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3화 (3/189)

3화

2. 독에 잠긴 마을

콘바야젠 백작령을 벗어난 마차는 이윽고 산길로 들어섰다.

─덜컹.

길이 험하기 때문인지 바퀴에 돌이 걸릴 때마다 사비나의 가는 몸이 들썩였다.

“마차를 타고 오랫동안 가야 하는데 길이 나쁘군요. 사비나 아가씨, 제게 기대십시오.”

“돼, 됐어요.”

사비나와 에르잔이 탄 마차는 심플한 형태의 검은색 2인승 마차였다. 장식도 없고 콘바야젠 가문의 인장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화려한 마차를 타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을 경계해서 이런 마차를 준비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두 사람이 탄 마차의 크기가 작다는 것이었다.

아니, 덩치가 큰 에르잔이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에르잔은 정말, 크구나…….’

아버지인 콘바야젠 백작도 제법 키가 큰 편인데, 에르잔은 그런 아버지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높았다. 마차 여행을 위해 갑옷은 두르지 않은 채였지만 후드를 걸치고 있는 사비나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몸집이 컸다.

물론, 아무리 에르잔의 몸집이 크다고 해도 마차는 성인 남성 두 명이 타기에 적당한 크기였기에 비좁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편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비나의 상황은 조금 특수했다.

‘내 몸에 닿으면 저주에 물들지도 모르는걸. 조심해야겠어.’

에스코트를 받을 때 손을 잡은 것으로 에르잔이 사비나의 몸에 닿아도 저주에 물들지 않는 것을 확인했지만, 장시간 밀착해도 좋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혹여 에르잔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그녀는 에르잔과 닿지 않도록 최대한 엉덩이를 옆으로 빼서 문가에 딱 붙였다. 그러고는 몸을 웅크렸다.

에르잔과 밀착하면 그에게 저주의 기운을 내뿜을까 봐 우려한 행동이었으나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사비나는 에르잔과 함께 있는 것이 어색했다. 아버지 이외의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한 경험은 처음이니까.

“사비나 아가씨, 마차가 흔들리는데 그렇게 구석에 기대어 계시면 더 힘드실 겁니다. 더 안쪽으로 오시는 편이…….”

“괘, 괜찮아요. 이렇게 있을게요.”

에르잔의 손이 닿지 않도록 사비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명백한 거부를 의미하는 몸동작에 에르잔의 손이 당혹스러운 듯 허공에서 방황하다가 무릎 위로 되돌아갔다.

‘어떡하지…….’

평범한 사람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부터 살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부적을 온몸에 둘둘 감은 감시병조차 사비나에게 직접 손을 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만약 사비나가 진심으로 죽이고자 마음먹는다면 부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니, 감시병들은 항상 그녀를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그런데 에르잔은 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게 닿으려 하지?’

만약 사비나의 정체를 안다면 닿는 것은커녕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꺼릴 텐데, 이 남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손을 내민다.

‘아버지께 조심하라는 주의를 듣지 못했나?’

어쩌면 아버지는 그녀의 정체가 탄로 날 것을 경계해, 에르잔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손을 잡아도 괜찮았으니 아마 지금은 부적을 가지고 있겠지만, 몸에서 떼어 놓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사비나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최대한 에르잔에게 몸이 닿지 않도록 마차 구석에 콕 박혔다.

“사비나 아가씨. 힘드시면 마차를 세울까요?”

“아니요…….”

“식사를 하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추우시다면 담요를 준비하겠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에르잔이 말이라도 걸면 잔뜩 긴장해서 구석에 틀어박혀 바들바들 떠는 사비나의 모습은, 마치 상처 입고 인간을 경계하는 야생동물과도 같았다.

‘내가 아가씨께 너무 들이댔나?’

이제 갓 기사 양성소를 졸업했을 뿐인 에르잔은 경호 임무가 처음이었다. 아니, 여자와 함께 있는 것부터가 처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상대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긴장하거나 수줍어하지는 않았다. 에르잔은 여자에 대해 무지했기에, 도리어 이성을 대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거였다.

‘몸도 약하시다고 들었는데. 장시간 마차를 타면 힘드실 거야.’

마차를 세우고 쉬게 할까 했지만, 사비나는 분명히 아니라고 답했으므로 에르잔이 멋대로 마차를 세울 수는 없었다. 머쓱한 듯 목덜미를 쓰다듬던 그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산길을 달리는 마차 안에서, 에르잔은 이곳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 * *

황궁 근위대 입단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실력자임에도 에르잔은 배속을 받지 못했다. 신체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이 났다는 이유였다. 무엇이 부적합인지 근위대의 보좌관은 설명해 주지 않았다. 상부의 판단이라고만 대답했다.

같은 시기에 입단한 동료들이 하나둘 소속 부대로 떠나는 것을 보며, 에르잔은 하염없이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콘바야젠 백작이 에르잔을 찾아왔다.

「자네가 에르잔 무스코바예프로군.」

콘바야젠 백작은 분명 40이 넘은 나이일 터인데, 18세인 에르잔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보였다. 노숙해 보이도록 수염을 기르고 느슨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2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피부는 매끈했고 눈빛은 총명했다.

