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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반가워하며 손을 내젓는 히스와 달리 로하나의 얼굴은 대번에 굳어졌다.
“아니, 어쩌자고 지금 이 시간에 여길……!”
그 한마디로도 히스는 로하나가 케이든을 얼마나 편안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예전과는 퍽 달랐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아니, 그래도.”
그러면서 로하나는 히스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돌길에 구두 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잰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케이든은 말에서 내린 채 먼지를 털면서 거의 뛰어오다시피 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손이 닿는 거리에 도달하자마자였다. 케이든이 언제나처럼 빠르고 강하게 다가와 그녀를 그대로 안았다.
순간, 말문이 막힌 로하나는 그대로 안긴 채 저도 모르게 잠시 오랜만에 느끼는 안도감에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다 금방 정신을 차린 로하나는 그를 떼어냈다.
“아니, 당장 내일이면 돌아가는데 왜 굳이…….”
“그래도 너무 길었습니다.”
“길긴 뭐가 길어요?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타박하는 로하나와 달리 케이든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녀는 다이아몬드 핀을 한쪽에 꽂은 모습이었다.
로하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뭐라 뭐라 잔소리를 해 댔다. 케이든은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히스에게 눈인사를 한 뒤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에서도 아름다웠지만 밝은 가을 햇살 아래에서는 더 아름다운 그녀였다.
‘아닌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 케이든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점심은 다 같이 먹죠, 그래도.”
“네?”
로하나가 지금 내 말을 안 듣고 있었던 거냐는 잔소리를 이어 갔지만 케이든은 그저 일관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곧 방해꾼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전에 오랜만에 할 일이 있었다.
케이든은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닿기 위해서는 한껏 숙인 채 고개를 꺾어야 했지만, 기꺼이 그렇게 하고도 남을 만큼 그녀는 완벽했다.
조금 들뜬 숨이 오갔다. 셀 수 없이 많이 느꼈던 이 순간마다 케이든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짧은 입맞춤을 한 채 케이든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로하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로하나가 말이 이렇게 많은 사람인 줄 예전에는 몰랐었다.
아마 이 말을 직접 한다면 로하나는 케이든이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인 줄 몰랐다고 말하겠지.
케이든이 미소를 지어 보이자 로하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저도 따라 미소를 짓고 말았다.
“점심만 먹고 그럼 빨리 돌아가요.”
“점심 이후부터는 휴가를 보내지.”
“휴가는 내일부터인데.”
“그 정도는 괜찮아.”
‘괜찮다’는 단어를 들은 로하나의 얼굴에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쳤다. 에메랄드빛 죽음 앞에서 끌어 올려졌을 때 들었던 그 말.
〈이젠 괜찮아.〉
이젠 괜찮아.
로하나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케이든에게 바짝 붙어 섰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걸로.”
로하나는 하는 수 없이 큰 숨을 내쉬며 그가 내민 팔에 팔짱을 꼈다.
*
제국의 황제와 황후에게는 휴가 또한 일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이번 휴가에서는 북부를 돌아볼 차례였다.
히스와 더불어 시리율과 화기애애한 점심 식사를 마친 로하나와 케이든은 조금 일찍 남부를 떠났다.
“어디로 가시게요?”
로하나가 얇은 보라색 망토를 걸치며 케이든에게 물었다.
“북부는 내일 오후까지만 도착하면 되지 않을까?”
“그거야 그렇죠.”
“마차에 타고 있으면 도착할 텐데 꼭 어디를 갈지 알아야겠어?”
케이든이 말투에 어리광을 조금이라도 섞는 모습은 아무리 요즘이라고 해도 꽤 드문 일이었다. 로하나는 케이든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그의 말에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했다.
“사용인 분들이 너무 힘들지 않은 곳으로 가요, 어디든.”
로하나는 잔소리를 가장한 아무 말이나 하며 마차에 탔다.
“네, 알겠습니다.”
케이든은 미소를 지으며 마차 문을 닫았다. 로하나는 조용히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마차의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몇 날 며칠 강행군을 했더니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익숙한 향기가 근처에 있으니 긴장이 풀렸다.
어쩌다 잠이 들었을까.
깜빡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마차가 멈추고 있었다. 따뜻했던 햇살이 어느새 사라지고 밖은 어두웠다.
로하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남아 있던 잠기운을 털어 내려 했다. 밖은 제법 조용했다.
말에서 내리는 케이든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차 문이 열렸다.
“다행히 좀 쉬신 모양입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눈치챈 케이든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로하나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마차에서 내리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케이든은 익숙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리는 순간,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반가움의 탄성이었다. 일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인지,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고 있어서 조용한 것인지 익숙한 공작저의 후문 앞에는 몇몇 사용인들만이 미소를 가득 지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노프탈로 온 거예요?”
로하나의 속삭임에 케이든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모르게 있다가 갈 겁니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로하나는 온몸이 간지러웠다.
“왜 굳이 이렇게 해요?”
“같이 방을 쓰기만 해도 알은체하는 황궁보다는 여기서 하루라도 있어 보고 싶어서?”
케이든은 솔직하게 대답하더니 그녀를 제 망토로 감쌌다.
“이렇게 하면 더 수상하지 않을까요?”
