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정말 내가 이 정도 공격으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나?”
단검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얼음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하나가 차고 있던 새하얀 팔찌 위로 새빨간 피가 흘러들었다. 칼라드리우스의 깃털로 만든 팔찌였다.
로하나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왼쪽에 차고 있던 장검을 휘둘러서 공간을 확보했다. 라자르가 여유 있게 몸을 피했다.
“사람의 공격으론 그 대단한 케이든조차도 나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잘 알잖아.”
몇 번의 공격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로하나의 거친 숨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채웠다. 그에 반해 라자르의 호흡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에게 공격하는 이 모든 행동은 막막했고,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 로하나는 그래도 무의미해 보이는 전투를 계속했다. 그리고 끝내 절벽 끝에 섰다.
‘얼음 절벽이라니.’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너무 식상한걸.’
로하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로하나와 완전히 같은 눈높이가 된 라자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꿈이면 어떨 것 같아?”
로하나가 눈동자를 치켜떴다. 거친 숨을 내쉬는 그녀의 입술이 많이 말라 있었다. 쉰 목소리가 나왔다.
“그런 말로 나를 동요시키려는 거야?”
라자르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나라면 걱정될 것 같은데……. 말이 안 되잖아. 책 속으로 들어왔다니.”
로하나는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다시 가깝게 다가온 라자르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주먹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가깝게 선 두 존재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설령 네가 날 어떻게 할 수 있다 쳐도 말이야…….”
속삭이는 목소리가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서 왔다 갔다 했다.
“내가 어떻게 되면 너에게는 어떤 일이 생길까, 로하나? 아님 그때 그 이름으로 불러줘?”
로하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등을 꼿꼿하게 세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 15년, 아니 그 지난 삶에서도 이렇게까지 똑바로 선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신기할 만큼 마음이 평온했다.
해야 할 일을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걱정 안 해.”
“왜?”
“네가 정말 나를 꿈에 가두어 놓은 거라면…….”
로하나가 천천히 손을 들어 라자르의 어깨를 쓸었다.
“지금 이렇게 놀라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노랫소리.
라자르는 그런 소리를 처음 들어 보았다. 로하나가 늘 케이든이나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그 소리’를 설명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얼음을 쪼개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고요하기만 했던 이 장소에 눈 폭풍이 몰아쳤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도 전에, 로하나의 미소만이 라자르의 눈동자에 비쳤다.
그리고 그 순간, 로하나가 라자르의 손을 붙잡았다. 아귀힘이 이전과 달랐다. 그녀의 손목에서 피에 물든 새하얀 깃털이 바람에 휘날렸다.
이상했다.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새하얀 깃털이 감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붉은 핏자국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깃털.’
미친 듯이 높은 음역의 소리에 라자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탁. 탁.
로하나가 몸을 돌렸다. 그녀의 발이 바닥을 내딛는 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그리고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그대로 둘은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럴 리가.’
라자르가 어이가 없어 한탄을 하기도 전에, 절벽 아래의 깜깜한 어둠이 둘을 삼켰다.
*
넓디넓은 대연회장에는 아무런 장식품도 없이 왕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직 그 아래의 붉은 카펫만이 여기가 왕의 자리라는 듯 위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카펫만큼 붉은 피가 새하얀 대리석 위로 작은 웅덩이를 만들며 천천히 퍼져 나갔다.
병사들이 모든 벽을 둘러싸고 있었고, 왕좌에는 바르디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케이든이 온몸이 결박된 채 끌려와 바닥에 앉혀져 있었다. 심각해 보이는 상처에서는 피가 꽤 빠른 속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수의 황궁군이 집결했기 때문에 케이든은 생각보다 많은 전투를 치러야 했다.
제아무리 그라도 한계가 있기에 군부대를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가 있었다.
“세상에, 무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바르디는 믿을 수가 없었다. 깔끔하게 올린 적갈색 머리카락 밑으로 빛나는 푸른 눈이 사지가 결박되어서 들어온 케이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병력을 대동해야만 하는 모양이지?”
벽 앞에 여러 겹으로 서 있는 병사들을 보며 케이든이 피식 웃었다.
“결박했다곤 해도, 네가 무슨 요술을 부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바르디가 여전히 왕좌에 앉은 채 그를 굽어보면서 말했다.
“난 겸손한 사람이야. 너같이 오만해서 목숨을 이렇게 내다 버리진 않는다고.”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이제 내가 네 목을 치면 되는 건가?”
“그걸 나한테 물어서야 쓰나.”
바르디는 시종일관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여유로운 케이든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들끓는 걸 느꼈다.
늘 저런 식이었다.
어릴 때도 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었고. 늘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식이었다.
조용히, 물러나 있을 거야.
태도만 그렇게 하면서 결국 하는 행동을 보면 이렇게 모두의 뒤통수를 쳤지.
“악스톤까지 없애 가면서 우리 눈에 들려고 노력했던 자가…….”
