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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로 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순간 정적을 깬 건 로하나 쪽이었다.
“말 그대롭니다.”
케이든이 로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프탈에는 R. D.가 갑니다. 나는 최소 병력만 이끌고 수도로 가고.”
“위험해.”
“알아.”
히스가 반사적으로 반대하자 케이든도 틈 없이 대답했다.
“길게 해서는 답이 안 나와.”
수적으로 딸리는 카르크족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길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케이든이 덧붙인 말에 로하나의 머릿속에 오늘 본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어린아이들이 재와 피에 절어 동물처럼 실려 왔던 모습이. 그들의 부모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지에 대한 일들도.
“기습을 하겠다는 거야?”
히스가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심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일단 여기 우리 셋만 알고 있도록 하지. 아마 내가 데려갈 몇 명은 차후 알게 되겠지만.”
“그럼 노프탈은?”
“R. D.에게 부탁하면 좀 낫겠지. 리프의 군대도 다 옮긴다. 어차피 밀고 들어올 테니 여기를 비우는 게 낫겠어.”
케이든이 오래 생각해 온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로하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 울던 새소리조차 조용한 것 같았다. 그때, 히스가 입을 뗐다.
“내가 가지.”
“어딜?”
케이든이 물었다.
“어디겠어? 노프탈이지.”
히스가 깔끔하게 대답했다.
“음.”
“무슨 소리에요? 히스는 케이든하고 가야죠.”
로하나가 가로막았다. 지금 황제를 기습하러 가면서 최측근이자 최고의 마력자 중 하나인 히스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는 건가? 무모해도 정도가 있고, 비효율적이다.
“로하나와 같이 노프탈로 가.”
“그래.”
“저기요?”
로하나가 둘 사이를 아예 가로막으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노프탈로 가는 건 저도 좋아요. 노프탈에 최종 방어선이 필요한 셈이니까. 그렇지만!”
당연한 소리를 해야겠냐는 듯 로하나는 항의하는 눈빛으로 케이든과 히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히스는 그런 로하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다시 입을 뗐다.
“내가 R. D.의 수장이 될게.”
“뭐?”
이번에는 케이든이 되물었다.
“넌 그것만은 끝까지 하지 않겠다고…….”
로하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둘 사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럴 때가 아니야. 내가 하는 게 맞고.”
히스는 결심을 굳힌 듯 단호했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로하나 쪽으로 시선을 돌린 히스가 말을 이었다.
“그럼 함께 가 볼까요, 노프탈로?”
케이든은 뭔가 석연치 않은 듯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잠깐만요.”
로하나는 자신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대화를 이어 나가는 두 사람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케이든.”
케이든이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혼자 거기로 가겠다고요?”
“아주 혼자는 아닐걸요.”
그답지 않게 농담이 배인 말투였다.
“농담하지 말고요.”
“농담 아닙니다. 나름 제 작전이에요.”
케이든이 대답했다.
“선대부터 내려온 일이니, 그의 후손인 바르디와 내가 끝내야 맞습니다. 나는 그 유명한 혼혈이니까요.”
‘혼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말에 로하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황궁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바르디하고 일대일로 싸울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아니겠죠.”
“그런데 무슨 수로 혼자…….”
“로하나.”
케이든이 로하나의 손목을 어루만지듯 잡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밤에 얘기하죠.”
케이든의 눈이 아주 살짝 히스를 향했다 돌아왔다. 히스는 전혀 상관없으니 계속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로하나가 생각하기에도 그는 이제 좀 더 쉬어야 했다. R. D.의 수장으로서 곧 나서려면 더더욱 안정을 취할 수 있을 때 취하는 것이 맞았다.
“알았어요.”
로하나는 하는 수 없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대신 밤에 이야기해요.”
케이든은 알겠다며 인사를 하곤 먼저 방에서 나갔다. 다른 급한 일이 있었던 것인지 발걸음이 조금 급했다.
“히스.”
그를 쉬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로하나는 하나만 묻자, 생각했다.
“네.”
히스는 늘 짓는 사람 좋은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R. D.로 다시 돌아가는 걸 원래는 원치 않는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히스는 빙그레 웃었다.
“음…….”
그러나 난처한 눈매를 보며 로하나는 괜한 질문을 했다고 바로 후회했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로하나가 재빨리 물러나자 히스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세요?”
“그냥요. 저번에도 케이든하고의 관계에 대해서 물을 때도 레이디가 이렇게 조심스러웠던 것이 생각나서요.”