“이미 충분히 수상합니다.”
“그리고 너무 채신머리없는…….”
그러나 케이든은 로하나의 잔소리를 듣지 않았다. 순간, 케이든이 그대로 그녀를 안아 올렸던 것이다. 결국 로하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케이든이 쓰던 내실은 그대로였다. 멸문지화를 당했던 델클리프 가문은 케이든 이외에는 남은 자손이 없어 공작의 이름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공작저는 필요한 이들이 머물 때에만 쓰였는데, 그래서인지 주인의 자리는 늘 그대로 비어 있었다.
어찌나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는지, 내실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로하나는 케이든에게 안긴 채로 감상에 잠겨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봤을 때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길고 큰 창 너머로 달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음…….”
그녀를 안고 응접실 한가운데 선 케이든이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왜요?”
“어디로 가야 좋을까.”
“네?”
무거울 법도 한데 전혀 지치는 기색이 없는 케이든은 잠시 시선을 좌우로 돌렸다.
“서재도 있었고…… 침실도 있었고…….”
“그럼 응접실에서 안 했나 본데요?”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대답했다가 양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케이든의 옷깃을 조금 잡고 있던 그녀의 균형이 순간 흔들렸지만 케이든은 그녀를 안전하게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로하나는 저 스스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붉어진 뺨이 보이지 않길 바랐지만 그러기엔 달빛이 너무 밝았다.
“세상에…….”
케이든은 로하나가 이렇게까지 솔직했던 적이 있었나 싶어서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를 내었다. 로하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안겨 있는 채로 그건 무리였다.
결국 보랏빛 눈동자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넘어가요!”
유난히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로하나는 케이든의 입술이 근사한 미소를 그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다.
환한 달빛 아래 새하얀 로하나의 등이 빛났다. 들뜬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케이든의 커다란 손이 가는 허리를 그대로 감싸 쥐었다. 폭포같이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근처에서 함께 흔들렸다.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가끔 터지는 숨소리에 케이든의 손에서 힘줄이 불거졌다.
탄탄한 다리가 서로 자리를 바꾸어 얽히기를 여러 번.
결국 로하나가 먼저 지치고 말았다. 케이든은 늘 그렇듯 쑥스러워하는 로하나를 능숙하게 침실로 데려갔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이 쇄골을 지나 허리를 쓸었다. 다시 숨소리가 터져 나오고 케이든은 입술로 그걸 받아들였다.
달빛도 밝은데 신기하게 별빛도 함께 쏟아지는 까만 밤하늘을 머리맡에 두고 두 사람은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로하나가 잠에서 깨었을 땐 새벽빛이 파르스름했다. 어쩜 늘 그런지 케이든은 또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있었다.
“마님!”
로하나가 간단하게 씻고 가운을 걸치며 나타나자 사용인 중 하나가 깜짝 놀라 그녀를 불렀다가 다시 황급히 호칭을 바꾸었다.
“아…… 아니 황후 폐하!”
“혹시 폐하를 보셨는가?”
“예.”
사용인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로하나는 안내를 받다가 이 길이 가장 안쪽 정원으로 가는 길임을 깨달았다.
가장 안쪽 뜰은 케이든이 누구의 출입도 허가하지 않던 곳이었다.
“깨어나시면 여기로 모시라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별일이라고 생각하며 로하나는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사용인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물러났다. 중앙 안뜰 문이 열려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잔디에 스치면서 드레스 자락이 촉촉하게 젖었다.
“케이든?”
그리고 정원 안에 들어서는 순간, 로하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페레니얼, 플록스, 버베인, 가을 인디고.
정원 안은 온통 보라색이었다.
그 외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보랏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작은 유리 온실 안에는 라벤더와 여름에 피는 보랏빛 꽃들이 가득했다.
“케이든?”
그때, 로하나의 목소리를 듣고 흰 셔츠만 입고 있는 케이든이 뒤를 돌아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보라색이 어떤 의미였는지.
“어려서 여기로 왔을 때 내 의사 중 하나가 정원을 가꾸라고 하더라고요.”
가까이 다가오며 케이든이 말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은발이 싱그러워보였다.
“정서를 함양하기 위해서라나.”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더 다가왔다.
“이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 겹의 보랏빛 꽃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향기와 빛깔에 취할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 더 벅찬 무언가에 취할 것만 같았다. 보랏빛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언젠가 한 번은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로하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여러 번 했던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 꼭 다시 해야만 하는 흔한 말.
“케이든.”
그의 은발 아래 흑안이 그윽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하나는 이미 닿을 듯 가까운 그를 꿈꾸듯 올려다보았다.
“사랑해요.”
언제 보아도 근사한 미소가 그의 입술에 걸렸다. 깊은숨이 둘 사이를 타고 흘렀다. 곧 밝아 온 태양이 반짝이면서 푸른 하늘을 열었다.
‘이젠 괜찮아.’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로하나는 생각을 멈춘 채 그에게 몸을 맡겼다. 다 괜찮을 것을 알았기에 더 이상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따스한 햇살이 두 사람 위로 쏟아졌다.
눈부시게 평범하고 아름다운 가을 아침이었다.
fin.
@ZP 타싸X요게X공금갠소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