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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4화 (4/189)

4화

사비나와 에르잔은 별다른 짐을 가져오지 않았다. 필요한 것이 전부 이곳에 있을 거라던 콘바야젠 백작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두 사람이 머물 곳이 이미 준비되어 있던 듯했다.

로스카옌 사제를 따라 10분 정도 걸었을까. 작은 마을인데도 세 사람은 처소까지 오는 동안 마을 사람을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안도하는 사비나와는 달리, 에르잔은 이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왜 사람이 안 보이지?’

유령 마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음산한 마을은 공기도 나쁘고 땅도 척박했다. 간간이 보이는 텃밭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누런 잡초가 무성해, 작물이 자라지 않은 지 몇 년은 된 듯했다.

‘대체 이 마을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사는 거지? 농사는 짓는 건가?’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마을은 아니다. 병약하다는 사비나를 이런 곳에서 요양하게 하는 콘바야젠 백작의 의도가 무엇일까. 에르잔은 짐작할 수 없었다.

‘정말로 이런 곳에서 사비나 아가씨가 요양을 할 수 있을까?’

사비나가 어둡고 조용한 것에 익숙한 것도,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에르잔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사비나의 건강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까 염려할 수밖에.

‘길에 자갈이 많아. 아가씨께서 다니시기 편하도록 길을 닦아 놔야겠군.’

두 사람은 이제 막 마을에 도착했을 뿐인데, 에르잔의 눈은 벌써 사비나가 요양을 하며 마을 안을 산책하려면 어느 길을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노선을 그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잔의 사고는 로스카옌 사제가 발걸음을 멈춘 순간 정지했다.

“이곳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예? 여기서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에르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리는 아니었다. 로스카옌 사제가 가리킨 오두막의 상태가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외관이 낡은 것이야 여기까지 오면서 본 집들이 다 그 모양이었으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벽에는 거미줄이 가득하고 창틀은 썩어서 열리지도 않았다. 새로 가져다 놓았는지 양초와 양모로 된 이불이 놓여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면서 본 폐가와 다름이 없었다.

무엇보다 방이 하나뿐이었다.

“방은 넓으니 두 분이 함께 쓰시기엔 적당할 겁니다.”

“아니, 저는 호위기사…….”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로스카옌 사제는 자기 할 말만 마치고 가 버렸다. 에르잔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로스카옌이 사라진 대문을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돌아섰다.

“집이 너무 지저분하군요.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잠시 밖에 계십시오. 우선 청소를 해야겠습니다.”

사비나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으나 에르잔의 동작이 더 빨랐다. 그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아무렇지도 않게 걸레처럼 썼다.

거미줄을 걷어 내고 벽의 곰팡이와 먼지를 닦아 낸 에르잔은 움직이지 않는 창틀을 칼집으로 탁탁 쳐서 창문을 떼어 냈다.

뻥 뚫린 창을 통해 바람이 들어왔다.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마을이라 바람은 그다지 상쾌하지 않지만, 퀴퀴한 먼지 냄새는 바람에 쓸려 사라졌다.

방을 환기시킨 에르잔은 다시 창문을 틀에 끼우고, 헛간으로 향했다.

─덜컹.

헛간 문을 열자 그 안은 더 가관이었다. 창고라기보다는 쓰레기장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까. 헛간 안에는 온통 부서진 가구가 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에르잔은 한숨을 쉬며 먼지가 붙은 망토를 탁탁 털고는 창가로 향했다.

“에르잔, 잠깐!”

“왜 그러십니까? 사비나 아가씨.”

헛간의 벽에 검은 저주의 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것은 좀 강하다. 땅이나 공기에서 느껴지던 흐릿한 기운과는 달리, 저주의 기운이 눈에 보일 만큼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저주는 사람의 몸에 깃드는 순간 통증과 병을 유발한다. 아무리 에르잔이 부적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나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벽은 안 돼요……!”

“아, 예. 벽이 지저분해서 안 되겠지요. 지금 닦겠습니다.”

“네? 그게 아니라……!”

사비나가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에르잔이 망토를 척척 접어 검게 물든 벽을 훔쳤다.

그 순간, 벽에 붙어 있던 검은 얼룩이 싹, 사라졌다.

“어?”

사비나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후드가 반쯤 벗겨진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방금 에르잔이 벽을 닦아 낸 망토를 살폈다. 망토에는 먼지와 곰팡이가 달라붙어 있었지만, 저주의 기운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깨끗해진 벽면에 엷은 금빛이 일순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저주가 사라졌어?’

그러고 보니 공기가 조금 맑아진 것 같다. 사비나가 이 통나무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음험한 저주의 기운이 꽉 들어차 있었는데, 에르잔이 청소를 시작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에르잔이 가지고 있는 부적의 효과일까? 아니면…….’

저주를 지우는 부적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감시병들이 감고 들어왔던 부적은 저주를 피하는 종류였지, 없애는 종류가 아니었다. 애초에 저주는 실체화된 「힘」이었기에, 피할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에르잔이 벽에 들러붙은 저주에 손을 댄 순간, 그것이 싹 사라졌다.

“사비나 아가씨. 청소를 계속해도 될까요?”

“……아!”

지근거리에 에르잔이 있는 것을 뒤늦게 자각한 사비나는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서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타인에게 제 얼굴을 보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곳을 청소할 테니 아가씨께서는 방에 계시죠.”

“저, 하지만…….”

