척 부드럽구나. 베기 아까운걸.」

「그만! 더 이상은 싫……! 아!」

남자의 손이 보드라운 허벅지 안쪽을 몇 번 문지르더니, 예리한 날붙이가 파고들었다. 사비나는 비명을 질렀다.

칼날에 베이는 고통보다도, 이토록 무참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참담했다. 이 정도로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야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안 돼요, 흑, 이제, 죽이는 건 그만…….」

부들부들 떠는 사비나의 몸에 난 상처 자국을 남자의 손이 주물렀다. 아버지는 손에 쥔 초상화를 구기며 일어섰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이란다. 잘 참았어, 사비나. 착하구나.」

「흐으윽……!」

팔다리를 누르고 있던 남자들의 손이 떨어졌는데도, 사비나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저항하는 의미가 없었다. 저주의 의식은 이미 끝났다. 오늘은 대체 몇 사람을 죽였을까. 그녀의 피가 적신 초상화의 주인은 누구일까.

「하나뿐인 나의 딸. 아버지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몸을 떨며 오열하는 사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는 그녀를 칭찬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저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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