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이른 아침 새가 울었다. 로하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파인체이서에서 그를 처음 알아본 것이 까마득하게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보름달 아래 파리한 그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 그 소년의 얼굴이 겹쳐 떠오를 때만 해도 이런 사이가 될 줄은 정말 몰랐었다.
눈을 깜빡이자 긴 속눈썹이 파르라니 떨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아침 햇살에 속없이 반짝여 눈이 부셨다.
몸을 일으키며 로하나는 새벽녘에 느꼈던 인기척을 떠올렸다. 그가 떠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작별 인사는 밤에 나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로하나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가 긴 손가락과 넓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것을 다시 기억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해.’
케이든에게는 케이든의 싸움이 있었고, 자기 자신에게는 자신의 몫이 남아 있었다.
문제의 근원, 그러니까 세상을 혼란스럽게 진동시키는 ‘파원’인 라자르를 해결한다.
라자르가 하는 행동이 무엇이든지 간에 지금 하는 행동은 옳지 않았다.
그가 더 이상 이렇게 끼어들게 하진 않겠다.
라자르는 함부로 사람들을 장기말처럼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 같았는데, 사실 그 ‘목적’이라는 것조차 의심스러웠다.
정말 ‘카르크족의 승리’만을 원한다면, 이렇게 복잡할 필요가 있었을까?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존재면서?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그러나 로하나는 라자르를 막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앗, 마님 혼자 준비하고 계셨나요?”
이 바쁜 와중에도 시녀들이 웃는 얼굴로 물과 수건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응, 걱정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른 급한 일들 봐.”
시녀들을 물린 후 로하나는 활동이 편한 승마복을 입으며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어떻게 한다.’
그때, 갑자기 이슬라 여왕이 주었던 고서가 생각이 났다. 백 번도 더 읽었지만 그때만 해도 라자르를 직접 어찌한다는 생각까지는 못했을 때였다.
다시 읽으면 어떤 묘책이 떠오를지도 몰랐다.
로하나는 서둘러 제 짐을 뒤져 고서를 꺼내 들었다.
막 아침 햇살을 내뿜으며 산허리에 걸쳐져 있던 해가 순식간에 푸른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로하나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라드리우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창가로 다가왔다. 거대한 새의 움직임에 주변에서 놀라는 눈치였지만 로하나는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로하나의 뜻을 알겠다는 듯 오,팔빛의 눈동자가 번뜩이다가 천천히 깜빡였다.
*
“레이디.”
로하나는 히스의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란 눈을 했다. 히스는 원래 길게 기르고 있던 하늘색 머리를 짧게 자른 채 새카만 R. D.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낯설다면 낯선 모습인데도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조금 몰라보겠는데요.”
히스는 피식 웃으며 가슴께에 있는 가죽끈을 당겨 몸에 더 맞게 조였다.
“좋은 뜻으로 알겠습니다.”
“네 좋은 뜻이에요.”
“저…… 케이든은.”
“알아요.”
로하나의 빠른 대답에 흐려졌던 히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괜찮아요. 알고 있었어요.”
“그럼 레이디는 저희와 함께 노프탈로 가시는 것이죠?”
로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히스는 그런 그녀를 복잡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를 부르는 소리에 먼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나갔다.
새파랗게 우거진 파인체이서 주변의 숲은 겨울에 보았던 것보다 더 푸르렀다. 여름 향이 가득했다. 그리고 화약 냄새도. 그때 등 뒤에서 이번엔 로하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 부인, 오랜만입니다.”
프란츠가 뒤에서 나타났다. 그 역시 R. D. 복장이었다.
“히스를 잘 부탁해요.”
“저야 R. D.에서 그의 부하니 당연히 그를 잘 따라야죠.”
“정말로요.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요.”
로하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그에게 라자르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도대체 라자르라는 작자는 왜…….”
“모르겠어요.”
로하나가 솔직하게 말했다.
“오렐리아가 그런 돌발 행동을 한 것도 혹시…….”
“당신도 몰랐어요?”
“수도로 갈 때까지만 해도 저희는 황궁에 갈 계획은 없었어요. 바로 직전에 오렐리아가 갑자기 저에게 지령을 내려 놓고는 사라져서 이상했었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에 로하나가 뭔가를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프란츠 소예 후작은 이렇게 이기는 것이 역사의 흐름에 맞다고 하셨었죠?”
프란츠는 아린족이면서도 이쪽으로 돌아선 유일한 귀족이었다. 최소한 로하나가 아는 한은.
“네.”
프란츠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로하나를 쳐다봤다.
“일부 족속을 탄압하고 배척해서는 답이 없어요. 그리고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가 될 겁니다.”
로하나는 프란츠의 처음 보는 모습에 조금 진지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지어지는 알 수 없는 미소에 눈을 새물새물하게 떴다. 늘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조금 아쉬워졌다. 그에게 이 말까지 해 줬어야 했는데. 그는 가서 죽을지도 모를 일을 혼자 해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니, 죽지 않게 자신이 막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망설임이, 비가 온 뒤 갠 하늘에서 남은 구름 조각이 걷히듯 사라졌다.
“전에 저한테도 이 전쟁을 함께하려면 마땅한 이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하셨었죠.”
평상시에 그의 말을 주로 차단하기만 하던 로하나가 말을 길게 하자 프란츠는 조금 신기한 듯 눈을 뜨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소릴 했었죠. 이렇게 거꾸로 들으니 조금 건방지네요. 감히 공작 부인에게.”
