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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21화 (1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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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디는 마지막 순간에 휘청거리는 케이든의 몸을 느꼈다. 케이든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는 늘 그런 식이었어.’

바르디는 조용히 생각했다.

‘마음이 약했지.’

바르디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제대로 관통한 그 얼음은, 케이든이 아닌 무언가가 그를 지키려고 뿜어낸 것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케이든의 안에서 쌓여 온 분노일 수도. 부친이나 주변 인간들이 죽였던 더스틴이나 유리에 델클리프의 무언가였을 수도.

아니면, 그냥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면서 튀어나온 기제에 말도 안 되는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정말로 케이든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 시야의 기억이 그걸 증명했다.

‘멍청한 형.’

알았다. 그때 제 부친이 그를 지하 감옥에 가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부추기기까지 했었다. 그래도 선황제, 조부에게는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천진한 척을 했다.

늘, ‘척’을 하고 살았다.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을 때를 제외하곤.

케이든의 피를 보게 될 것을 기대할 때가 유일하게 진짜 심장이 뛰던 때가 아니었을까. 그 정도로 그 존재가 싫었다.

‘차라리 내가 혼혈 왕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어쩌면 아무 문제 없이 모든 일이 물 흐르듯 흘러갔을지도 몰랐다. 아르드골드 제국이 카르크족의 난동에 이렇게 난도질당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모두가 제자리에 맞춰 살았을 것이다.

‘내가 내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의 부친이 늘 그렇게 말했듯이. 그의 조부가 늘 그렇게 가르쳤듯이.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다. 다른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음에도, 지금 자신과 함께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의 단 한 번의 공격에, 이렇게 허무하게. 이렇게 쉽게.

‘로하나.’

바르디는 정말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녀가 그를 다른 이유로 붙잡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가지 말아요.〉

굳이 남부로 휴가를 가지 말라며 붙잡았던 그 소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 애는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바르디는 그렇게 묻는 대신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택했다.

〈내가 걱정돼?〉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정말 이 땅에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러자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네. 걱정돼요.〉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했겠지. 알면서도 그녀가 좋았고, 그녀의 마음을 끝내 외면하고 싶었다.

케이든을 괴롭히려는 방침이었을 뿐이다. 오렐리아는 잠시 취할 여자였다. 그런데 로하나는 너무 태연했다. 늘 그렇듯, 침착했다.

그게 케이든하고 너무 닮아 견딜 수가 없었다.

끝까지 가 보자는 심정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래도 그녀가 설마 정말로 케이든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바르디의 푸른 눈이 빛을 잃으며 아주 옅은 눈물을 머금었다.

너무 늦은 생각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그 생각을 하면서 바르디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 갑작스러운 굉음을 듣고 순간 정신이 들었다. 케이든은 화들짝 유리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살 난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히스.

그리고 이즈였다.

“전하!”

이즈가 다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화살이 오가고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대연회장을 울렸다.

이즈가 온 힘을 다해 치유 마력을 쓰면서 그를 부축했다. 기껏해야 인간이 낸 상처였다. 케이든은 빠르게 정신을 회복했다.

“히스가 왜 여기 있지? 노프탈은?”

“칼라드리우스가 합세했어요. 샤톤웰까지. 노프탈은 괜찮을 겁니다.”

이즈가 대답하면서 그에게 검을 건넸다. 그가 쓰던 검은 아니지만, 케이든은 제 것처럼 검을 다루었다. 불과 얼음으로 밀고 나가는 마력 부대를 몇 개의 황궁 부대가 막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황제가 없었다.

“이즈, 넌 가서 인질들을 수습해. 바깥부터 황궁을 진압한다.”

“네!”

이즈가 다시 변모하여 부서져서 아예 벽이 없어지다시피 한 유리창 너머로 사라졌다.

“히스!”

히스가 황궁군 여럿을 한꺼번에 해치운 뒤 뒤를 돌아보았다.

“샤톤웰은?”

“샤톤웰 깃대까지만 보고 왔어.”

히스가 화살로 한 명을 찍어 없애며 대답했다.

“칼라드리우스는 거기 있고?”

히스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케이든이 긴 검으로 그대로 둘을 베면서 소리 질렀다. 얼음이 적군 사이를 지나가면서 핏방울조차 얼어붙었다.

칼라드리우스 바로 옆에 로하나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연회장은 그대로 카르크족이 점령했다.

‘일단 한숨을 돌려도 되려나.’

케이든은 엉망이 된 잔해 속에서 바르디를 찾아내었다. 그는 드디어 평화를 찾은 듯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다.

가슴에는 아직도 녹지 않은 얼음 송곳이 박혀 있었다.

가끔, 마력자에게는 의지를 넘어서는 마력이 나타난다고도 했다. 그것이 위험할 수도 있어서 꼭 제대로 된 훈련이 필요한 것이었고.

