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18화 (118/125)

118

“히스.”

노프탈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지막하지만 경계심이 가득한 로하나의 목소리에 히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로하나가 하늘로 눈짓을 하고 있었다. 칼라드리우스였다. 그는 그들과 꽤 가깝게 날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로하나는 칼라드리우스가 너무 눈에 띌 것이라고 걱정하며, 그에게 아주 하늘 높이 있을 것을 명했다 했다.

그래서 한동안 보이지도 않던 칼라드리우스가 갑자기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로하나의 표정은 하나를 의미했다.

위험해.

그리고 그 순간, 뭔가가 귓가에 빠르게 울렸다. 눈으로 인식하기도 전이었다.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로하나!”

피싱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들었다. 화살 깃이 붉은빛이었다. 황궁군의 공격이었다.

노프탈에 다 도착해 가던 시점에서 받은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히스는 놀란 나머지 로하나를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로하나는 가까스로 화살을 피하고 제 활시위를 들어 팽팽하게 당겼다.

‘이런.’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샤톤웰에서 황궁군 쪽으로 넘어선 세력이 있었다는 이슬라 여왕의 전언이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히스!”

히스가 어마어마하게 강한 흰빛으로 감싼 활을 당겼다 놓는 순간 로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시끄럽고 소란스러워서 그녀는 고함을 치듯 히스를 불렀다.

“무조건 조금만 버텨 봐요!”

“당연하죠!”

“칼라드리우스가 도와줄 거예요!”

당신이 있으면 당연히 그렇겠지? 히스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당연한 소리를 굳이 하는가 생각하는 순간, 히스의 뇌리에 다른 생각이 스쳤다.

‘설마.’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가 지금 혼자 어디로 가려는 건가.

로하나는 조금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말의 머리를 돌렸다. 찰랑이는 긴 머리카락이 휙 흔들리면서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 통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로하나!”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따라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펑!

서해안 습격이 있을 때 들렸던 그 소리였다. 칼라드리우스가 황궁군 쪽으로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대장. 지금 치고 들어가야 합니다.”

프란츠가 바짝 붙어 오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도 날카로운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히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소란 중에도 그녀가 보이던 침착한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녀의 선택이었다.

히스가 그녀가 마력을 배우는 것에 반대하자 케이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선택이야. 우리가 낄 수 있는 여지 같은 건 없어.”

그땐 그가 그녀에게 마음이 없어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정확히 반대였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열 정리해. 칼라드리우스까지 함께하니까 걱정할 것 없고.”

“걱정은 전혀 안 합니다.”

프란츠가 대답하며 먼저 말을 몰아 앞서 나갔다. 히스도 마찬가지로 속도를 냈다.

콰과과아아아앙!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렸다. 곧 숲을 지나면서 능선 너머로 노프탈이 보였다. 노프탈 성벽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제발 무사히만 돌아오세요.’

히스가 엄청난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황궁군의 목을 베면서 생각했다. 선혈이 그대로 튀었지만 그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당신이 돌아올 자리를 우리가 만들어 놓을 테니.’

완전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

달빛이 밝았다.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가 울릴 정도로 바닥은 딱딱했다. 이 여름에 차갑게 얼어붙은 바닥이라니.

케이든이 익히 설명해 줬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케이든이 솔직했던 것에 비해 자신은 제대로 털어놓지 않았던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하는 수 없었다.

‘케이든, 당신도 날 한 번 어마어마하게 속였잖아요.’

농담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사뭇 가볍게 생각하며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되는 몸을 풀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이번에 나 혼자 돌발 행동을 하는 것도 한 번은 괜찮은 거예요.’

라자르가 항상 ‘존재’한다는 이곳. 언제나 겨울이라는 이곳에서 케이든과 히스는 그를 만나곤 했다고 했다.

‘존재’한다고는 해도 만나 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보통 소년의 모습으로 있다는 것까지. 그때 라자르를 만나야만 했어서 조디 사건이 터졌는데도 로하나를 두고 다녀와야 했다고, 케이든은 미안해하며 설명했었다.

그러나 주위는 조용했다. 다만 얼음과 눈에 반사되는 달빛에 주변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칼라드리우스에게 절대로 노프탈을 지키라고 이르고 멀어진 터라 로하나는 오랜만에 완전히 혼자였다.

기묘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시간이 멈추는 것 같은 고요함이 기이했다.