청소를 함께하겠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저주의 화신과도 같은 사비나가 에르잔과 가까이 있어서 그에게 좋을 것이 하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에르잔에게 청소를 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그가 너무 의욕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전하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 * *

사비나는 늘 컴컴한 돌방에 갇혀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그저 졸리면 자고 깨면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녀에게 햇볕이 드는 방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생활하는 걸까?’

침대 위는 물론이고 바닥에도 마른 짚이 깔려 있다.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벽난로와 점토를 발라 만든 흙벽에 딱 붙어 있는 통나무 침대는 낡은 것이었지만, 사비나에게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지하의 차가운 돌방에서 보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아주 어릴 적에 이 비슷한 풍경을 보았던 것도 같지만, 그립다기보다는 도리어 낯설었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창문이 있는 방에서는 밖에 보이는 하늘의 색으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구나.’

어두침침하던 창밖의 풍경에도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 것이 신비로웠다.

방 안을 둘러보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모양인지,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헛간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에르잔이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그릇과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그릇에서는 뜨끈한 김이 나고, 바구니 안에는 동그란 빵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 우선 죽만 끓였습니다. 파이는 로스카옌 신부님께 얻어 왔습니다.”

창밖에는 붉은 석양이 내려, 에르잔의 금발은 정말로 황금을 녹여 낸 듯 붉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어둠에 익숙한 사비나에겐 그 황금빛이 부담스러웠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 시선을 내리자, 탁자 위에 놓인 오묘한 모양의 빵과 곡물로 만든 죽이 보였다.

“……이게 뭐죠?”

물끄러미 요리를 바라보던 사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반응을 오해했는지, 에르잔이 서둘러 사과했다.

“이것밖에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네? 아니, 죄송할 게 아니라…….”

불사신이나 마찬가지인 사비나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평범하게 식사했으나 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음식도 거부했다. 허기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해하는 데는 익숙했다. 어느새 굶주림이 주는 고통에 익숙해진 사비나에게 따뜻한 음식은 낯설었다. 그래서 낯선 요리의 이름을 물었을 뿐인데.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 돌아오자 사비나도 내심 당황했다.

‘혹시 내가 말을 너무 말을 짧게 해서 오해했나?’

사비나는 뜨끈한 김이 나는 희멀건한 죽을 가리키며 다시 한번, 이번엔 확실히 지칭해서 물었다.

“에르잔. 이건 무슨 요리인가요?”

“카샤7)입니다. 귀리를 우유와 함께 끓인 죽이죠.”

모락모락 김이 나는 걸쭉한 귀리죽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죽이라면 스푼으로 떠서 먹는 거겠지.’

사비나는 조심스럽게 스푼으로 귀리죽을 떠서 한입 삼켰다. 따뜻하면서도 담백한 우유가 부드럽게 흘러들어 오고, 곡물죽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어 본 것이 몇 년 전이었던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음식의 맛에 새삼 놀란 사비나는 스푼을 입에 문 채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 반응에 에르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죄송합니다! 입에 맞지 않으시는군요.”

“우으? 흡, 아뇨, 콜록!”

또다시 에르잔이 사과하는 바람에, 사비나는 서둘러 부정했다. 제대로 씹지도 않고 죽을 삼킨 탓에 기침이 나왔다.

“이, 이런! 사비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괘, 괘, 괜찮아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르잔이 등이라도 두드려 주려는 듯 손을 뻗자, 사비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뒤로 뺐다. 덜컹거리며 두 사람의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따끈한 귀리죽과 노릇하게 구워진 빵 바구니 위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검은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가 어색하게 서로의 모습을 비추었다.

“…….”

“…….”

뭔가 화제를 돌려야 한다. 사비나는 얼른 바구니 안에 든 둥근 빵을 가리켰다.

“이, 콜록! 이건, 뭐예요?”

“바트루쉬카8), 빵 가운데 트바로크9). 우유를 응고시켜 만든, 일종의 치즈

를 채워 넣은 파이입니다.”

반지르르한 기름기가 도는 동그란 갈색 빵. 옴폭하게 파인 가운데에는 말랑말랑한 상아색의 치즈가 들어 있었다.

“사비나 아가씨. 혹시 바트루쉬카를 드셔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아, 그게…….”

어쩌면 아주 어릴 적에는 먹어 봤을지도 모르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비나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 반응에 에르잔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재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귀족의 식사도 크게 다르진 않을 터인데, 이런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을 만큼 콘바야젠 가문에서는 사비나 아가씨를 귀하게 모셨던 건가?’

사비나는 그저 에르잔이 제 몸을 만졌다가 저주에 씌어 잘못될까 봐 긴장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에르잔은 그런 사정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며 난감한 표정이 되어 가는 진짜 이유를 모르는 청년기사는 멋대로 넘겨짚고 비통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 곱게 자란 분을 이런 외딴 마을에 시종도 없이 보내 버리다니…… 혹시 사비나 아가씨는 콘바야젠 백작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닐까?’

에르잔의 가슴에 애틋한 감정이 절로 차올랐다. 그리고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가득한 에르잔의 눈빛에 사비나의 머릿속에는 당혹감이 차올랐다.

‘에르잔이 나를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설마 바트루쉬카는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국민 요리였던 건가?’

만약 그렇다면 바트루쉬카의 존재를 모르는 자신이 이상하게 보일 법도 했다. 자신이 평범한 성장 과정을 거쳐오지 않은 것을 에르잔이 눈치챈 건가.

‘설마 정체를 들킨 것은 아니겠지? 내가 주술사라는 걸 알아차린 건…….’

검은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는 감정을 품고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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