악스톤의 이름에 케이든의 눈썹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이 지경까지 올 것이면 그 훌륭한 수장의 목은 왜 쳤을까.”
케이든은 속으로 그를 떠올렸다. 병으로 죽어 가는 중에도 그는 ‘정확한 때’를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이왕 갈 목숨이니, 그 ‘때’까지 안전할 수 있도록 케이든 네가 당신의 목을 치라고.
케이든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 ‘때’가 뭐였는지 알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그런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 생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 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노프탈을 부강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어떤 일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를 다시 만났다.
“로하나 때문인가? 못 말리는 로맨티시스트라서?”
바르디가 물었다.
케이든은 조용히 상황 파악을 하면서도 그가 하는 질문에 제 스스로도 다시 질문했다.
‘로하나 때문이냐고.’
“아니.”
아니었다. 로하나 때문이 아니다. 로하나 덕분에 알아낸 것뿐이다. 맞는 ‘때’를 자신이 무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빠른 부정에 바르디가 의외라는 듯 입을 쭉 내밀고 눈썹을 치켜떴다.
“아니야?”
“넌 그런 모양이지.”
케이든이 물었다. 바르디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도, 다른 방법을 택할 수는 없었을까. 그들의 선황제보다 악수를 둘 것은 없지 않았는가.
“난 그저 모두가 있던 자리 그대로 돌아가길 바랄 뿐이야.”
“거기에는 카르크족을 정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고?”
“너도 혼혈이니까 알 것 아냐. 그런 위험한 힘을 가진 것들을 다루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너에게 더 설명할 건 없을 것 같군.”
케이든이 제 말을 자르자 바르디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건방진.”
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검을 꺼내 들었다. 푸른 날의 빛이 번뜩였다.
“힘을 내 보여. 네가 얼마나 괴물 같은지 보이라고. 어설프게 밧줄 따위에 묶여 있는 것처럼 굴지 말고.”
“그렇게 해서 여기 있는 네 군대가 너를 도우면 기분이 좀 나아지나 보지?”
케이든이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폐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서야.’
케이든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만 앉아 있어도 된다는 소리였다.
“폐하, 지금 동문 쪽에, 아니 그보다 감옥 쪽에서 카르크족의 습격이……!”
그러다가 보고하던 자는 입을 턱 막았다.
“이렇게 병사들로 진을 칠 정도로 무서웠으면 나를 더 다치게 했어야지.”
안 그래도 새하얀 그의 얼굴은 피를 많이 잃어서인지 더 창백했다. 그럼에도 붉은 입술은 호선을 그렸다. 두꺼운 팔이 그대로 바르디의 몸을 뒤에서 결박했다.
“하…….”
바르디가 병사들을 저지시키며 한탄을 했다.
“폐하!”
“조심해 새끼들아!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러나 바르디는 겁을 먹으면서도 케이든의 힘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르디의 발이 어딘가에 미끄러졌다. 조금 더 키가 큰 케이든이 그의 목과 팔을 결박하며 뒤에서 끌어올리다시피 안고 있었는데 발밑으로 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있던 것이다.
“카르크족도 피가 흐르는 인간이기는 한 모양이네.”
바르디는 처음으로 그에게 허풍을 떨어 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이제 내 목을 그을 건가?”
“그럴 리가.”
케이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너도 살아남아야지.”
바르디가 힘껏 벗어나려고 힘을 썼으나 어림도 없었다.
“두 족속이 어쨌든 같이 살려면…….”
케이든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누굴 죽인 역사 위에서는 어렵지 않겠어?”
낮은 욕설과 함께 케이든이 속삭였다.
“살리겠다고.”
사람은 극도의 긴장과 피로 상태에선 상대가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여도 방심하게 되어 있다.
바르디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그럼. 외롭게 살아야겠지만.”
케이든이 더더욱 팔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허풍이다.’
바르디는 생각했다. 저 정도 피를 흘리고 괜찮을 ‘인간’은 없다. 확실히 케이든은 ‘버티고’ 있었다. 그의 성격을 익히 알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본인의 퇴로는 작전에 넣지도 않았겠지.’
히스라는 작자가 보이지 않았던 걸 보면, 아마 최악의 경우 그에게 황위를 넘기려는 심산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한테도 아직 승산이 있다.’
치명타가 아니어도 괜찮다. 아주 약간의 손상만 더 가할 수만 있어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 새끼는 나를 죽일 생각이 없어.’
바르디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게 우리의 근본적 차이지.’
시간을 보내자.
얼마나 흘렀을까.
대치 상태가 계속되었다.
피 웅덩이의 크기를 보면서 바르디는 시간을 가늠했다. 그리고 순간, 바르디는 쓰러지는 척 몸에서 주춤 힘을 뺐다. 마치 목이 졸려서 기절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은 극도의 긴장과 피로 상태에선 상대가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여도 방심하게 되어 있다.
역시나 케이든의 팔에서 미묘하게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바르디는 재빨리 제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갔다. 항상 만일을 대비하여 숨겨 둔 독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