「신체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고 하던데.」

「예. 그래서 아직 배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살아 있었을 줄이야…….」

「예?」

「아니, 자네처럼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무척 반가워서 말일세.」

제게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라고 되물을 만큼 경우를 모르지는 않았으므로 에르잔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콘바야젠 백작은 그에게 대단한 흥미를 보이며, 일을 의뢰했다.

「우리 가문에서 보호하고 있는 아가씨가 있는데, 자네가 그녀의 경호를 맡아 줬으면 해.」

「저는 황궁 소속의 기사입니다. 근위대의 임무 외에는…….」

「나는 지금 황제 폐하의 대리인일세. 내가 자네에게 의뢰하는 일 또한 황실을 위한 것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으나 에르잔은 일개 평기사였고 콘바야젠 백작은 황제의 대리인이었다. 반박은 허락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는 만날 수조차 없는 사람이다. 황제의 대리인이 배속도 받지 못한 황궁 기사를 마주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의뢰를 받아들여 주겠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좋아. 그 태도도 마음에 들어. 과연 내가 찾던 인재가 틀림없군.」

에르잔은 아직 기사로서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콘바야젠 백작은 그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결국 에르잔은 경호 임무를 받아들여 무기한 휴가계를 제출했다. 물론 승인은 콘바야젠 백작이 직접 했다.

그것이 사흘 전이었다.

* * *

“도착했습니다, 사비나 아가씨.”

마차가 도착한 곳은 깊은 산골짜기였다. 아마도 이곳에 사비나가 요양할 마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골이라고 들으면 으레 생각날 법한 맑은 개울이나 상쾌한 바람, 녹음이 우거진 풍경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긴, 대체……?”

에르잔이 당혹스러운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을 에워싼 것은, 맑게 갠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 빛이 무색할 만큼 우거진 검은 사철나무. 비도 내리지 않는데 바닥은 질퍽거리는 진흙으로 가득했다. 한낮인데도 이상하게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장소였다. 멀리 보이는 네 개의 첨탑이 아니었다면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에르잔은 마부석에 앉아 내려오지 않는 마부를 향해 호소했다.

“저,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드신 것 같습니다. 콘바야젠 백작께서는 아가씨의 몸이 안 좋아 요양을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봐도 여긴 환자가 요양을 할 만한 곳이 아닙니다.”

“저는 주인님께 분명히 이곳까지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럼 이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에르잔이 부르는데도 마부는 주저하지 않고 말을 몰아 길을 거슬러 갔다.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산골에 버려진 에르잔은 당황한 얼굴로 사비나를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태연했다.

‘저주의 기운이 느껴져.’

바닥에서 스멀스멀,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진득하고 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처음 사비나가 아버지에게 불려갔을 때, 그녀의 몸을 덮쳤던 저주의 기운과 비슷했다.

사비나는 후드를 벗지 않고, 단지 끝자락만 살짝 들어 올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년, 아니, 십몇 년은 외부인이 출입하지 않았을 듯한 울창한 숲의 한가운데에 좁은 길이 나 있었다. 처음 보는 길인데, 어떤 길인지 알 것 같았다.

“이 길로 들어가면 마을이 나올 거예요.”

“사비나 아가씨…….”

“들어가죠.”

마차 안에서 어색해하며 에르잔을 피하던 것이 거짓말처럼, 마차에서 내려서자 사비나는 태연해졌다. 에르잔은 조금 주저하다가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사비나는 그와 세 걸음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뒤따랐다. 진흙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신발을 타고 불길한 기운이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나는 상관없지만, 에르잔은 괜찮을까?’

사비나는 후드를 조금 더 올려 앞서가는 에르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배는 되는 커다란 덩치의 젊은 기사는 반듯한 자세 때문인지 실제보다도 더욱 커 보였다. 햇볕을 가리는 울창한 나무보다도 그의 뒷모습이 더욱 크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에르잔이라면 이곳에 깃든 소소한 저주 정도에는 영향을 받지 않을 거야.’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어, 사비나는 안도했다.

“오셨습니까.”

길의 끝에는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나이는 6, 70쯤 되었을까. 검은 사제복5)을 입고 검은 법모6)를 쓴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마을 교회의 사제일 것이다.

풍성한 흰 수염을 기르고 있음에도 조금도 인자해 보이지 않는 사제는 사비나와 같은 검고 탁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 들어찬 저주의 기운은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다. 곧바로 저주에 삼켜지지는 않더라도 서서히 병들어 죽어 갈 정도의 농도였다.

사제답지 않게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사비나는 그가 저주에 익숙한 인간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는 이 교구를 담당하고 있는 로스카옌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이시군요. 이쪽은 콘바야젠 백작 가문에서 보호하고 있는 사비나 아가씨. 저는 그 호위인 에르잔 무스코바예프입니다.”

사제와 에르잔이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사비나는 마을의 풍경을 살폈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울타리가 둘러진 광장이었다. 옆에는 연못이 있고, 그 너머에는 비어 버린 가축우리와 낡은 통나무 가옥이 보였다.

제대로 보수가 되지 않아 벽의 나무가 떨어지고 지붕이 내려앉은 것을 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같았다.

“처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참고

5) 라소(ρ?σο). 정교회 사제들이 입는 검은 두루마기

6) 칼리마피(καλυμμα?χι). 정교회 사제들이 쓰는 원통형의 검은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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