‘마력으로 불이라도 조금 피워야 하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 순간, 오랜만에 듣는 소년의 목소리에 로하나는 펄쩍 뛸 만큼 놀랐다. 그래도 다행히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낭랑한 목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이야.”

라자르였다.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붉은 눈만큼은 어른의 눈이라 소름이 끼쳤다.

“뭐가. 얼마 전에도 히스를 그렇게 하면서 만났잖아.”

“아닐걸? 이 목소리로 만나는 건 오랜만이잖아.”

지겨운 소리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로하나는 온몸의 신경 세포를 깨웠다. 이제 긴장해야 할 때였다.

“여긴 왜 왔어?”

“아무래도 네가 하는 짓이 영 이상해서.”

로하나가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그는 로하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그는 굳이 말하자면 ‘신’ 같은 존재니까. 심지어 자신을 ‘로하나’의 몸에 이렇게 빙의까지 시키지 않았는가.

“한 번 더 설명할 기회를 줄게.”

“기회를 줘?”

소년 라자르는 기가 찬 듯 로하나 말을 되물었다.

“네가 나한테?”

“그래.”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너도 참 많이 변했다. 옛날 그 직장인이라고 누가 알아보겠어.”

로하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로하나의 흔들리는 얼굴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라자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사람들의 일에 손을 대는 이유가 뭐야?”

로하나가 묻는 말에 라자르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무슨 뜻일까?”

“사람들이 알아서 살도록 왜 내버려 두지 않지? 너는 사람이 아닌데, 왜 우리들의 삶에 끼어드는 거야?”

로하나의 질문에 라자르는 이제 알겠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아아…….”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렇구나. 너는 그게 못마땅했구나. 하긴.”

라자르가 팔짱을 꼈다.

“너한테는 내가 너무 많은 면을 보여 주긴 했어.”

“카르크족을 전투에서 이기게 하겠다는 것도 거짓말이잖아.”

로하나의 말에 순간, 라자르의 얼굴이 굳었다. 조금 놀란 듯 경직되었던 표정은 이내 소름 끼치는 미소로 천천히 풀어졌다.

“아니, 어딜 봐서.”

“여태까지 참 잘도 꾸며 댔지. 마치 카르크족을 위하는 것처럼.”

로하나가 말을 계속하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차갑게 언 손을 조심스럽게 등 뒤로 숨기면서.

“어딜 봐서 거짓말이라는 거야?”

“정말로 카르크족을 위한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일을 만들 필요가 정말 있어?”

로하나가 재차 물었다. 이제 여유가 있는 건 로하나 쪽이었다. 그렇다고 라자르도 긴장하거나 당황스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제법 놀란 것은 확실했다.

“이런 식으로 늘 여기저기 편을 들면서 즐기는 거지?”

“글쎄.”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제 겨우 한두 걸음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로하나는 낮게 속삭였다.

“내가 필요하다고 했지.”

거의 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에 라자르는 귀를 기울였다.

“이젠 별로 필요 없는데.”

“그럼 왜 날 죽이지 않지?”

라자르의 눈이 어두워졌다.

“너는 사람의 마음을 쓰지. 그렇게 항상 사람의 약한 부분을 써서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해. 그들이 죽든 살든 말이야.”

그간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로하나가 말했다.

“그럼 안 되나? 대의를 위해서인데.”

“너 같은 거 없이도 사람들은 알아서 옳은 길을 찾아 나가.”

“아닐걸?”

라자르가 코웃음을 쳤다.

“너만 해도 그래. 제 앞가림조차 못하는 사람이었잖아”

로하나가 이제는 손 닿을 듯 가까워진 라자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 순간 보랏빛 눈동자가 향하는 방향을 위로 올려야 했다.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한 라자르가 같은 눈높이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평범한 사람을 이 정도로 특별한 삶을 살게 해 주었으면 충분할 거 같은데.”

로하나의 눈앞에 과거의 자신이 있었다.

“정말?”

로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라자르는 다시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돌아와 로하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말 내가 이 정도 말을 듣고 동요할 거라고 생각했어?”

순간, 라자르가 눈치채기도 전이었다. 단검이 날아들었다.

새파란 불빛이었다.

“됐어.”

로하나가 기쁨에 찬 탄성을 지를 때였다. 순간, 새카맣게 단검을 타고 무언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설마, 너야말로.”

라자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내가 이 정도 공격으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단검이 가볍디가벼운 소리를 내며 얼음 바닥으로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