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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나흘이 지났다.
로하나는 기억을 더듬어 샤톤웰 전투 이후 히스가 그녀를 데려갔던 집으로 향했다.
집은 굳게 잠겨 있었고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원래는 주인아주머니가 계셨었는데. 로하나는 답답한 마음에 창문과 문을 미친 듯이 두드려 보았지만 결국 답을 얻을 순 없었다.
그때, 문득 간단한 방법이 떠올랐다. 만약 카르크족인 아주머니께서 도망을 가신 것이라면…….
집을 지키겠다는 큰 미련 없이 평상시에 숨기던 곳에 열쇠를 두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고 얼마 안 되어 로하나는 마당에 잔뜩 쌓여 있는 장작 맨 밑단에서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서둘러서 창문에 두꺼운 커튼을 내리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왔다.
두 사람이 일전에 조금은 실없게 과거 이야기를 하며 앉았던 소파에 히스를 눕혔다. 무거웠지만, 마력을 조금 사용하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땐 따뜻하게 타오르던 모닥불이 있던 자리에는 깨끗하게 재를 치운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정신 차리자.’
로하나는 그로부터 사흘 밤낮을 지새웠다. 히스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그는 계속해서 숨 쉬는 것을 힘들어했다. 의식도 돌아오지 못했다.
‘어째서…….’
케이든을 치료했을 때의 일이 아무리 옛날이라 해도 어제의 기억처럼 선명했다. 그대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짧은 기간 빠르게 익힌 지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데도 도무지 차도가 없어 보였다.
무서웠지만 무서워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로하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를 지키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히스를 불렀다.
“히스.”
그녀가 부를 때면 히스가 조금이라도 반응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찾아온 나흘째 밤이었다. 드디어 그가 숨을 쉬는 것이 조금은 편해 보였다.
“히스.”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제 그의 눈꺼풀이 조금 떨렸다.
“하…….”
나흘 만에 겨우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직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녀가 한 행동이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다는 뜻 같았다.
“히스, 갈아입을 옷을 가져올게요.”
장작이 타는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로하나는 물수건에서 물을 짜내 히스의 목과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은 후 위층으로 향했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침실 서랍장 안에는 다행히도 그때 그녀가 임시로 옷을 찾아 입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남자 옷도 있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 마차를 더 멀리 숨겨 두었어야 했나.’
돌아온 로하나는 기존의 옷을 칼로 찢어 내어 벗기고는 히스에게 새 셔츠를 간신히 입혔다. 히스는 다행히 조금씩 안정을 취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정말 오랜만에 로하나는 다시 그날을 떠올리며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생각했다.
히스의 몸에 있는 외상은 심각했다. 그렇지만 히스가 이렇게까지 당하려면 당연히 마력자가 한 소행이어야 마땅했다. 단순히 사람이 만들어 낸 외상이라면 장담컨대 로하나가 쉽게 고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히스를 공격한단 말이야? 히스와 케이든은 모르는 자가 없을 텐데.’
오해라 하기에는 너무나 이상했다. 그녀를 살려 둔 것도 이상했다. 누구보다 죽였어야 할 하찮은 아린족 귀부인이 아니었던가.
로하나는 땀이 난 이마를 손등으로 쓸면서 생각했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더워서 다시 높게 틀어 올렸다. 날이 하루하루 많이 더워지고 있었다.
‘창문을 아주 조금만 열자.’
밤공기가 들어오자 조금 나았다. 로하나는 편한 홑겹 드레스를 입은 채 다시 히스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의 몸에도 땀이 나고 있었다. 물수건에서 물을 힘껏 짜내어 그의 몸을 닦으려고 할 때였다.
그 전에도 신경 쓰이던 히스의 검게 변한 팔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진하지 않았는데……. 꼭 무언가에 포박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손목 주변은 어느새 시커메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로하나는 재빨리 히스의 팔목을 들어 고개를 돌려 가며 살폈다.
“이게 뭐…….”
그러다가, 순간 퍼뜩 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라자르가 노프탈의 공작저에 나타났던 그날. 처음으로 칼라드리우스가 나타나 그 노랫소리를 들었던 날.
그날, 라자르에게 인질이 되어 붙잡혀 있던 히스의 팔목이 떠올랐다. 케이든이 엄청난 마력으로 그를 사지에서 끌어올렸을 때, 팔목에 검은 자국이 나타났었다.
이것과 동일한 자국이었다.
“라자르.”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제야 다시 퍼즐이 맞춰졌다. 그는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려고 하고 있었다.
