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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군이었다.
“공식적으로 전쟁이 선포된바 공작 부인을 모셔 오라는 명령입니다.”
태산 같은 몸에 황궁군의 붉은 갑주를 둘러 입은 남자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갑옷의 투구도 벗지 않은 채였다.
“말이 이상하네요.”
히스 옆에 앉아 있던 로하나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면서 대답했다.
“전 그 반역군의 수장인 자의 아내 되는 사람인데…….”
약간 뜸을 들였으나, 남자는 말이 없었다.
“저는 그저 부인을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인질을 잡아가면서 모셔 오라는 단어를 쓰다니 고상하기도 해라.”
로하나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칼라드리우스는 재빠르게 모습을 감췄는지 창밖 어디에서도 기척이 없는 듯했다. 만약 그의 기척을 느꼈다면 황궁군이 이렇게 침착할리도 없고.
“저만 데려오라던가요?”
옆에 있는 히스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부인만 오시면 다른 사태는 없을 겁니다.”
‘다른 사태’라…….
여름밤에 풀벌레 소리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침묵을 채웠다. 라자르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바르디든 황궁군이든 누구에게든 자신의 거처를 말해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것이 최선이라서?
로하나는 말할 수 없는 불쾌감에 몸을 떨었다. 라자르가 제 맘대로 여기저기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에 환멸이 났다.
조디 때에도, 오렐리아 때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한순간도 그가 개입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함부로 사람을 장기 말처럼 쓰는 것을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었다.
장기 말이 되어 줄 생각도 더더욱 없었고.
“잠깐만 정리할 시간을 주세요.”
로하나가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자 황궁군은 조금 긴장을 푼 듯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나는 천천히 손을 놀려 히스 주변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히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흐리지만 의식이 돌아온 채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리해서 움직여 봤자 지금 몸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으리라.
로하나는 자신에게 맡겨 두라는 제 속내가 히스에게 닿기를 바라며 조금 오래 시선을 그에게 두고는 거두었다.
“가시죠.”
로하나는 천천히 황궁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문밖으로 나서자 마차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걸 타고 가나요?”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그렇습니다.”
불편은커녕 전시에 인질을 잡으러 가는 데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마차였다.
대단했다. 바르디 렌트워스는 불행을 찾아다니는 사람 같았다. 약혼까지 했다가 저버렸던 여자를 이렇게 다시 데려와야만 하고.
그 여자를 버리면서까지 무리해서 취했던 여자는 다른 목적이 생기자마자 미련 없이 죽였다.
“그럼…….”
로하나는 순순히 마차에 탔다. 시원한 여름밤 공기를 뚫고 마차는 외진 길을 달렸다. 다시 수도로 향하고 있었지만 로하나는 태연했다.
이렇게까지 고분고분하고 태연할 줄 몰랐기에 총책임자는 마차 안에 있는 공작 부인이 영 의아했다.
‘그런데 고작 여자 한 명을 데려오겠다고 이 많은 인원이 움직였어야 했나.’
무려 30명의 정예가 움직였다. 마력을 쓴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아린족이 대단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반항할 생각도 전혀 없는 것 같은데…….’
피곤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면서 말을 몰고 있을 때였다. 깜깜한 밤하늘에 구름 사이사이로 뭔가가 보였다 사라졌다.
문제의 ‘커다란 하얀 새’ 이야기를 익히 들었기에, 총책임자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찰나였지만, 엄청난 뭔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화아아아아악!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엄청난 기압 차이였다. 폭풍 같은 바람이었다. 순간적으로 너무 강한 바람이 부니 황궁군이 타고 있던 말이 손써 볼 틈도 없이 균형을 잃었다.
총책임자가 겨우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낙마한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넘어간 마차 문을 부수듯 열고 부인이 뛰쳐나왔다.
“잡아!”
그러나 너무 헛된 소리였다. 로하나가 순식간에 제 가까운 곳에 쓰러져 있던 황궁군의 칼을 집어 빼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새하얀 빛이 일었다. 저 빛이 말로만 듣던 마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통나무를 맨손으로 부수던 장정들도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데, 공작 부인은 홀로 태연하게 마른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었다.
“부인!”
로하나가 잠시 그들을 돌아보았다. 총책임자는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기압 차로 고막이 나가기라도 한 것일까.
“돌아가서 전해요.”
소리가 들린다기보단 느껴졌다. 총책임자는 이게 착각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곧 만나자고.”
로하나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더니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어서 그 바람의 원인이 드러났다. 눈이 부시게 새하얀 새는 새라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을 수준의 커다란 선박 같았다.
로하나는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라섰다. 새의 오팔색 눈동자가 소름끼치도록 선명하게 번뜩였다.
