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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20화 (120/125)

120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에 달이 떴다. 히스는 하늘을 간간히 확인했다. 칼라드리우스의 위세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공중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황궁군에겐 없었다. 아니, 카르크족도 그 정도의 공격을 막기는 힘들 것이다. 마지막 전투는 치열했지만 전세는 확실히 유리했다.

히스는 확신했다. 노프탈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성 밖에서는 아직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얼마 후에는 칼라드리우스가 공중 공격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투원들이 서로 섞여 버렸다.

‘빨리 끝내지 않으면, 사상자가 너무…….’

그나마 칼라드리우스가 있기에 달아나거나 목숨을 잃는 황궁군이 많은 것이 불행 중에 다행이었다. 그때, 프란츠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히스!”

히스는 프란츠가 쳐다보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깜깜해진 하늘에 칼라드리우스가 그들의 곁으로 날아와 가만히 떠 있었다.

“뭐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말하려는 것 같은데요!”

프란츠가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때 칼라드리우스의 오팔색 눈동자가 번뜩하더니 북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북쪽.

히스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북쪽으로 멀어지는 칼라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날개와 꼬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마치 물고기 지느러미같이 유연하게 하늘을 유영하며 달빛에 반짝이는 것이 로하나의 뒷모습 같았다.

‘로하나, 설마.’

히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R. D.의 수장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런 기색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동요할 것 없다!”

히스가 크게 고함쳤다. 이에 카르크 군대가 호응했다. 케이든은 케이든대로, 로하나는 로하나대로 싸우고 있었다. 여기 성만큼은, R. D.의 수장이 된 그가 지켜야만 했다.

탕! 소리를 내면서 마력을 가득 실은 화살이 날아갔다. 황궁군의 수장 중 하나가 타고 있던 말의 머리가 날아갔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우리 몫이니까.”

히스의 말에 프란츠가 나머지 R. D.에게 명령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이기고 지켜야 했다. 히스는 그것만이 자신이 모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명심했다.

굳이 더 살 수 있으면서도 케이든에게 목을 칠 것을 명령하던 부친, 악스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망설임이 오지 않을 때, 사람은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병세로 잔뜩 목소리여도 그에게는 강단이 있었다.

히스는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너도 그때가 되면 자연히 네 몫을 할 수 있을 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던 그와 케이든에게 그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날아간 화살이 이번엔 포탄을 날리려던 황궁군에게 가 꽂혔다.

“전쟁을 끝낸다! 통일 전쟁은 오늘 끝난다!”

히스의 말에 R. D.를 비롯한 노프탈 군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노프탈 성의 문이 열리려고 했지만 히스가 막아 세웠다.

그때, 하늘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이즈!”

새카만 새의 모습인 이즈가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왔다. 재빨리 그녀를 제 말로 끌어올리면서 히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동문과 인질 탈환에는 성공했어. 그 대신 전하께 시간이 없어.”

“뭐?”

“전하께서 인질이 되셨어. 황궁군을 분산시키느라.”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대로 날아오는 화살이 말의 몸에 꽂혔다. 그러나 이즈는 화살을 능숙하게 빼내고 그대로 치유 마력을 사용했다. 넘어질 뻔한 둘은 가까스로 다시 균형을 잡았다. 히스는 말고삐를 단단히 잡으며 되물었다.

“그럼 케이든 혼자 황궁으로 걸어 들어가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이즈가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랑 나만이라도 일단 돌아가자. 너 하나쯤은 내가 데리고 갈 수 있어. 전하를 그대로 죽게 할 순 없잖아.”

“그런 명령은 없었고?”

“명령 같은 소리 할래? 정말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야?”

이즈가 소리쳤다. 날카로운 눈동자에는 제정신이냐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콰과와왕!

다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칼라드리우스!”

카르크인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다시 나타났다.

“칼라드리우스가 여기 없었어?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은?”

칼라드리우스는 마치 마력을 사람이 직접 쓰는 것처럼 정교하게 황궁군을 노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공작 부인은, 히스!”

이즈가 어깨를 거칠게 잡으며 소리쳤다. 히스는 짧은 순간이지만 최선을 다해 생각했다. 칼라드리우스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즈는 지금 그쪽에 추가 부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프란츠!”

대답 대신 히스가 고함쳤다. 서쪽을 담당하던 프란츠가 한참 지나서 말을 몰고 달려왔다.

“나와 1소대만 수도로 간다. 아무래도 우리 지원이 필요한 모양이야.”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렐리아가 없을 때도 충분히 부수장 역할을 했으니, 여기에서도 할 수 있겠지?”

“칼라드리우스가 돌아와서…….”

