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24화 (124/125)

124

죽음의 문턱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불투명한 에메랄드빛을 보는 순간 케이든은 알 수 있었다.

케이든은 칼라드리우스와 함께 중력보다 빠르게 하강했다. 새파랗고 불투명한 에메랄드빛을 내려다보니 눈이 시렸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구할게.’

케이든은 손을 뻗었다. 로하나가 에메랄드빛 죽음에 닿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조금만 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모양인지 온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잘못하면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더라도 그녀를 구하고 죽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팍!

‘잡았다.’

팔의 온 근육의 힘줄이 터질 듯 두드러졌다. 그녀를 칼라드리우스의 위로 끌어올리면서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이젠 괜찮아.”

거친 쇳소리였지만 부드러운 느낌의 목소리였다.

“이젠 괜찮아.”

로하나의 몸이 차가웠다. 케이든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늦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젠 괜찮아.’

그 순간이었다. 큰 숨을 몰아쉬면서 케이든이 잠에서 깨었다.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침대 주위를 황급히 휘저었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거친 숨을 마저 내쉬던 케이든은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식은땀이 흘러 입은 옷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좋은 아침입니다.”

시종장이 깍듯이 인사를 했다. 붉은 장식이 사라진 커다란 내실은 보라색과 은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새로 시작하는 3대 황제인 케이든은 제국의 이름을 바꾸지 않는 대신, 이전 제국의 상징은 전부 바꾸었다.

아린족을 상징하는 황금색과 붉은색 대신, 은색과 보라색이 사용되었다. 은색은 델클리프 가문에서 왔고, 보라색은 붉은 색에 푸른 색을 섞어서 결정되었다. 푸른 색이 카르크 족을 주로 상징하던 색깔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건 시리율과 갈레드의 생각이지 그가 어떤 색을 제국의 상징으로 채택해야 할지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보라색이 선택되는 것을 보며 케이든은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그에겐 특별한 색이었다. 그리고 오늘따라 보랏빛이 눈에 깊게 들어왔다.

황궁은 쓸쓸했다. 전쟁 직후 힘겨웠던 하루하루가 지나고, 그렇게 사계절이 지나고, 지금은 다시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 천장까지 뻗은 긴 유리창 밖으로 붉게 지기 시작한 단풍이 보였다.

“황제 폐하. 오늘 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국은 쓸데없는 일을 많이 했다. 케이든은 굳이 다른 사람이 이렇게 일정을 읊어 줘야 하는 관습이 불필요하다고 느꼈으나, 한 치의 실수도 없게 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에 승복하고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럼, 조찬 모임부터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모르던 일정도 아니고 케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준비를 했다.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넘긴 은발에, 보라색 띠를 두른 회색 예복까지 갖춰 입으며 케이든은 습관처럼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했다. 정확히는 막지 않았다.

‘시간 한번 참…….’

조찬 모임에 나서자 펠스와 더불어 새로 임명된 대신들이 줄지어 기다렸다가 일사불란하게 일어났다. 여전히 아린족 귀족이 대부분이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개벽하진 않았다. 어쩌면 여전히 문제는 그대로였다.

아린족이 상단의 주인이고, 카르크족이 그곳에서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도.’

케이든은 정무 대신들의 보고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도록 하는 수밖에 없죠, 우리는.〉

떠올리기만 해도 설레는 목소리를 회상하며, 케이든은 목을 가다듬었다.

“법안이 통과되었을 뿐 판례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보고가 제법 되던데.”

대대로 판관을 관리해 온 브롱크 후작이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 그게…….”

“무슨 상황인지 아니까 변명할 것 없고.”

브롱크 후작은 어설프게 열었던 입술을 얼른 닫았다.

“다음 주에도 이런 식의 보고가 이 정도로 많다면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가중 처벌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겠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도록 하는 수밖에 없죠, 우리는.〉

케이든은 다시 한번 로하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후에도 일정은 바쁘게 지나갔다. 각종 알현과 보고, 그리고 시찰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 열린 창문 사이로 가을바람이 불었다. 달큼한 단풍 향기가 흘러들어 왔다.

“갈레드.”

군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갈레드와 이즈의 보고를 듣던 케이든이 불쑥 갈레드의 말을 끊었다. 보랏빛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바라보던 시선이 갈레드와 이즈를 향했다.

“네?”

“오늘은 그 보고가 전부인가?”

