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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는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그때 이즈가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지금 전하를 보냈어? 어딜 가신 건데?”
히스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북쪽에서 나타난 칼라드리우스를 보고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설마.’
“히스!”
날카롭게 채근하는 목소리에 히스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로하나가 위험해. 아무래도 라자르 쪽으로 간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이즈의 옅은 눈동자가 심각한 빛을 띠면서 굳었다.
“전하가 지금 몸 상태로 거기에 가셨다는 거야?”
“전투를 우선 마무리한다.”
히스가 냉정함을 가장한 채 말했다.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이즈가 말하면서 시선을 움직였다. 시선이 돌아간 쪽에 익숙한 얼굴을 한 사람이 말에서 막 내리고는 그들에게 다가왔다.
“히스.”
진홍색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한가운데로 높게 묶은 이슬라였다.
그녀의 뒤로는 샤톤웰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슬라.”
히스는 존칭 따위는 생락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슬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를 올려다봤다.
“노프탈에 남아 있는 군대에게 서신을 보내.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라고 말이야.”
“‘그곳’이라니? 지금? 왜?”
황궁군이 아직도 서슬 퍼렇게 반격하고 있었다. 각 지방의 영주들도 제국에 소속된 아린족으로서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그러니 노프탈과 나머지 지역에서 군대를 뺄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황제가 죽었다고 해도, 버틸 사람은 버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치들이 더 많았다.
“그건 너무 위험해.”
“케이든이 거기로 갔어.”
“뭐?”
이슬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로하나.”
히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로하나가 거기 있어.”
그 순간, 이슬라의 얼굴에 무엇인가가 스쳤다. 그 ‘무엇’을 히스는 귀신같이 포착했다.
“어째서 로하나가 거기에 간 거지?”
바짝 다가온 히스가 이슬라에게 물었다. 이슬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저번에 고서를 줬어.”
“고서?”
“로하나 델클리프에게 따로.”
“무슨 고서인데?”
“아린족이 마물의 현신이 되는 경우, 엄청난 힘을 얻는 만큼 책임도 따른다. 특히 마물의 기운을 담은 검이나 활이 가지는 힘은 가히 사람이 아닌 존재까지 처단할 수 있다는 말이 내려오고 있다.”
이슬라가 빠르고 나지막이 책의 내용을 읊었다.
“아마도…….”
히스는 눈을 감았다 떴다. 로하나에게 특별한 계획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다른 존재도 아니고 ‘라자르’가 그 목표일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말렸을 것이다.
히스는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어진 손목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노프탈에서 수색대라도 보내게 지시해. 난 노프탈군에게 명령할 테니까 당신은…….”
“그래 알았어.”
이슬라는 재빨리 전서구를 보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바르디 렌트워스가 떠났다. 그리고 전쟁은 이렇게 카르크족이 이기고 있었다.
‘어쩌면 좋지.’
이슬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뭐가 또 있는 거야?”
그때, 히스가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이슬라에게 다시 물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서 중에 이상한 게 있었어.”
“그게 뭔데.”
이슬라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예언서라고 해야 맞겠다.”
히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런 전쟁이 나고 아린족, 그러니까 제국이 승리한다는 기록이야. 카르크족이 제국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배반을 했다는 식의 기록이었어.”
이슬라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어떻게 그게 역사서에 있는 거지?”
“이상하지. 통일 전쟁보다도 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돼서 우리 쪽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고 있었어.”
“그냥 우연이겠지.”
“그래.”
이슬라가 조금 소름 끼쳐 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해.”
이슬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예언서에 쓰여 있는 대로 이루어졌어. 그 대상만 반대였을 뿐.”
“그게 무슨 뜻이야?”
“리프 전투에서 카르크족이 크게 패했잖아.”
이슬라가 이어갔다.
“그런데 그 예언서에는 거꾸로 쓰여 있었어. 그리고 이번 황궁에서의 전투…….”
이슬라의 시선이 단상 위로 향했다. 두꺼운 천으로 덮인 황제의 시신은 유리 관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저 모습과 죽게 되는 과정조차 너무 똑같아.”
이슬라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이겠지만.”
히스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돌려 이즈와 갈레드를 불렀다. 이즈는 당장 케이든을 따라갈 기세였다.
“케이든은 노프탈 쪽에서 도울 거야.”