샤톤웰 전투 후에 남부 안전 가옥에서 지냈던 밤을 말하는 것이었다. 로하나도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옛날 일도 아닌데, 엄청 과거 같네요.”
“그러게요.”
히스가 물빛을 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R. D.는 제 부친 악스톤이 만들었던 단체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히스는 극단적인 무력 항쟁을 원치 않았나요?”
“아뇨. 제가 원했었거든요.”
히스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나의 부친은…… 아버지는 길게 보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항상.”
히스의 눈이 먼 곳을 떠올렸다.
“지병으로 병사하는 순간에도 케이든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하라고 주장했죠. 나는 그걸 알면서도 한동안 모르는 척하면서 케이든하고도, R. D.하고도 등을 돌렸었고요.”
카르크족의 수장 악스톤을 살해해 제국의 신임을 얻었던 케이든 델클리프. 원작의 캐릭터 설명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오랜만에 들으니 로하나는 새삼스러웠다.
그랬구나.
정말로 죽인 것도 아니었구나.
“내가 보기에 케이든은 마음이 너무 약했어요. 모든 게 불만스러웠죠. 죽이고 싶을 만큼.”
히스가 이렇게까지 솔직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목소리도 표정도 부드러운 꾸밈새보다는 나지막한 고백에 가까웠다.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 막무가내인 나를 한참 어린 케이든은 넘어가 줬죠. 그때 알았어요.”
창밖을 응시하던 히스가 시선을 돌려 로하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케이든이 우유부단한 것도 약한 것도 아니었다는 걸.”
히스가 큰 숨을 내쉬자 침대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길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요.”
로하나는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동의의 뜻이었다.
“그리고 레이디도 그래요.”
히스가 예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와 말했다.
“저요? 전 지극히 평범하죠.”
지극히 평범하다마다. 늘 살기 위해 아등바등 열심히 돌아다녔을지는 몰라도 다른 장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레이디는 케이든하고 많이 닮았습니다. 이리저리 정이 많아 약한 것 같아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죠.”
지나친 찬사라고 생각했다. 원작이라든가, 빙의라는 말을 모르는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칭찬이었지만 그래도 로하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좋게 봐 주시네요.”
히스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만 쉬어요, 히스. 괜찮아져서 다행이에요.”
로하나는 침대 끝을 톡톡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프탈에 함께 가는 걸로 알겠습니다.”
문고리를 잡는 로하나의 뒤로 히스가 말했다.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섰다.
*
밤이 깊었다.
보름달이 한창 기울어 깜깜한 밤이었다. 로하나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노프탈로 간다.’
노프탈로 가는 게 어쩐지 맞는 길 같지가 않았다. 히스는 노프탈로 가겠다는 마음이 확고해 보였다. R. D.의 수장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사라져서일까. 아까 분명 물었는데도, 그의 대답이 이상하게 석연치가 않았다. 돌아보니 그는 대답을 하진 않았다. 그저 싫어했다는 것만을 말했을 뿐.
‘어째서 지금은 R. D.의 수장이 되어 노프탈로 가겠다는 것일까?’
왜긴 왜겠어. 이런 전시 상황에 케이든과 카르크족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사사로운 감정은 접어 둔 것이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케이든을 위해서라면 뭐든 최선을 다하는 히스였다.
그러나 로하나는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케이든이 황궁에서 바르디를 기습하려면 전력이 필요하다. 히스만 한 전력이 어디 또 있다고.
‘내가 칼라드리우스와 함께 같이 갈까?’
그것도 방법이었다. 분명 크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설득해 봐야겠다.’
로하나가 마음을 굳히는 새, 인기척이 났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군가가 반가워지는 것은 안타까울 만큼 조바심 나는 일이었다.
침대에서 막 일어나는데 케이든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항상 그와 마주치는 이 순간은 왜인지 불편하고 가슴이 뛰었다. 첫 만남에서 느꼈던 두근거림이 도무지 사라지질 않는다.
“조금만 정리하고, 씻고 오겠습니다.”
은발이 달빛에 반짝였다.
‘큰일이다.’
조금 열어 둔 침실 문 너머로 사용인들이 물을 준비해 주는 소리, 달칵거리는 소리.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이야.’
알기에 위험한 이 감정에 드디어 완전히 젖어 들었구나.
로하나는 밀려오는 그 감정에 항복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