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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16화 (116/125)

116

대제국 아르드골드 황제의 집무실에 앉아 바르디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줄줄이 들려오는 승전보에 시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유리로 만든 만년필이 경쾌하게 서명을 이어 나갔다.

‘해도 해도 너무 쉽잖아.’

전체 인구 중 서른 명당 한 명이 카르크족일까 말까 했고, 공식적으로 제대로 된 군대를 키우지 못하는 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심지어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은 이렇다 할 성벽도 없는 작은 마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쉬워서야 원.”

노프탈의 영주니, 제국 동쪽의 수호자니 하는 수식어가 민망하지 않은가. 케이든의 번지르르한 외모와 사람들의 찬양을 떠올리며 바르디는 기가 막혔다.

게다가 전서구는 로하나와 히스인지 뭔지 하는 놈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냈다고 했다. 그것 또한 얼마나 쉬운가. 케이든은 설마 로하나를 다른 곳으로 빼돌리는 걸 감시하는 자가 없다고 생각했던가?

‘물론, 그 정보를 알게 된 것에는 약간의 도움이 있었지만.’

바르디는 붉은 눈을 가진 어린 소년을 떠올렸다. 라자르라고 했던가. 하는 짓거리를 봐서는 마력자인 것이 분명해서 이상했지만.

‘뭐…… 결국 잘 되었으니 된 건가.’

그러다 바르디는 문득, 오렐리아가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마력자, 카르크족 모두 기분 나쁜 것들이었다. 케이든도 그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면, 사이가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때 부디에르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뭐야.”

바르디가 책상 앞에 비스듬하게 앉은 채 물었다.

“폐하.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의 얼굴만 보아도 좋지 않은 소식이라는 걸 훤히 알 수 있었다.

“뭔데.”

한동안 좋은 소식뿐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 이제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바르디는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빙글빙글 돌렸다. 어두운 촛불에 유리가 비쳐 독특한 무늬를 책상에 만들어 냈다.

“그게…….”

“조금이라도 더 망설였다가는 네 책임이…….”

“델클리프 공작 부인을 놓쳤다고 합니다.”

순간, 싸하게 공기가 가라앉았다.

“그 쉬운 걸 놓쳐?”

“쉽지 않았…… 아니…….”

“왜 쉽지가 않았는데?”

바르디는 제가 생각해도 스스로 놀라울 만큼의 인내력을 발휘하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물었다.

“그게…… 부인께서 전설의 마물을 다루시는 모양입니다.”

“전설의 뭐?”

“전설의 고대 마물이라고 합니다. ‘칼라드리우스’라고. 마력자들도 다룰 수 없다고 하던데…….”

“근데 그걸 아린족인 로하나가 해?”

“송구하지만…….”

부디에르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습니다.”

바르디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그 이상한 새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건 이미 눈으로 보아 알고 있었다. 아직도 샤톤웰 국경의 절벽에서 케이든을 없애 버릴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그 빌어먹을 새가 날려 버린 것이 눈에 선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확인 사살을 당하자니 바르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다른 것은 다 참아도 그건 아니었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나의 로하나’가 그런 존재가 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차라리…….

“폐하!”

순간, 번뜩 정신을 차린 바르디는 부디에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조금 멍하게 바라보았다.

“뭐.”

“폐…… 폐하, 손이…….”

뚝 뚝.

손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유리로 만든 만년필을 쥐고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바르디는 욕을 내뱉으며 부러진 만년필을 냅다 바닥에 던졌다.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됐어.”

소란은.

그러고 보니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거의 처음이었는데. 바르디는 어쩐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됐다는 말에도 부디에르는 서둘러 의사를 불렀다.

바르디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하는 것뿐인데. 로하나는 로하나의 자리로. 카르크족은 카르크족의 운명대로.

이 간단한 것을 제자리로 돌리는 데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부어야 하는 걸까.

바르디는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 그리고 이렇게 황궁에 계시는 것은 조금 위험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의사를 데려온 부디에르가 여전히 절절매면서 말을 이어 갔다.

“여기가 위험하다고?”

바르디는 오늘 웃을 일이 많다고 생각하며 기가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물론 제국의 황궁인 만큼 여기에도 병력이 많이 집중되어 있습니다만…….”

부디에르가 설명했다.

“노프탈 총공격을 하려면 여기에도 어느 정도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르디가 의사가 하라는 대로 손가락을 올리며 나른한 눈으로 물었다.

“황궁은 사방이 뚫린 편이고 너무 넓습니다……. 병력을 줄여야 한다면 여기보다는 안전한 곳으로 옮기시는 편이…….”

바르디는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부디에르의 긴말을 막았다.

“아니.”

바르디가 대답했다.

“제국의 황제는 여기 남는다. 병력도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 남도록 해. 노프탈 총공격으로 제국의 황궁이 위험해진다는 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라고 하나?”

바르디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 특유의 불안정한 기복이 느껴지는 톤이었다. 부디에르는 일단 알겠노라 고개를 숙였다.