효율을 따졌을 때 그것이 옳았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즈가 강력하게 항의하는 것을 히스가 막았다. 히스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를 믿었다.
케이든은 해낼 것이다.
해내야만 했다.
“그게 전략상 옳아.”
그 말에 반박할 순 없었기에 이즈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잘못되시면?”
갈레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지금 우리가 간다고 돌아올 사람이 아니야.”
히스가 담담하게 진실을 짚었다.
“어서 자기 위치로 가.”
명령이라는 말이 없어도 눈빛이 다 말하고 있었다.
모두가 빠르게 흩어졌다. 히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전서구를 불러 메모를 썼다.
〈군대 총출격 중〉
놓아주자마자 전서구는 빠르게 동쪽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케이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그 누구도 서로에게 늦지 않길.
히스는 처음으로 기도하듯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케이든은 빠르게 달렸다. 마력을 사용하는데도, 속도가 예전같이 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달렸는데도 이제 리프를 겨우 지났다.
‘빌어먹을.’
케이든은 자신의 몸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 하고 고통에 찬 한숨을 쉬자 연달아 기침이 나왔다. 기침과 함께 피가 나오자 어이가 없어 욕도 나오지 않았다.
바르디에게도 당할 뻔했을 정도로 엉망인 몸 상태라는 걸 잊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그때 어떻게든…….’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힘이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힘이 필요한 순간에 이 모양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이렇게 되자고…….’
케이든은 마구 내달리려는 파괴적인 생각을 어떻게든 멈추려 심호흡을 했다. 흥분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침착해야 할 때였다.
케이든은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을 되짚었다. 칼라드리우스가 히스 곁에 있다가 다시 사라졌던 것은 분명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칼라드리우스가 그런 이상한 행동을 취했을 리 없다.
폐에 피가 차기라도 하는 것인지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이어졌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로하나를 만나, 그녀를 도울 수 있다면……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케이든은 식은땀에 젖은 은발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고삐를 다시 강하게 말아 쥐었다. 정신은 놀랄 만큼 또렷했다. 이렇게까지 또렷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가자!”
말이 큰 소리를 내면서 달렸다. 바닥에 서서히 얼음이 깔리고 있었다. 사시사철 겨울인 그곳.
라자르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그녀가 라자르를 공격하기 위해 선택했을 곳은 ‘그 절벽’이었을 것이다.
칼라드리우스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고, 만약 그녀가 무모한 행동을 했다면 유일하게 투신이 가능한 곳도 그쪽이었으니까.
케이든은 그녀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지난날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히스의 말이 맞았다. 마력을 가르쳐서는 안 됐다.
히스의 말이 맞았다. 마력으로 재웠던들 의식을 되찾으면 그녀가 순순히 남부의 외곽으로 갈 리가 없었다.
모두 히스가 맞았다.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그렇게 무르게 행동했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경계심을 풀까 싶어서.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으로 봐 줄까 싶어서.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했다.
두 손을 묶어서라도 안전한 곳에 두고 보호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제 욕심에 그녀를 결국 이렇게 위험에 빠트렸다.
‘돌이킬 수 없다면.’
돌이킬 수 없다면, 자신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 진심만큼은 온갖 후회가 진흙처럼 뒤엉키는 가운데에도 유리알처럼 투명했다.
그때 하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한 그의 시선에 히스의 전서구가 들어왔다.
〈군대 총출격 중〉
간단하게 휘갈겨 쓴 필체가 히스도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케이든은 불꽃을 만들어 메시지를 태워 없애고 새 메시지를 휘갈겨 썼다.
〈협곡으로〉
전서구는 새하얀 하늘을 향해 빠르게 날아 다시 수도로 향했다.
케이든은 조금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히스가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케이든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왼손으로 오른 손목의 맥박을 짚었다.
아드레날린이 폭주한 덕인지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그만큼 피가 빠르게 빠져나가겠지만……. 케이든은 다시 속도를 냈다.
‘로하나.’
아직 끝이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구할 거야.’
케이든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를 포기하지 않았던 어린 소녀를 떠올렸다. 어린 로하나는 아무 이유 없이도 그를 구했었다.
이번엔 그의 차례였다.
죽어서라도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반나절을 더 달렸을까. 공기가 달라졌다. 순식간에 얼음을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상처를 에는 고통이 차라리 반가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직 그곳에 도착하려면 더 가야 했다.
‘어째서 찬바람이?’
케이든은 짙은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