순간, 폭발음이 들려 셋은 모두 몸을 숙였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프란츠가 그 와중에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십시오.”

그럼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히스가 망설이는 그때였다. 동쪽 너머에서 익숙한 나팔 소리가 들렸다.

“히스!”

이즈가 외쳤다.

“이슬라.”

샤톤웰이었다. 그때, 보라색 끈을 단 전서구가 날아왔다. 이슬라의 편지에는 반역군을 처리하고 노프탈 영지로 입성한다는 짤막한 메모가 쓰여 있었다.

히스는 결단을 내리고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주변의 부대에게 고함치듯 명령했다.

“1소대는 황궁으로 집결한다. 거기에서 갈레드 부대와 합류한다!”

히스가 명령을 마치자마자 이즈가 히스를 잡아 올리면서 순식간에 새로 변모했다.

“우리라도 일단 빠르게 가자고.”

화약으로 흐려진 하늘을 뚫고 둘은 먼저 황궁으로 향했다.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침이 천천히 다가오는 그 순간, 케이든은 그대로 그의 손을 막아 냈다. 얼음의 마력이었다. 늘 그를 지켜 주던 마력은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확실하게 그를 지켰다.

마력에 의지가 있는 것처럼 단호한 발현이었다.

마물은 물론 마력도 사람의 의지나 능력으로 조절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카르크족은 늘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곤 했다.

그런 ‘위험한 존재’라고 쉼 없이 학살당하고 핍박당해 왔던 것이 카르크족의 역사였다.

순식간에 본능적으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얼음 송곳이 그대로 바르디의 가슴을 꿰뚫었다.

바르디는 짧은 찰나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케이든의 얼굴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참 내.’

바르디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오늘내일 누가 죽느냐의 싸움 중이었는데.

‘정말 살려 둘 생각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케이든이 그를 붙잡는 힘이 느껴졌다. 그의 피와 자기 자신의 피가 섞인 웅덩이가 질퍽했다.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으로 그대로 몸이 미끄러졌다.

“폐하!”

“당장 가만히 있어!”

케이든이 고함을 질렀다. 다가오려던 수많은 병사들이 어이없게도 겁을 먹고 다가오지 못할 정도였다.

죽게 두진 않을 것이다. 죽지 않고 살려 두어 두 종족의 미래를 보게 할 것이다.

치유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왜인지 얼음 송곳이 도무지 그에게서 빠져나가려 하질 않았다.

“왜 이래…….”

바르디가 어이없다는 듯 비실거리며 물었다.

“진짜…….”

“닥치고 있어.”

예뻐서도, 안타까워서도 아니었다. 교활하게 말하자면 그를 살려야 누구든 새로 황위에 오를 자에게 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고,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황제는 인질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론.

“로하나…….”

그때, 바르디가 입을 열었다. 케이든은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다.

“로하나를 정말로 좋아해?”

설마 이것이 그의 마지막 질문인가. 허탈해지면서도 기가 막혀서 케이든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두 발자국 앞에 서 있었다.

“그래.”

바르디가 잠이 들듯 조용히 말했다.

“지금에야 알 것 같네.”

무얼 알 것 같다는 걸까. 묻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는 허망하게도 흐려졌다.

“폐하!”

잔뜩 창과 방패를 세우고 긴장한 부대는 지휘 체계를 잃은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주 짧은 순간,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기도를 올렸다. 망자가 가는 길이 그래도 편안하길. 누구라도 가는 길마저 괴롭다면 너무 불행하니까.

착각이든 뭐든 그가 좋은 기억만 가져가길 바랐다. 아주 잠깐은, 잘 지냈던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가슴이 시렸다.

“폐…… 폐하께서 서거하셨다!”

먼발치에서지만 눈치를 챈 병사들이 하나둘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머지않아 그들이 공격해 올 것이다.

케이든이 그제야 제 몸이 성치 않은 걸 기억해 냈다. 그래서 바르디에게 치유 마력이 듣지 않은 걸까.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케이든은 생각했다.

‘피를 보았지만, 그래도 급한 불은 껐네.’

웅성거리는 병사들이 차차 거리를 좁혀 왔다. 폐에 피나 수분이 차는 것인지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아까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동문 점령과 인질 탈환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심지어 바르디마저 이렇게 되었으니 다 되었다.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었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제야 바르디가 왜 로하나에 대해 물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 애도 그거 하나만큼은 진심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케이든은 바르디를 바닥에 둔 채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힘을 줬다. 최소한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갑자기 와아, 하는 함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쩡!

순식간의 폭발이었다.

와장창창 엄청나게 연쇄적인 소리를 내며 대연회장의 유리가 그대로 박살 났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유리창 너머로 샛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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