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짐승을 담듯이 상자에 가득 담긴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별 의미는 없지만 눈으로 직접 보시면 좀 더 실감이 나실 것 같아서.”
빙글거리며 웃던 남자는 우락부락한 오른손을 들더니 말을 이었다.
“폭탄입니다. 아이들 몸에 붙어 있는데, 어디 가능하면 막아 보십시오.”
“정성이 갸륵하네.”
케이든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막을 수 있을까.’
“저번과는 달리 이게…… 화학 물질이라…… 얼음 따위로 막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스위치를 빼앗아야 해요.”
이즈가 속삭였다. 케이든은 인상을 썼다. 알고 있었다. 방법이 없을 뿐이지.
“물러날 생각은 당연히 없으시겠지요, 공작 전하?”
남자도 어차피 아이들이 유효한 협상 카드는 아닐 거라 예상했다는 듯 더 기다리지 않고 스위치를 누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높은 휘파람 소리같이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빠르게 케이든과 나머지 일행을 지나쳤다.
그리고 화살이 바로 황궁군 대장의 눈에 꽂혔다.
과녁이 정확하게 명중했다. 뇌까지 뚫어 버린 화살에 남자는 정말 그대로 얼어붙듯 굳은 채 천천히 쓰러졌다.
다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위해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중에 케이든은 누가 화살의 주인인지 단박에 알았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자, 기척도 없이 나무 위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칼라드리우스가 내려놓은 것일까. 꽤 높은 나무의 가지 위에 서 있는 로하나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로하나 머리 위로 이미 사라진 칼라드리우스의 오팔빛 눈동자가 새벽빛에 반짝 빛났다.
“로하나.”
케이든이 중얼거리는 그 짧은 순간, 상황을 파악한 황궁군과 노프탈의 군대가 순식간에 맞붙었다. 전면전이었다.
“세상에, 공작 부인 아니세요?”
이즈가 새로 변모하려다가 주춤하면서 말했다.
“일단 저것들부터 해결하고 얘기하지.”
케이든이 도착한 이상 그들에게 희망은 없었다. 황궁군의 대장도 이미 그 사실을 알지 않았을까. 그랬기에 무엇이라도 해 보려고 이미 패배한 싸움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싸움은 쉽게 끝났다. 쉽다고 말할 수 있는 전투는 없지만 쉽게 끝났다.
케이든은 조용히 부드러운 흙바닥을 부츠로 쓸었다. 부드러운 흙바닥은 피를 쉽게 흡수했다. 눅눅해진 땅은 진흙처럼 질척거렸다.
‘그러게 도망들 가지.’
케이든은 싸늘한 마음으로 쌓여있는 잔해를 지켜보았다. 칼라드리우스가 순식간에 공중을 장악했기에 케이든도 평상시보다 크게 할 일은 없었다.
전투를 하면 반드시 이긴다.
아무리 대단한 함정을 파 놓았다고 해도 그것도 제국 쪽에는 한계가 있었다. 샤톤웰 전투 때와 같이 케이든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도 갈수록 불가능할 것이다.
케이든은 인상을 쓴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로하나는 화살을 쏜 후로 내내 위에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
로하나는 칼라드리우스가 내려 준 높은 나뭇가지에서 마력으로 능숙하게 바닥까지 내려왔다.
인파 속에서 케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만나면 어떤 표정과 말을 해 주어야 할까 많이 고민했다면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점점 표정만 굳어질 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케이든은 주변인들에게 뭐라 뭐라 지시를 내리는 듯하더니 이내 로하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화를 내야 할까.
울렁거릴 만큼 화가 나서 미간이 절로 좁혀지고 숨이 가빠왔다.
케이든은 예전부터 늘 그러했듯 코앞까지 와서 그녀를 바라보더니,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을음과 흙, 그리고 약간의 핏자국이 헝클어진 은발 아래 눈자위에 묻어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는데도 하나도 도움이 안 될 만큼 둘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을 때였다.
“히스가.”
로하나의 입술 사이로 계획한 적 없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히스가 아파요.”
라자르가 나타났던 이야기까지 속사포처럼, 그러나 침착하게 쏟아 내고 나서도 케이든은 그저 그녀 바로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의식은 돌아왔는데, 돌아오기까지도 너무 오래 걸렸고 여전히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에요.”
눈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케이든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화가 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팔목에 저번처럼 검은 자국이 나 있어요. 점점 진해지는 것 같아요.”
정말로 실망이었다.
실망인데, 마음껏 분노를 토로하기도 힘들었다. 너무 지친 탓이었을까.
“히스는 제가 낫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분한 목소리가 오랜 침묵을 깼다. 로하나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케이든은 고개를 한껏 숙여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하나.”
케이든이 로하나를 불렀다. 이어서 말을 하려는 순간, 로하나가 먼저 입을 뗐다.
“면목이 없는 건 아시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감히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섭섭함이 뒤엉켜 무슨 감정인지 로하나는 도무지 지금도 알 수가 없었다.
