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2화 (2/189)

2화

연회가 길어져 술에 거나하게 취한 황태자는, 자신의 침실에 손발이 묶여 누워 있는 알몸의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녀였던 사비나는 어느새 성숙한 여인으로 자라났다. 그녀는 몹시 아름다웠다. 매끄럽고 보들보들한 흰 피부에 흑단 같은 긴 생머리, 커다란 눈에 그늘이 질 만큼 긴 속눈썹 아래 자리한 새카만 눈동자. 안으면 부서질 듯 가녀린 몸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채 신음하는 사비나를 보고 발정이 난 황태자는, 신원불명의 여자가 누워 있는 수상한 상황에도 시종을 부르지 않았다. 도리어 아랫도리만 벗고 허겁지겁 침대 위로 기어올라 왔다.

아직도 기억한다. 피부가 녹아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짐승을 닮은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사비나의 몸 위에서 헐떡거리던 황태자의 모습을.

황태자는 인간의 형상임을 알아볼 수조차 없는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버렸고, 후계자를 잃은 황제는 실의에 빠져 국정에서 손을 놓고 칩거했다. 대리인 자리에 오른 것은 당시 황제가 신임하던 콘바야젠 백작, 사비나의 아버지였다.

감히 백작 따위가 황제의 대리인이 되다니,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권력을 잡은 콘바야젠 백작이 자신에게 반발하는 귀족들을 모두 죽여 버렸으니까.

콘바야젠 백작은 사비나의 저주를 이용해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죽음의 형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모두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저 콘바야젠 백작을 거스르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뿌듯하지 않니? 사비나. 모두가 나를, 우리 가문을, 너를 두려워하고 있어.”

“흐윽, 흑…….”

“이제 곧 나는 공작위를 받게 돼. 우리 가문의 영광은 너로 인해 만들어진 거란다. 그 어떤 가문의 여식도 너만큼 아버지를 위하지는 못할 거야.”

“사람을 죽이는 게, 어떻게 아버지를 위하는 건가요…….”

“이런, 사비나.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야. 마땅히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을 좀먹는 벌레일 뿐이지.”

살아 있는 저주의 화신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사비나는 아름다웠다. 침실에, 창고에, 외진 길목에 나타난 수상쩍은 여인을 본 사내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개처럼 발정하여 그녀의 몸에 올라탄 남자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온몸이 녹아내리고 상처가 터져 피와 진물이 흘러내렸다.

“싫어, 싫어……!”

손발이 묶여 저항하지 못하는 사비나는 죽어 가는 남자의 밑에 깔려서 그 심장이 멈출 때까지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사비나가 저주하기를 거부하면 아버지는 부적을 둘둘 감은 사내들을 시켜 그녀의 손발을 잡아 누르게 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칼날로 하얀 피부를 찢어 붉은 피를 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몇이나 되는 사람의 초상화를 적셨다. 피에 젖은 초상화의 주인들은 모두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사비나는 죽고 싶었다.

일부러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다. 칼에 베인 상처를 덧나게 하려고, 고의로 상처를 벌리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헤집기도 했다. 그러나 뒤따르는 것은 끔찍한 고통뿐이었다.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벽에 머리를 찧고 기절해 쓰러져도 깨어나면 몸은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혀를 깨물어도 눈을 찔러도 마찬가지였다. 사비나의 몸에 닿는 인간들은 수없이 죽어 나가는데, 그녀 자신은 죽을 수 없다니. 이것은 대체 어떤 모순일까.

어느 날이었던가, 감시인이 허리띠를 남기고 가는 실수를 했다. 그것으로 목을 매 보았지만 역시 죽을 수 없었다. 사비나는 목을 맨 채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슬프구나, 사비나. 어째서 이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는 거니?”

천장에 매달린 가느다란 끈에 의지하여 흔들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아버지가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로부터 15년이 흘렀다. 어린 소녀였던 사비나는 어른이 되었는데, 기이하게도 아버지는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았다.

“나는 죽고 싶어요.”

“이런, 사비나. 그런 생각은 하지 말렴. 네가 죽으면 이 아버지는 슬픔에 겨워 목이 멜 거란다.”