그리고 다시 총책임자의 귀가 먹먹해졌다. 새가 날갯짓을 다시 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놀랄 만큼 순식간에 그녀도 새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폭풍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만이 남았다. 무엇보다 잠깐 사이 귀에 손상을 입은 정도가 너무 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총책임자는 본능적으로 떨리려는 몸을 재빨리 추슬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떻게든 일어나려던 말의 앞다리가 자꾸 꺾였다.
‘미친…….’
어째서 마력자들을 그렇게 없애야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째서 통일 전쟁에서 마력자들을 끝까지 없애지 못했는지도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
“델클리프 공작 전하.”
리프를 포인트로 잡고 파인체이서 백작저가 작전 사령부가 되었다. 이즈가 새하얀 백금발을 휘날리며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리자일에서 온 보고입니다.”
리자일은 리프에 있는 수백 개의 작은 산간 마을 중 하나였다.
“전부 몰살되었다는 전언입니다.”
어두운 목소리에 케이든은 조용히 갑주를 둘러맸다. 거칠고 굵은 손마디가 몸통의 가죽끈 하나하나를 강하게 조였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어디 있지?”
“동쪽으로…….”
“그러니까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로군.”
“네.”
이즈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네. 찾아갈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날카로워 푸른빛이 나는 검을 허리에 차며 케이든이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이즈가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안내했다. 케이든은 속으로 이렇게 될 줄 익히 알았던 것을 오히려 저주했다.
알면서도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였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이기겠다는 욕심을 가져서 시작했다.
‘그러나 이 많은 피의 죗값을 어찌할까.’
대부분 대규모의 성벽 안에 모여 사는 아린족과는 달리, 카르크족은 상대적으로 척박한 산간 지역에 수십, 수백 개의 조그마한 마을을 만들고 모여 살았다. 노프탈 말고는 사실상 제대로 된 방어벽이 없는 것이다.
황궁군이 애초에 작정하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전투는 어린아이 손목 꺾듯 쉬웠을 것이다. 죽이든, 잡아가든, 그 보다 더 끔찍한 짓을 하든.
그러면 그들 앞에 방어벽을 구축했어야지.
쉽게 말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카르크족의 숫자가 얼마나 적은지 알면 쉽게 납득이 갈 정도로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진작에 모두 노프탈 안으로 이주시켰어야 했는데.’
오래 동안 숨어 사는 것이 익숙해진 카르크족에게 고향을 버릴 것을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리프의 중심 파인체이서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노프탈의 군대가 서쪽으로 다가와 바로 연대하였고 여기에는 일단 자기 자신이 있다.
‘다 죽여 주지.’
막 흑마에 올라타 최전선으로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익숙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그들을 붙잡았다.
“전하!”
숨이 가쁜 목소리였다.
“황궁군이 동쪽에서!”
〈전쟁 별거 없어.〉
소년의 목소리로 자조하던 라자르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머릿수가 너무 딸리면, 게임이 안 되거든.〉
카르크족은 영원히 숫자가 적을 거라 말하는 케이든에게 라자르는 슬프게 말했었다.
〈그래서 내가 방법을 살짝 찾아냈지. 조금만 기다려 봐.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씩 웃던 라자르의 얼굴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빨리 왔네.”
말을 옆구리를 강하게 차면서 케이든이 몸을 바짝 붙였다.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는 그의 눈빛은 한겨울처럼 서늘했다.
순식간에 도착한 동쪽 경계에는 오랫동안 준비한 황궁군이 미친 듯이 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파인체이서의 민간인들은 모두 노프탈로 피신을 시켰기에 다행히 피해는 군인들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빌어먹을 머릿수.’
여름 바람을 타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케이든은 제 한 손을 들었다가 훅, 내렸다.
마력을 쓰자마자 순식간에 얼음이 바닥을 깨듯이 밀고 나갔다. 황궁군의 말들이 얼음에 발을 묶이면서 거꾸러졌다.
그런데 그 순간 황궁군 모두가 미친 듯이 물러서며 대열을 맞추었다.
“전하, 이상합니다.”
갈레드도 눈치를 챈 것인지 뭔가 이상하다는 보고를 하였다. 케이든이 손을 들어 노프탈 군대가 더 달려들려고 하는 걸 막았다.
“전하!”
우렁찬 사내의 목소리가 전나무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비꼬는 목소리였다. 황궁군의 총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높은 깃발을 찬 채 케이든을 불렀다.
케이든은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뒤의 커다란 상자를 보았다.
“이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설마…….”
이즈가 탄식하는 목소리를 냈다. 사내가 덜컹, 그 상자를 열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