*

부적절하다고 할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와 얽혀서 상황을 더 엉망으로 만들기만 할 뿐이라고 믿곤 했다. 누군가는 다 떠나서 전쟁 중에는, 장례식을 치른 날에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시트는 물결처럼 끊임없이 구겨졌다. 거친 굳은살이 여린 살을 지나갈 때마다 절로 신음 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땀이 가득한 등 위로 달빛이 흘러 내려왔다.

수도 없이 긴장하고, 전율하고 다시 풀어져 내리기를 여러 번, 마지막 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슬프게 알리듯 그는 끊임이 없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흐릿한 정신 사이로 로하나는 생각했다.

‘나를 데려가든, 히스를 데려가든 하라고.’

그러나 어떤 말도 이내 덮쳐 오는 뜨거운 체온에 녹아내려 버렸다.

‘혼자는 안 된다고 말해야…….’

순간, 로하나의 가는 팔이 케이든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읽고 있는 흑안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버릇처럼 자꾸 눈을 감는 그녀에게 케이든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로하나.”

다시 속절없이 온몸의 힘이 풀렸다.

“나를 봐.”

보랏빛 눈동자가 그에게 고정되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럴 일 없습니다.

그가 했던 수많은 말들이 귓가에 고동쳤다. 케이든은 땀에 젖은 은발을 넘기며 씩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미소는 어쩜 그대로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그렇게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땐 그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그런 미소가 지어지다니.’

여유로워 보이는 그와 달리 로하나는 정신이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로하나는 그만큼 강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의 말을 정말 믿어 보려 애썼다. 그는 로하나가 말을 할 틈새도 없게 만들었다. 그러고선 그는 몸으로 설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꼭 처음 만났을 때 같잖아.’

처음에 마주쳤던 그는 더더욱 그녀에게 미소로 일관했었다. 그 미소는 어쩜 처음부터 지금까지 로하나를 이렇게 긴장시키는지.

다른 누구의 미소도, 다른 누구의 으름장 놓는 험악한 표정도 그녀를 긴장시킬 수 없었다. 샹들리에가 떨어지던 그날부터 정해진 것처럼 심장은 속절없이 뛰었다.

아무리 감정에 다시 속지 않으려고 애써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다시 확인해도 진실이었고.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그녀 안에 있었다.

순간, 정신을 잃을 듯 아득해졌다. 로하나가 겨우 숨을 다시 들이쉬었을 때 케이든의 숨이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다리에서 허리, 그리고 등으로 긴 손가락이 부드럽게 훑어 올라왔다. 떨리는 로하나의 몸을 하나하나 느끼는 손가락 끝의 감각에 로하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압니다.”

분하게도 먼저 제 숨을 고른 케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로하나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하나 위에 있던 케이든은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서 턱 끝까지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요.”

케이든이 조용히 말했다.

“칼라드리우스는 너무 눈에 띕니다.”

“정말로 최소 병력만 데리고 가시겠다는 거지요?”

짙은 눈썹을 조금 늘어뜨리며 케이든이 작게 대답했다.

“네.”

“칼라드리우스는 그럼 그렇다 쳐요. 히스라도 함께 가요. R. D.를 데려가요.”

“그 전력은 노프탈에 더 필요할 겁니다.”

“황궁군의 전력이 어떻게 나뉠지 알고요.”

“바르디는 분명 충분할 만큼의 전력을 황궁에 남겨 놓을 겁니다.”

“그럼 더더욱…….”

“그렇지만 우리가 황궁군으로부터 수비할 노프탈은 너무 넓어요.”

로하나는 거의 핏빛으로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모해. 그럼 바르디를 죽일 수 있다고 해도…….”

“무사히 돌아오기 힘들 거라고요?”

케이든이 대신 로하나의 말을 끝맺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럼 무슨 소용이에요?”

“그러니 절대 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정말입니다. 당신 말대로 내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케이든이 진심인 듯 말했다. 그러나 로하나는 오랜 감으로 이제 알았다. 아직 그는 전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제 로하나 당신을 더 속이지 않기로 했지요.”

그러나 그가 이어서 할 말이 무엇일지 로하나는 대뜸 두려워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런 일이 생긴다면…….”

케이든이 결심한 듯 솔직하게 토로했다.

“카르크족의 정통 후계자가 남아 있어요.”

순간, 로하나의 붉어진 뺨에 핏기가 가셨다. 정말 거기까지 생각한 것이었다.

“히스.”

숨결같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히스 악스톤.”

케이든이 처음으로 히스를 성까지 붙여 말했다.

“그러니, 이 작전이 맞습니다. 내가 황궁을 쳐서 바르디를 없애는 것까지만 성공하면, 노프탈을 사수한 히스가 나머지를 이룰 겁니다.”

“왜…….”

“히스는 모를 겁니다.”

로하나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잠시 말을 고르듯 케이든이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내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도는 계획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겨서 당신에게 돌아가겠다고만 했지 황제가 되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로하나의 얼굴이 울 것처럼 되자 케이든은 다시 예의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아니면 안 되겠습니까?”

로하나는 흐려진 시야를 밝히려 눈물을 옆으로 떨궜다. 그러고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케이든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맞춤에 응했다.

짙은 숨결이었다.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새기려는 듯 오가는 숨결은 진하고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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