로하나가 떠나지 못하도록 히스를 공격한 것이다. 그녀와 칼라드리우스가 필요할 테니까. 없는 것보다는 카르크 쪽에서 싸워 주길 바라니까.
상대가 라자르였으니, 천하의 히스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라자르는 이걸 그녀가 몰랐으면 했을 것이다.
그때, 익숙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똑똑.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로하나의 날 선 목소리에 잠겼던 문이 열렸다.
“미안. 너무 무례했나.”
“무슨 짓이야. 히스한테까지 이럴 필요가 있었어?”
“그도 케이든과 마찬가지로 널 떠나보내는 쪽이었어. 둘 다 물러 터져서는.”
“그렇다고 사람한테 이런 짓을 해?”
로하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목소리가 떨렸다. 목소리뿐 아니라 온몸이 분노로 떨렸다. 아니, 분노도 아니었다.
견딜 수 없는 부당함에 대한 증오였다.
“무슨 짓이야.”
“사흘……. 아니 나흘 정도는 시간이 필요했어. 이 정도 시간이 ‘그들’에게 필요하거든.”
“뭐?”
“너는 네가 카르크족들에게 무력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나도 못 다루는 칼라드리우스까지 너를 따르니 말이야.”
라자르가 계속했다. 지나치게 마른 몸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새카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나 네 힘은 아직 너무 불완전해. 칼라드리우스와 제대로 된 의사소통조차 되지 않잖아.”
정곡을 찔린 로하나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맞는 말이었다. 로하나도 답답했다. 왜 히스가 이렇게 라자르에게 당하는데도 칼라드리우스는 울지 않았을까?
“난 너를 다른 방법으로 ‘사용’할 거야. 이미 눈치 다 챈 것 같으니 솔직히 말할게.”
라자르가 눈웃음을 지었다.
“오렐리아도 바르디를 사용한 네 짓이지?”
“응.”
라자르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이번 히스 건은 너무 급해서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지만…….”
묘하게 소년의 목소리가 섞인 그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로하나의 신경을 긁어 댔다.
“웬만하면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원칙이라.”
“‘우리들’이라.”
“나, 일 수도 있고. 우리들일 수도 있고.”
알 게 뭐야.
로하나는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아무튼, 히스의 목숨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리 나라도 죽이진 않아. 쓸모 있는 인재인걸.”
“닥쳐.”
로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라자르가 뭔가가 들린다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로하나는 의자 옆에 기대어 세워 두었던 검으로 손을 뻗었다.
“별로 소용없을 텐데.”
“사람들한테서 손 떼. 감히 아무도 사람한테 이런 짓을 할 순 없어.”
“에이. 할 수 있어.”
라자르는 투정 부리는 목소리를 냈다.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완전히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러다가 다시 어른의 목소리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
“어쩌면 다시 볼 수도 있겠다. 아님 아닐 수도.”
로하나가 미처 다시 입을 떼기 전이었다. 눈 깜빡하는 사이, 라자르가 사라졌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엄청나게 큰 소리에 로하나는 창문 쪽으로 달렸다.
칼라드리우스였다. 아주 가까워진 칼라드리우스는 아주 강력하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마치 라자르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듯, 소리는 강렬하고 다급했다.
‘누군가 오고 있다.’
로하나는 소리를 해석하며 서둘러 짐을 챙겼다. 히스를 데리고 도망쳐야 했다. 라자르가 했던 말이 떠올렸다.
〈사흘……. 아니 나흘 정도는 시간이 필요했어. 이 정도 시간이 ‘그들’에게 필요하거든.〉
누가 그들을 쫓을지는 너무나 자명했다.
로하나는 떠날 채비를 마치고 히스에게 돌아왔다.
“히스.”
제발 히스가 눈을 뜰 수 있길. 간절한 기도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때 기적처럼 히스의 눈꺼풀이 다시 떨렸다.
“히스. 정신이 좀 들어요?”
흰색에 가까운 회색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라, 라자…….”
며칠 만에 겨우 목소리를 낸 그는 라자르가 있을 때부터 의식이 있었는지 그를 부르려 했다.
“히스!”
안도감에 눈물이 저절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울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없었다.
“히스, 미안하지만 다시 움직여야겠어요.”
히스의 물빛 눈동자가 로하나를 향했다.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쫓기는 것 같거든요.”
로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히스를 부축하려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말발굽 소리에 로하나는 숨을 멈추었다.
쾅!
이어서 큰 소리가 났다.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인영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