“아…… 네, 일단은.”

“그럼, 그거 해결은 이즈 네가 하지.”

“예?”

은발을 꽉 잡아매서 묶은 이즈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다 이내 가늘게 뜬 눈으로 제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내 위임이라고 하면 충분할 거야. 사실 네가 실무자이니 더 낫겠지.”

“폐하!”

“수고하게.”

“폐하?”

어리벙벙한 갈레드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이즈를 두고 케이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갈레드는 케이든의 빈자리를 보고도 아직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제 주군을 불렀다. 이즈는 팔짱을 끼며 의자 뒤로 깊숙이 몸을 기댔다.

가을바람이 꽤 선선했다. 그답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즈는 피식 웃으며 갈레드에게 서류 더미를 넘겼다.

“일합시다.”

*

“세상에 완전 가을이네.”

로하나가 노래하듯 말했다. 정원에 앉은 그녀 앞에는 불편한 심사를 애써 감추고 있는 시볼레 백작이 서 있었다.

로하나는 태연한 얼굴로 두꺼운 서류를 착착 넘겼다. 서재에 있는 아린족의 깃발도 마음이 아파 차마 내리지 못한 그는, 로하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예예, 그렇죠.”

“카르크족 아동까지 착취하신 기록은 이미 충분해서…… 더 이상 확인할 것도 없겠네.”

“그…… 그 오해입니다.”

백작이 손을 뻗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하나를 붙잡으려 했다.

“이만 가 보겠네.”

로하나는 설마 감히 저를 잡을 생각이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혈기 넘치는 그녀의 붉은 뺨이 가을 햇살에 빛났다.

“그…… 그럼 오늘 식사라도…….”

“어쩌지.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는데.”

선약이 없더라도 그와 식사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로하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말하며 그의 자택을 떠났다.

마차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익숙한 영지가 보였다. 안전 가옥이 있었던 곳에는 번듯한 건물이 새로 지어져 있었다. 웬만한 공작저보다도 훨씬 큰 규모였다.

R. D.라는 현판을 보며 로하나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에서 내리며 눈이 부셔 눈을 가리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로하나가 뒤를 돌아보자, 다시 예전처럼 바닷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히스가 서 있었다. 다만 검은 옷만은 그대로였다.

“히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실로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로하나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히스는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잘 지냈어요?”

“이제는 정말로 말씀을 낮추셔야 하는데…….”

“레이디니까. 그냥 예전처럼 할게요.”

로하나의 말에 히스는 빙그레 웃고는 그녀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울긋불긋 물든 가로수 길을 지나자 넓은 잔디밭이 나왔다.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넓은 잔디에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안전 가옥이 있던 곳에 자리 잡은 저택에서도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왁자지껄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소리였다.

“좀 어때요?”

로하나가 물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무장 단체가 아니라 교육 기관이라는 것을 설득시키는 게 아직은 좀 어렵지만요.”

히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누구든 마력을 제대로 조절할 수 있어야만 할 테니까요.”

히스의 말에 마력의 위력을 떠올리며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로하나의 말에 히스는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씁쓸함을 감추지 않은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하나는 애써 명랑함을 조금 되찾고는 덧붙였다.

“조금씩 나아질 테니까요.”

바람이 불어 히스는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렇죠.”

히스는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피곤하실 텐데, 걷기보다는 들어가셔서 식사라도 바로 하시는 것이……?”

“그럴까요?”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잘 닦여진 돌길 위로 하나둘 떨어졌다.

“시리율이 레이디를 보면 정말 반가워할 겁니다.”

“고마운 일이에요 정말.”

로하나는 첫 만남 때부터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던 시리율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녀가 얼마나 넓은 사람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새파란 하늘 아래 구름이 한두 조각 떠가고 있었다.

“레이디.”

로하나는 고개를 들어 히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순간 열었던 입을 다시 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뭔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죠.”

“뭔지 모르겠네.”

농담조로 너스레를 떠는 로하나를 보고 웃던 히스는, 순간 잠깐 멈칫했다. 아직 로하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평생을 함께한 친구 사이에만 알 수 있는 미세한 기척이었다. 익숙한 말굽 소리가 들렸다.

“흠…….”

“왜요?”

“아무래도 저희 식사는 미뤄야겠는데요?”

“바쁜 일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로하나를 보며 히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면서 시선을 돌렸다. 로하나는 그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R. D. 저택 현판 앞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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