물론 카르크족을 배척하기만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훈련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고, 그렇게 서로에 대한 오해는 심각해져만 갔다.

케이든의 의지와 다르게 마력이 발현된 것은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없었다.

‘어째서 지금.’

케이든은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금 저 정도의 마력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로하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칼라드리우스와의 소통은 알 수가 없다고. 대놓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니라며. 그는 제 의견을 따르기도, 따르지 않기도 한다 했다.

〈생각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게 많아요.〉

로하나는 라자르와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을 때도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마력을 잘 다룬다고 해도, 마력을 너무 믿지도, 그렇다고 의심하지도 말아요.〉

케이든은 씁쓸하게 바르디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얼음 송곳을 끄집어냈다. 두꺼운 갑주와 가죽, 그리고 붉은 실크를 꿰뚫은 얼음 송곳은 그의 몸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음에 붙은 피는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다.

“대단하네.”

히스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담아 말했다.

“뭐가.”

“악스톤이 한 말이 맞았어.”

히스가 대답했다. 그는 제 부친을 꼭 이렇게 칭하곤 했다.

“어떤 게.”

“망설임이 없으면 이길 거라는 거.”

그 대답에 케이든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딱 하고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자 이내 병사들이 다가왔다.

“어쨌든 황제의 시신이다. 정중하게 수습해 놓도록 해.”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들것에 싣고 대연회장 끝의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수습하는 것이 옳았다. 다른 곳에는 마력 공격으로 화려했던 수많은 샹들리에가 모두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케이든의 부츠에 박살 난 유리 조각과 사람들의 시신, 무기들이 밟혔다.

갈레드와 이즈가 이내 황궁을 정리하고 나타났다. 전투는 놀라울 만큼 쉬웠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싸울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즈는 그 와중에 케이든의 무모한 계획이 무모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설령 여기에서 케이든이 죽었어도 그들은 계속 싸웠을 테지만, 황궁군은 아니었다.

바르디를 없애든, 진압하든, 무력화하는 것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설령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도 도박을 걸 만큼, 그렇게 좋은 방법이었다.

전서구의 몸 곳곳에 까맣게 그을린 자국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빠르게 실내로 날아들었다.

“보고해.”

케이든이 냉정한 목소리로 이즈와 갈레드에게 말했다. 케이든은 빠르게 암호화한 글을 쓰며, 이번에는 히스에게 물었다.

“노프탈 상황은 아직 모르는 거지?”

“아직 내 전서구가 도착하지 않았어.”

칼라드리우스와 샤톤웰이 합세했다는 대답을 하면서 히스가 말했다.

케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날아든 전서구 중 하나를 노프탈로 날려 보내며 물었다.

“로하나는 노프탈에 있는 건가? 대피하라고 말려도 소용없었겠지?”

그때, 히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케이든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상황인지를 짐작했다.

“무슨 일이야.”

“중간에 사라지셨어.”

심각해진 분위기에 이즈와 갈레드가 조금 주춤했다.

“너흰 가서 부대를 정렬해. 상황을 통제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로 보고하고.”

“전하, 일단 집무실로 옮기시는 편이. 여기는 사방으로 공간이 뚫려 있어서 너무 위험합니다.”

갈레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케이든의 흑안은 히스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중간에 사라졌다는 게 언제를 말하는 거야.”

“달이 뜨는 순간, 노프탈에 다 도착해서였어.”

어렴풋한 새벽빛이 그들 사이를 비췄다. 히스의 옅은 눈동자에는 망설임과 단호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왜 말리지 않았지?”

서늘한 목소리였다. 분노에 가까웠다.

“칼라드리우스가 아직 노프탈에 있는 건가? 그가 로하나와 붙어 있지 않다는 거야?”

칼라드리우스마저 없었다면 그녀를 감금해서라도 전쟁에 휘말리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하나가 사라지고도 칼라드리우스는 우리와 싸웠어.”

히스가 불안한 목소리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러다가 중간에 사라졌다가 돌아왔고.”

“사라졌다가 돌아왔다고.”

케이든이 병사를 불러 말을 가져오게 시켰다.

“북쪽에서 나타났었어. 칼라드리우스가.”

히스가 말했다.

“설마 그쪽이랑 관계가 있는 건 아니겠지?”

사시사철 겨울인 그곳. 라자르가 늘 ‘존재’하는 그곳이 북쪽에 있었다. 히스는 설마 하는 목소리로 불안하게 말했다.

그리고, 케이든은 순간 기억해 냈다. 자신이 얼마나 상세하게 그곳을 설명했었는지. 로하나가 은근히 꼬치꼬치 그곳에 대해 물었던 것도.

케이든은 히스의 팔목을 바라봤다. 검은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바르디를 쳐다보며, 오렐리아와 조디를 떠올렸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게 된 순간, 케이든은 바로 병사가 가져온 말을 타고 달렸다.

“케이든!”

“전하!”

뒤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케이든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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