“날 이렇게 만든 아버지가 미워요.”

“그러니?”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는 사비나를 만지고도 저주에 걸리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일상은 흐릿할 만큼 아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아직 어렸던 소녀의 세계를 부수고, 억지로 끌고 와 이런 곳에 가두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고 있음에도, 사비나는 그를 진심으로 증오할 수 없었다.

‘아버지라서……일까?’

살아 있을지 죽었을지 모르는 어머니를 제외하면 그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리고 사비나를 귀신 보듯 두려워하거나 알몸에 발정할 뿐인 다른 이들과는 달리 온화하게 접촉해 오는 유일한 인간이기도 했다.

“이리 온, 사비나.”

남자의 손이 핏기 없는 발목을 쥐고 잡아당기자, 목을 감싸고 있던 가느다란 끈은 힘을 잃고 뚝 끊어졌다. 사비나는 남자의 품으로 쓰러졌다.

얼굴에 고급스러운 셔츠의 질감이 느껴졌다. 단추를 여미지 않아 벌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것은 성인(聖人)의 모습을 부조한 금줄 목걸이.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교회의 사제나 할 법한 목걸이를 떼어 놓지 않는 것을, 사비나는 늘 이상하게 생각했다.

“사비나. 사랑스러운 나의 딸.”

아버지는 사비나를 안고 천천히 등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돌바닥과는 대조되는 사람의 체온이 따스하게 느껴져야 할 텐데,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놓아주세요.”

사비나가 부르르 떨며 가슴을 밀어내자 아버지는 순순히 놓아주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다시 조금씩 원망이 차오르는 것을 본 아버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가 나른하게 웃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혹사시켰지. 조금은 쉬는 게 좋겠구나.”

뜻밖의 말에 사비나는 뱉으려던 원망의 말도 잊고 입을 허 벌렸다.

“네가 요양할 곳을 알아보았단다, 사비나.”

“요양……이요?”

“한적한 산골 마을이야.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렴.”

* * *

빛이 낯설었다. 몸에 닿는 따스한 물의 감촉도 낯설었다.

“자, 사비나. 이것을 입으렴.”

밖으로 「운반」될 때 몸을 감싸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 입기 위해 만들어진 옷감이 사비나의 몸을 감쌌다. 얇고 매끄러운 아마천으로 지은 루바하1)였다. 화려한 눈꽃문양이 붉은 실로 수 놓여 있고, 가슴과 소매 끝에는 반짝이는 비즈가 달려 있었다. 허리띠2)를 묶고, 사비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았을 때보다 키가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아버지는 손수 사비나의 머리를 빗어 주고 옷차림을 정돈해 주었다.

“사랑하는 사비나. 밖에서는 네가 내 딸인 것을 밝혀서는 안 된단다.”

남자의 손이 섬세하게 움직이며 검은 머리카락을 땋아갔다.

“아. 오해하지 말렴, 사비나. 내가 네 존재를 부끄러이 여겨서가 아니야. 이 아버지에게 적이 많은 것은 너도 알고 있지? 나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 너를 다치게 할까, 아버지는 그게 걱정이란다.”

사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그 말을 믿기에 사비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상냥한 말로 위로한 뒤 또다시 잔인한 명령을 내릴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구태여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은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콘바야젠 가문의 주술사. 저주의 화신.

그녀의 정체를 아는 이들이 보인 반응은 언제나 둘 중 하나였다. 두려워하여 진저리 치며 멀어지거나, 아름다운 그녀에게 발정하여 덮치려 하거나.

둘 다 싫었다.

사비나는 커다란 브로치3)로 술이 달린 여름용 케이프4)를 고정한 후, 뒤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짐은 많이 들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어차피 필요한 것은 그쪽에서 준비해 둘 테니.”

“…….”

어차피 이 저택에 사비나의 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버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문밖으로 이끌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온 사비나는 1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낯선 인영을 보고 흠칫 놀랐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비나 아가씨.”

