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14화 (114/125)

114

“장례식이요?”

“사실 이미, 화장은 한 상태입니다만…….”

로하나는 시선을 내렸다. 가슴에 차가운 얼음 조각이라도 올려놓은 듯 선뜩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조디 때에도, 오렐리아 때에도 느꼈던 똑같은 기분.

그녀에게 정말 다른 두 존재였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똑같이 끔찍한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아니, 어쩜 당연한 건가.

“벌써 죽은 지 7일째라. 이제 더 이상 미루면 카르크 예법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들의 원성이 큽니다.”

프란츠도 그런 예법은 몰랐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케이든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에서 실시하지. 파인체이서 부인에게 준비하도록 해.”

“네.”

프란츠가 혹시 모르겠다는 듯 로하나의 눈치를 살폈다.

“저한테 그러실 것 없어요.”

로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례식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미 떠난 망자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에 사심을 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운다고 해도, 그건 그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뭔가?”

케이든이 입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눈자위가 조금 피곤해 보였다.

“R. D.의 수장 자리입니다.”

오렐리아 브리가 사망했으니, R. D.의 수장 자리가 비어 있는 셈이었다.

“잘난 라자르는 아직 안 나타났던가?”

“네……. 아직은.”

로하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현재 R. D.를 맡고 있는 자네 생각은?”

“저는…….”

프란츠가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며 잠시 망설였다.

“글쎄요. 저보단 그들을 오래 보아 온 전하께서 정해 보시는 것이…….”

“나는 R. D.였던 적이 없는데.”

“지금 R. D.는 카르크 연합군입니다. 당연히 전하의 뜻을 따를 거고요.”

예의 껄렁한 태도를 사뭇 지운 그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느껴졌다.

“알겠네.”

프란츠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나가 보았다. 뒤이어 케이든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인체이서 부인이 들어와 내일 있을 장례식을 설명했다. 동이 터 와서 아침 식사가 차려졌지만 로하나는 너무 지쳐서 조금도 먹을 수가 없었다.

“부인, 그래도 드셔야지요.”

파인체이서 부인이 바쁜 중에도 신경을 쓰는 것이 미안해 로하나는 겨우 수프를 조금 뜨고는 침대에 누웠다.

처음 파인체이서 백작가에 왔을 때 가득 느껴지던 나무 향이 침대에서 깊게 배어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수마에 빠져든 로하나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

“동이 터 있을 때는 장례식을 하지 않는 걸로 알았는데요.”

로하나가 검은 예복으로 갈아입으며 사용인에게 물었다. 카르크족인 그녀는 일전에는 로하나에게 쌀쌀맞았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싹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에요, 부인. 저희 카르크족은 오히려 날이 밝을 때 장례를 치릅니다. 가는 길이 어둡지 말라고요.”

‘가는 길이 어둡지 않도록.’

로하나는 쓸쓸하게 그 말을 되새겼다. 장례식은 검소했지만 웅장했다. 파인체이서 백작가 영지의 호숫가에 도보로 올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모인 것 같았다.

호수는 백작가로부터 멀지 않았다. 로하나도 말을 타지 않고 걸었다. 호수는 잔잔했고 새파란 하늘과 짙푸른 나무를 거울처럼 비추었다.

아름다운 호수였다.

화장한 유해는 기도 후 천천히 호숫가에 뿌려졌다. 로하나는 조용히 그녀의 유해가 유리 같은 물결 사이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케이든도 그녀와 비슷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저 그는 조금 더 복잡해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가게 될 것을…….’

로하나는 쓸쓸하게 생각했다. 서로 피를 튀길 듯 악다구니를 썼던 것도 한 줌 바람처럼 흩어져 갔다.

‘이런 싸움을 멈출 때가 되었다.’

로하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잔잔하기만 하던 호숫가가 일렁였다. 저 멀리, 꼭 무언가가 헤엄쳐 들어가듯 커다란 파동이 일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로하나는 분명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파동이 퍼져 나가듯 떠올랐다.

파동이 일어나려면 항상 파원이 존재하는 법.

이 세상의 모든 군상 중심에는 항상 등장하는 ‘파원’ 이 존재했다. 붉은 눈의 그 존재.

“로하나.”

그녀를 생각에서 깨운 건 케이든이었다.

“돌아가죠.”

눈이 시리도록 밝은 여름이었고, 그렇게 오렐리아는 정말 떠나갔다. 로하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나는 케이든과 나란히 백작저로 돌아왔다. 혼자 쉬러 내실로 향하는데, 반가운 얼굴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돌아섰다. 로하나도 무심코 지나가다가 반가워 절로 몸을 돌이켰다.

“시리율!”

“마님!”

도서관장, 시리율이었다. 항상 예쁘게 양갈래로 땋았던 초록빛 머리카락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로 올려 있었다.

“다행히 무사했구나.”

“네, 마님 덕분에요.”

시리율은 차마 할 말이 너무 많아 하지 못하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이따가 이야기할까? 어디에 있어?”

“여기에 조금 남아 있던 중요한 장서를 옮기려고 왔어요. 노프탈이 저희의 최후 요새니까요.”

“그렇구나.”