“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는 케이든은 로하나에게 닿을 듯 닿지 않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히스에게 얼마나 난리를 쳤을지도 익히 아실 테고.”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압니다.”
“왜 그랬어요?”
왜 그랬는지 로하나도 사실 너무 잘 알았다. 바르디라면 그녀를 인질로 쓰고도 남았겠지만, 케이든은 그녀를 그저 이 소용돌이에서 빼내려고 할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알면서도 하는 비난이었다. 알기에 더 비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거취는 내가 결정…….”
“로하나.”
케이든이 그녀의 말을 막아 세웠다.
“나도 압니다.”
그와 한껏 가까워진 거리는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막상 닿지는 않는 이 거리가 그들의 사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거 저도 잘 압니다.”
“아는 사람이 왜 그런.”
알면서도 따지게 된다. 대답을 해. 왜 그랬는지 정확하게 말을 하라고.
“다시 말씀드려야 될 것 같네요.”
순간, 알 수 없는 강한 무언가가 가슴을 누르고 지나갔다.
“그런 건 핑계가 안 돼요.”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서 로하나는 재빨리 케이든의 다음 말을 막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잔뜩 일그러진 로하나의 얼굴과는 달리 케이든은 평온해 보였다.
“사랑하면서 이렇게밖에 못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그는 조용하게 말했다. 혼자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로하나는 가는 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로하나의 보라색 눈동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요.”
케이든의 짙은 눈 사이로 그림자가 졌다.
“정말이지…….”
케이든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 전투도 내가 아니었으면 훨씬 힘들게 이겼을걸요?”
전투에서 졌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아서 로하나는 솔직하게 제 공을 제한해서 말했다.
“로하나.”
“절대 사실이니까 부정하지…….”
그때였다. 도무지 로하나에게 닿을 듯 닿지 않던 케이든이 그 짧은 거리를 좁혀 온 것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따질 생각이었는데……. 로하나는 갑자기 억울해져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움찔거렸으나 소용없었다. 깎아 놓은 돌처럼 단단한 팔이 그만큼 단단한 가슴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로하나는 그 낮은 목소리와 힘에 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며칠간의 긴장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두 번은 없어요.”
“두 번은 없습니다.”
가슴팍에 묻혀 웅얼거리는 소리를 용케 듣고 케이든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말이에요.”
“네.”
다시 강하게 감싸 오는 팔에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천하의 케이든도 또 고집을 피울 수 없다는 걸.
로하나는 꾹 다짐했다.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
전략 본부로 사용되고 있는 파인체이서 백작가는 일전의 화재를 막 새로 고친 티가 났다. 로하나는 새삼 여기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마력’이라는 존재조차 제대로 몰랐는데.
상념에 젖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세차게 젓는데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좀 어때요?”
“이제 괜찮을 겁니다.”
케이든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흰 셔츠가 땀에 젖어 있었다. 히스를 치료하는 게 쉬운 일은 역시 아니었다.
“제가 치유력 쪽으로 강한 줄 알았는데…….”
“아니요, 충분히 잘하셨습니다. 라자르의 마력으로 생긴 상처는 일반 상처와는 달라요.”
라자르가 또 그런 짓을 했다는 것에 케이든은 다시금 치가 떨렸지만 목소리는 태연하게 냈다.
“저는 경험이 있으니 해 볼 만한 겁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서 절 황궁군에게 넘겨야 했던 걸까요.”
로하나는 자신에게 마련된 내실에 도착하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라자르는 항상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설명하는 편입니다.”
말도 안 돼.
로하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저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히스가 정말 위험했잖아요.”
“당신 목숨도 위협했던 라자르니까요.”
“저랑은 다르죠. 그래도 히스는…….”
“카르크족이고 악스톤의 아들이니까?”
케이든이 대신 말을 마쳤다.
“네.”
“다르지 않아요.”
케이든이 마저 설명했다.
“라자르에겐 사람 하나하나는 전혀 다르지 않아요. 이용 가치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질 뿐. 그러니 R. D.와도 노프탈이 공식적으로 손을 잡지 않은 겁니다.”
로하나는 가만히 그의 설명을 들었다. 이제는 아무 의미 없을 원작이지만 라자르가 만들어 놓은 상황에 이끌려 다녔던 거라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원작의 케이든 델클리프도 로하나 하노버를 죽일 생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하진 않겠지만.
“로하나.”
케이든이 로하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며 말했다. 긴 손가락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겼다.
“일단 쉬십시오. 저는 보고를 들으러 나가 봐야 합니다.”
제발 더 고집 피우지 말라는 눈빛에 로하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뗄 체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로하나가 대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프란츠였다.
“프란츠.”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특유의 껄렁함이 살아 있는 인사였다.
“여기까지 굳이 무슨 일이지? 내가 어차피 나갈 텐데.”
케이든이 조금 불쾌한 내색을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그게, 공작 부인께서도 들으셔야 할 이야기라…….”
“뭔데요?”
로하나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오렐리아 브리의 장례식에 대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