여전히 조금의 반성의 빛도 없는 뻔뻔한 말투지만 프란츠가 농담조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저도 이유는 있어요.”
그게 뭐냐는 듯 프란츠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곧 알게 될 텐데, 그때 꼭 저번에 오렐리아한테 했던 것처럼 당신이 해야 할 일에 붙어 있어 주세요. 히스가 뭐라고 하든.”
“라자르에게 무슨 이상한 소리라도 듣고 온 거예요?”
그가 빙글거리던 얼굴을 순식간에 지우고 미간을 좁혔다. 그까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 아니에요.”
로하나가 힘을 주어 대답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듣고 프란츠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히스가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출정이었다.
“레이디. 레이디는 제 옆으로 오시죠.”
히스가 평소의 부드러운 말씨로 그녀에게 말고삐를 건넸다. 히스는 이미 말에 올라탄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하나가 자신의 말에 오르고, 프란츠도 제 부하가 가져다준 말에 이어서 올라탔다.
출발이었다.
로하나는 조용히 히스 옆에서 말을 몰았다.
“히스.”
“네.”
히스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로하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았다. 역시 그에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
“아니에요.”
어차피 케이든이 말했던 ‘사시사철 겨울이 있는 곳’까지는 아직 조금 더 많이 가야 했다.
라자르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는 이렇게 사람들을 방해하지 못하게 할 것이었다. 삶은 그가 아닌 케이든, 히스, 그리고 나머지 모두의 몫이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생사를 그가 함부로 결정짓지 못하게 할 것이다.
히스의 팔목에 옅지만 여전히 남은 검은 자국을 보며 로하나는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다.
그때 이번엔 히스의 시선이 로하나의 팔목에 머물렀다.
“레이디. 팔목에 그건.”
“아…….”
로하나는 팔목을 감싸며 웃었다. 긴 옷가지에 가려지긴 했지만 팔목엔 새하얀 뭔가가 감싸져 있었다.
“그냥 부적 같은 거예요.”
히스는 그녀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웃으며 넘어갔다.
*
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땅거미가 졌다. 수도 쪽은 해가 더 늦게 진다. 그래서 아린족의 방식으로 따졌을 때 미드 서머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사흘쯤 남았나.’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날짜가 어쩐지 자꾸 신경이 쓰여 케이든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하게 그 날짜가 마음에 걸렸다. 그때, 동태를 살피고 온 이즈가 돌아왔다.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철통같은 방어입니다. 저희가 한쪽 문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 반드시 시끄러울 겁니다.”
갈레드가 바로 시끄럽게 반박했다.
“그럼 절대 안 되지! 그랬다간 바로 다 죽을 텐데.”
“어차피 웬만해선 정면 돌파를 할 생각은 없었어.”
케이든은 미간을 누르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갈레드와 이즈, 그리고 한 성문 정도를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이 함께하고 있었다.
케이든은 다시 한번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황궁 지도에서 지하 감옥의 위치가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 미친 것들이 먹을 것 마실 것도 주지 않고 카르크족은 닥치는 대로 집어넣고 있는 모양이에요. 이미 각종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죽이기도 많이 죽인 것 같고.”
수도에 남아서 정보통 역할을 해 주던 아이가 보내온 보고서를 이즈가 읽어 내려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일단, 다들 동문으로 간다.”
“감옥이 그쪽에서 가장 가까운 거죠?”
케이든의 명령에 갈레드가 물었다.
“그리고 신호가 가면 너희는 바로 치고 들어가.”
“어떤 신호요?”
“내가 잡힐 거야.”
“아니, 전하 그게 도대체 무슨!”
갈레드가 거의 욕설을 뱉을 뻔할 정도로 놀라며 먼저 반박했다.
“말도 안 됩니다.”
침착하던 이즈도 말했다.
“모두 동쪽으로 가서 작전을 시행한다.”
케이든이 더 듣지 않겠다며 손을 들어 이즈와 갈레드의 항의를 막았다.
“동이 트면 내가 정문에서 잡힐 거야.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거다. 다만 마력으로 그들을 한바탕 뒤엎어 놓을 거야.”
두 사람의 얼굴이 더 심각하게 굳었다.
“제국군은 아마 혼비백산하면서도 됐구나 싶어서 나에게 집중하겠지.”
이즈도, 갈레드도 그리고 데려온 부대도 모두 한다면 한다는 마력자들이었다. 허를 찌르면 성문 하나쯤은 충분히 점령이 가능했다.
“인질들을 모두 풀어주면서 동문을 반드시 장악해. 그 후에 내가 혹시 못 나오거든 날 빼러 오든지.”
그들의 일차적 목표는 인질 탈환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케이든이 바르디까지 건드릴 계획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자살에 가까운 위험한 행동을 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그들까지 알아 봤자 좋을 것 없었다.
아무도 모를수록 좋은 계획이었고, 황제를 암살하는 것은 기습이 아니면 답이 없었다.
“아무리 전하라도 너무 위험합니다.”
“내 실력을 너무 모르는 것 같군.”
케이든이 진심으로 말했다. 여태까지는 전력을 다해 싸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늘 방어가 최우선이었다. 늘 막고, 보호하고, 또 막았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케이든이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동문과 감옥을 장악해.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한다.”
살면서 처음으로 진심 어린 공격을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