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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23화 (12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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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시간이 길었다. 찰나가 길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로하나는 케이든을 먼저 황궁으로 보냈던 그날 아침, 이슬라가 건네줬던 고서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린족이 마물의 현신이 되는 경우, 엄청난 힘을 얻는 만큼 책임도 따른다. 특히 마물의 기운을 담은 검이나 활이 가지는 힘은 가히 사람이 아닌 존재까지 처단할 수 있다는 말이 내려오고 있다.>

가는 손목에 둘러진 피로 물든 칼라드리우스의 하얀 깃털 팔찌가 바람에 나부꼈다.

‘정말 통했네.’

로하나는 팔찌에서 하나하나 떨어 절벽 위로 날아가는 붉은 깃털을 보며 생각했다.

긴 생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겨우 한 번 사는 삶을, 라자르 덕에 두 번을 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옳은 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가 ‘필요’해서 데려오고, 다른 작전을 위해서 ‘죽게’ 하고.

본인은 싸움에서 쏙 빠진 채 그렇게 사람들을 장기 말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로하나 자신은 처음부터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아린족이면서도 마물을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여기 사람이 아니라서 마물을 다룰 수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도 그 정답은 모르겠지. 그 라자르조차도 로하나는 변수 밖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걸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조디 때에도, 오렐리아 때에도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을 죄었고, 히스까지 희생시키려 했을 때에 로하나는 생각했다. 라자르도 이 세상의 존재일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고서에 쓰여 있는 그 간단한 방법이 통하기만 한다면, 그녀만이 그 간단한 방법으로 라자르를 처치할 수 있었다. 히스나 바르디는 물론 케이든도 그건 불가능한 방법이었으니.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팔목에 깃털을 두르면서도, 신비한 장소인 이곳에서 그를 만나면서도 불안했다.

어쩌면 로하나도 라자르가 예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더 미래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조차 그의 계산에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도해야만 했다.

차가운 바람이 두 뺨을 강하게 스쳤다. 왜인지 모르게 방울져 흘러내린 눈물이 절벽 위로 흩뿌리듯 날려 올라갔다.

‘이제 되었다.’

알 수 있었다. 케이든은 이번에 이길 것이다. 원작과는 다른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혹시 모르지, 다른 우주에서는 이 이야기가 ‘원작’일지도.

‘실없는 생각을 다 하네.’

죽기 직전에는 이보다 더 생산성 있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영겁 같은 찰나를 겪으며 생각했다.

고마운 삶이었다.

케이든 필립 델클리프.

그와의 아주 짧은 한 해가 아름다웠다. 그만이 두 번의 삶에서 그녀를 배신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부터 좀 더 믿었다면 좋았을걸.’

아무리 여러 번 속았더라도 다시 시도해 볼 것을. 너무 긴 시간 그를 믿지 못했다. 끝까지 마음을 주지 않은 척했다.

사실은 이미 온 맘을 빼앗겼으면서도, 몸을 나누면서도 끝까지.

그가 묻지 못하는 것도, 감히 사랑 비슷한 말도 꺼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그에게 말해 준 적 없었다.

아닌 척, 그녀를 보내는 케이든에게 화까지 내어 가며 유세를 떨었지만. 어쩌면 끝까지, 그 순간까지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것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케이든이 그것을 알고, 그녀를 미리 보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고 나면 그녀가 비로소 그를 믿기 시작하지 않을까 하면서.

솔직하지 못했다.

‘많이 원망하려나.’

히스 옆에서 노프탈군과 함께 있지 않고 이런 행동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마치 처음 느끼는 고통 같았다.

‘너무 오래 담아 두진 말길.’

담아 두지 말길. 로하나는 이제 그것 말곤 바랄 게 없었다. 떠나간 사람을 담아 두는 건 마음 아픈 일이다.

꼭 같진 않지만 늘 혼자 남겨져 봤던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그저 오래 담아 두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때, 순간 뺨을 스치는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그리고 차가운 얼음 조각 사이사이로 기이할 정도로 불투명한 에메랄드색 물빛이 보였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익.

옆을 바라보는 그 순간, 라자르가 빠르게 흩날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당황한 것 같기도, 슬퍼하는 것 같기도, 사실은 이 모든 것을 다 예상하기라도 한 것 같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한 번 깜빡였다.

‘이제 그만 그들이 알아서 살게 두시죠.’

찰나의 차이로 라자르가 먼저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몸이 에메랄드빛 호수에 닿았다. 그의 모습이 천천히, 그러나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라보는 로하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의 몸은 사라지는 것 같아 보이기도, 아니면 그대로 정말 평범한 물에 빠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몸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과 그냥 정말 평범한 물에 빠진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공존했다.

‘사랑한다고 한 번이라도 말할걸.’

그렇게 로하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괜찮아.’

로하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의외로 평안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걸.’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그만하자.〉

다들 어쩜 그리 쉽게도 변했던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한 조각 기억 속에 한때 인생을 걸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기억 속 장면은 빠르게 장면을 바꿨다.