아버지보다도 커다란 남자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 남자다운 턱선 위로 뚜렷한 이목구비가 조각처럼 들어선 단정한 얼굴. 어두운 자신의 방과는 달리 정오의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홀에서, 남자의 금색 머리카락은 태양빛을 머금은 듯 반짝였다.

사비나는 후드의 끝자락을 당겨 내렸다. 남자의 모습이 눈부셔서 눈이 멀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이 오랫동안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있어 아직 눈이 빛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리라.

“아버지. 이 사람은…….”

“네 호위기사란다.”

“호, 호위……?”

사비나는 죽지 않는, 죽을 수 없는 몸이었다. 다쳐도 상처가 금방 나아 버리는 그녀는 불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에게 호위라니. 사비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에르잔 무스코바예프입니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느라 눈높이가 낮아진 에르잔이 그녀를 올려다보자, 겨우 시야를 가린 보람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사비나는 후드를 꽉 누른 채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 는…….”

“사비나 아가씨, 손을.”

에르잔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자 사비나는 당황했다.

“아버지…….”

“괜찮단다, 사비나.”

그 말에 사비나는 후드 끝을 조금 들어 올려 남자의 모습을 훑었다. 그녀의 감시병이라면 응당 몸에 감고 있어야 할 부적이 보이지 않는다.

‘옷 속에 감춘 걸까?’

에르잔은 귀족이 아니라 기사다. 가문에 위협이 될 만큼 명성이 있는 귀족들만을 제거해 온 아버지가 구태여 이런 젊은 기사를 죽이려 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침실도 창고도 외진 길목도 아닌 저택의 홀이 아닌가. 그것도 햇볕이 드는.

정문이 활짝 열려 있고, 멀리 지나가는 하인의 모습도 보이는 이곳에서 사람을 죽게 만들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겠지.’

사비나는 머뭇거리다가 에르잔의 커다란 손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긴 손가락이 작은 손을 가볍게 감쌌다. 난생처음 남자에게 손을 잡힌 경험을 한 사비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르잔의 손은 아버지의 것보다 더 크고 다부졌으며 또한 따뜻했다.

‘어째서?’

이제까지 사비나에게 사람의 체온이란 불쾌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발정하여 달려드는 남자의 체온은 구역질이 날 정도라, 차라리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 있는 편이 백배 낫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조차 불쾌할 뿐이었는데.

“몸이 약하셔서 밖으로 나선 일이 그다지 없다고 들었습니다. 불편하신 일이 없도록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온화하면서도 강직함이 깃든 음성에 사비나는 후드를 약간 더 올려 에르잔을 바라보았다. 마주한 것은 조금도 그늘이 없는 표정. 별로 본 일이 없는 파란 하늘을 닮은 눈동자.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칼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뜨끔했다. 사비나는 다시 후드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돌렸다. 손은 여전히 맞잡은 채였다.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부, 부탁……할게요, 무스코바예프 경.”

“에르잔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사비나 아가씨.”

의식하여 이름을 부르면 저주가 깃든다. 사비나는 망설이다가 최대한 감정 없이 가볍게, 중얼거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르잔.”

“예, 아가씨.”

이름을 부르자 자리에서 일어난 에르잔이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부적을 두른 천에 둘러싸여 「운반」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손을 잡고 제 다리로 걸어 문을 지나는 기분은 낯설고 생소했다.

한낮의 태양이, 옆에 있는 에르잔이 눈부셔서, 사비나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후드를 눌러쓴 채 땅만 보며 걷다가 마차에 올랐다.

참고

1) 루바하(Rubakha). 러시아에서 입는 민족 의상으로, 전통적으로 두꺼운 리넨으로 만든 스목풍의 블라우스 또는 상의. 깃을 세우고, 왼쪽 앞가슴에서 단추를 여며 허리를 끈으로 맨다. 네크라인을 비롯하여 앞섶이나 소맷부리 등에는 민족적인 자수로 장식하는 것이 특징.

2) 요스타(Josta). 천을 늘어뜨린 장식이 달린 허리띠

3) 삭타(Sakta)

4) 스나테네(Sn?tene). 여름옷 위에 걸치는 어깨걸이 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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