“아, 마님 곧 알게 되시겠지만 브란드 하노버께서도 저랑 같이 여기로 오셨어요.”

“인질로?”

“네 일단은요. 전하께서도 아직 모르실 수 있어요. 이즈가 내린 결정이라…….”

“그래. 말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또 한 가지요.”

돌아서서 걸어가려는 로하나를 시리율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방금 히스 님하고 인사하고 왔어요. 이제 거의 기운을 차리신 것 같아요.”

활짝 웃는 시리율을 보며 로하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두웠던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 가 봐도 될까?”

“엄청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로하나는 미소를 띠면서 히스가 쉬고 있는 내실로 향하려다가, 옷은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해 다시 제 내실로 향했다.

장례식에 함께하고 싶지 않았을까.

로하나는 일부러 더 밝은색의 옷을 고르며 조용히 생각했다.

*

“히스.”

창문에서는 여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파인체이서도 날이 더울 때는 커튼을 얇게 바꾸는지 반쯤 밖이 비쳐 보이는 옅은 녹색 커튼이 빛에 아롱거렸다.

히스는 침대에 기대앉은 채 늘 짓는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이디.”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달려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손목의 멍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려져 있었다. 역시 케이든이 잘 해결한 모양이었다. 로하나는 그대로 그의 손을 붙잡고 이마에 가져다 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안심해도 괜찮습니다. 이제 정말 다 지나갔어요.”

로하나는 그제야 둘이 있던 며칠간 스스로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실감이 났다. 울려고 하는 게 아닌데도 긴장이 풀린 듯 눈물이 툭툭 쏟아져 내렸다.

무서워서 상상조차 안 했지만, 두려웠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이대로 히스까지 가는 걸까 봐.

정말 두려웠다.

두려워서 머릿속으로 차마 떠올리지도 않았었다. 그러다 이제야 그럴 수도 있었다는 걸 머리가 인식하니 안심해서 절로 눈물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민망한 마음에 서둘러 눈물을 닦으려는 찰나 히스가 문득 잡혀 있던 손을 빼 들었다.

어?

그러더니 그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로하나의 뺨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손이 다시 멀어졌다.

“눈물 흘리실 일이 아닌데.”

놀리듯 너스레를 떠는 목소리에 로하나는 피식 웃었다.

“눈물 흘릴 일이죠.”

“무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히스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로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사용인들이 차와 다과를 내왔다.

“식사는 하셨어요?”

히스가 늘 그렇듯 로하나의 식사를 물었다.

“해야죠.”

로하나는 드디어 긴장이 풀린 듯 쿠키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장례식은 어땠습니까?”

히스의 목소리에 회한이 가득해 로하나는 쿠키를 다시 내려놓았다.

“평화로웠어요.”

정말 그랬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녀의 일생에서 제일 평화로운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감히 생각할 만큼.

“창문을 좀 열까요?”

공기가 너무 무거운 것 같아 로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을 열었다. 속없이 산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밖을 내다보던 로하나는 이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히스.”

“네.”

“프란츠가 어제 저랑 케이든에게 찾아왔었어요.”

“네.”

히스가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양 눈썹을 늘어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R. D. 일 말이죠?”

히스가 먼저 물었다.

“네.”

로하나가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저는 케이든이 없는 사이 공작 부인을 지켜야 하는데 말이죠.”

늘 그랬던 그였다. 이번에 남부로 케이든이 로하나를 제멋대로 보내 버렸을 때도, 히스를 함께 보낼 만큼. 케이든도 그도 로하나를 지키는 데 늘 진심이었다.

“이제 저는 괜찮아요.”

로하나가 대답했다.

“히스를 여기까지 지킨 것에는 내 공도 커요?”

사실을 농담처럼 말하는 로하나를 보며 히스는 동의할 수밖에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이제는 나도 전력이에요. 칼라드리우스랑 대화도 되는걸요.”

“대화가 된다고요?”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할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어요. 서로가요.”

“운명처럼 들리네요.”

“운명인가 보죠.”

눈가가 살짝 접히며 웃는 로하나를 보며 가만히 있던 히스가 물었다.

“케이든 델클리프와 그런 것처럼요?”

순간, 잠깐 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어쩐지 히스의 말에 다른 색감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네, 그렇겠죠?”

갸웃, 고개를 기울이며 저도 모르게 안 어울리게 쑥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쾅, 성의 없이 문이 열렸다. 로하나는 깜짝 놀라 가슴에 양손을 얹었고 히스는 날카롭게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케이든이었다.

“케이든?”

“히스, 좀 괜찮나?”

“응, 보다시피.”

경계를 누그러뜨린 히스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하나, 이제 당신도 우리 전력이니 함께 있을 때 얘기하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케이든이 전서구가 보낸 것 같은 작은 쪽지를 로하나에게 내밀었다.

<샤톤웰의 일부 군대가 노프탈을 공격.

-이슬라>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죠?”

“여왕도 잘 모르는 모양이야.”

로하나의 질문에 케이든이 답했다.

“그럼 저희는 노프탈로 이동하나요?”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는 대답을 예상하며 로하나가 물었다. 그러나 케이든은 잠시 턱을 쓸더니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니요.”

“저는 수도로 갑니다.”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 오는 여름 바람이 순간 서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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