가을을 앞둔 여름날, 북부 원정을 다녀온 황태자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함께 돌아왔었다.

〈인사해.〉

바르디의 아무 걱정 없이 말간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오렐리아야.〉

참 쉬웠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으려고 했었다.

〈당신이 필요했어.〉

기묘한 소년의 목소리. 이제는 라자르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데려와야 했어.〉

새카만 머리카락 밑으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어쩜 다들 그렇게 날 이리저리 쓰려고만 했는지.

어쩌면 케이든의 계약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달랐다.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그 순간, 마주쳤던 그 눈빛이 매 순간 선연할 만큼 강력했던 그 사람은.

곧고 높은 코에 조각 같은 얼굴. 짙은 선을 따라 밝은 빛 옆으로 짙은 그림자가 얼굴에 져 있었다. 눈부신 은발에 상반되는 짙은 흑안.

그때부터 알았다. 그가 이상할 만큼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을.

지난 수많은 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꼭 전생에 죽었을 때와 같아서 로하나는 마음이 편했다.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택의 정원에서 그녀를 막아 세우고는 그렇게 말했다.

〈다만…… 제가 보내 드리게 해 주십시오.〉

그때부터, 잡을 생각조차 없이 전부 그녀 위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말을 할걸.’

눈물이 고였다. 온몸이 자꾸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말을 할걸.’

한 번이라도 딱 그 한마디를 할걸. 하루라도 더 빨리, 그와 함께할걸.

명분이니, 뭐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가슴이 이끄는 대로 따를 것을.

그때였다.

번쩍!

눈에 떠졌다.

주변은 고요했다. 이상할 만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실크 커튼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듯 내려와 있었다. 높다란 창문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새어 나왔다.

꼭 그때와 비슷했다. 여기는 하노버 공작가였다. 그것도 빙의한 직후부터 꽤 오랜 시간 살았던 로하나 하노버의 방이었다.

죽기 전의 환상인가 싶어서 로하나는 다시 한번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깨질 듯한 두통이 엄습했다. 그때와 똑같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죽었다면 다시 살아난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은데…….’

빙의도 어쨌든 다시 살아난 것이었기에 로하나는 속으로 실없는 농담을 하며 눈을 다시 감았다.

이번에 눈을 다시 뜨면, 이제는 정말로 편안한 쉼이 있을 것 같았다.

‘편안해?’

그때 마음속 목소리가 되울렸다.

‘정말로?’

아까까지 가슴 치며 후회하던 것을 애써 외면하던 걸 들켰다. 본심이 고개를 들자 마음이 아팠다.

‘아니.’

아니었다. 살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도 싶었다.

‘찾아올 것도 없이 이렇게 와 주니 좋으시겠어요.’

그럼 그는 특유의 여유 있는 미소를 짓겠지.

‘시간을 아꼈네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까는 분명 얼음 조각 속에서 정말 추웠는데. 이상할 만큼 따뜻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 순간, 로하나의 의식은 절벽에서 떨어져 에메랄드빛 호수로 떨어지는 시점으로 돌아왔다.

‘로하나!’

환상 같은 케이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칼라드리우스와 함께였다. 꼭 샤톤웰의 절벽에서 떨어졌다 올라올 때처럼. 그는 칼라드리우스의 위에 있었다.

그리고, 길고 큰 손이 그녀를 붙잡아 올렸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조금이라도 더 닿으면 온몸이 사라질 것이었다.

‘이젠 괜찮아.’

다독이는 목소리.

‘이젠 괜찮아.’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체온.

죽어가는 순간의 환상치고는 너무나 달콤했다. 그 대가인지 머리가 다시 깨질 듯 아파 왔다. 그리고 그때였다.

화악!

밝은 빛이 들어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로하나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옆에 따뜻한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다. 왼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리면 보이는 창가에는 수년간 보았던 커튼이 있었다.

‘아…….’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사람들의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전투의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보통의 일상 같았다.

아니, 일상보다는 조금 소란스러운가.

로하나는 천천히 몸에 힘을 주어 봤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곱은 듯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힘을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지만, 누가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눈보라 향기가 났다.

‘그’가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

로하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그때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눈보라 향기가 더 짙어졌다.

로하나는 아주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그에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순간 눈보라 향기가 진해졌다.

‘아직 여름인데.’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로하나는 손을 뻗었다. 그에게 닿은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서 안심이 되었다.

‘너무 지나친데.’

로하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흥분한 케이든의 목소리가 귓가에 왕왕 울렸다. 이내 주변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지나칠 만큼 해피 엔딩인걸.’

로하나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알았다.

아마 앞으로도 여태까지처럼 간단할 리 없다는 걸. 그러나 로하나는 밝게 웃었다. 이제는 그래도 괜찮았다. 다시 상처를 받더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괜찮았다.

이제는 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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