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10화 (110/125)

110

“아니요. 남부의 제 소유 자택으로 가는 길입니다만.”

여유로운 얼굴을 유지한 채 히스가 대답했다.

“흠…….”

남자 중 하나가 히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혹시 성씨가 어떻게 되시오?”

“그걸 말씀드려야 하나요?”

최대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공손한 말씨는 유지한 채 히스가 대답을 피했다.

“머리카락 색이 옅고 푸른 것이 예쁘시네?”

다른 남자가 역시나 삐딱하게 선 채 말했다.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 아니…… 영 수상하신 분이네.”

마지막 남자가 두꺼운 어깨를 괜히 팡팡 치면서 이어서 말했다.

“카르크족이 감히 제국 밖으로 도망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입니다.”

‘에톤’은 가장 가까운 제국 밖 왕국이었다. 작지만 나쁘지는 않아 도망지로는 최고였다. 그러니 케이든도 로하나가 숨을 곳으로 그곳을 택한 것.

히스는 어쨌든 그들이 정확한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에톤’을 넘겨짚었다는 것을 알고는 한숨을 돌렸다.

“남부 수호대가 되시나요?”

프란츠 소예 후작을 떠올리면서 히스가 물었다. 이들은 저들의 아린족 영주가 카르크족 편으로 돌아선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예, 예. 그렇소.”

남자가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듯 두꺼운 손을 내밀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쩐다.

히스가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달칵, 하고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로하나가 걸어 나왔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짙은 보라색 눈동자. 히스는 혹시라도 이들이 ‘로하나 하노버’, 또는 ‘로하나 델클리프’를 알아보면 단숨에 베어야겠구나, 생각하며 긴장했다.

“아…….”

로하나는 누가 보아도 아린족 그 자체였다. 남자 셋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뜨려졌다.

“부인, 굳이 나오실 것 없는데.”

히스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희가 카르크족인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생긋 미소 짓는 로하나를 바라보며, 가운데 서 있던 남자는 떡하니 내놓고 있던 손을 이내 머쓱하게 거두었다.

“아…… 아닙니다.”

남부 수호대를 공연히 건드렸다가는 일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검은 머리카락은 수도의 귀족분들에게서만 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남자 중 하나가 어색하지만 공손한 어투로 물었다.

“함부로 신분을 노출할 수 없지만, 그렇네.”

로하나는 제 손목에 채워져 있던 팔찌 중 하나를 풀어 그들에게 건넸다.

“수고하는 값이네.”

“아…… 아닙니다!”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두꺼운 어깨를 쾅쾅 치던 남자는 몇 걸음을 물러서기까지 했다.

“받게.”

로하나는 고집 있게 그들에게 팔찌를 건넸고, 결국 그들은 그 팔찌를 받아들었다.

“부인이 피곤하실 거라 걸음을 서둘렀으면 좋겠는데…….”

남자 셋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가시죠, 부인.”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히스는 그녀의 등을 감싸며 마차로 향했다. 막 마차에 타려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깃발을 단 말 한 마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뭐지?”

깃발은 황궁군의 것이었다.

“로하나, 얼른 타시죠.”

히스가 말하며 로하나를 마차 쪽으로 재촉했다. 로하나도 그에 따라 움직이려 할 때였다. 깃발을 달고 오는 말과 정 반대 방향, 로하나와 히스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팍!

거세게 뭔가가 박히는 소리가 났다.

‘뭐지?’

그 순간이었다. 칼라드리우스가 하늘에 나타났다. 하지만 칼라드리우스는 우는 소리를 내고 있지 않았다.

“저…… 저게 뭐야?”

남자들이 당황하는 사이였다.

팍팍팍!

다시 먹먹한 파열음이 울리더니 그대로 남자들이 고꾸라졌다. 저 멀리서 황궁군의 깃발을 들고 오던 병사가 놀라서 제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달아나려고 했다.

히스의 연한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로 기이한 힘을 쓰면서 히스 자신에게도 기척을 들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로하나, 들어가십시오.”

로하나는 서둘러 히스가 말하는 대로 무릎을 높이 들어 뛰기 시작했다. 일단 빠르게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마 마력인이, 카르크족이 아린족인 남부 수호대와 함께 그와 같은 편으로 보이는 그들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긴장은 됐지만 설마, 위험하기까지 하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히스와 있었고, 무엇보다 칼라드리우스가 울고 있지 않았다.

짧게 뛰는 그 달음박질에서도 로하나는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다.

‘에이 괜찮아.’

그러나, 그 순간 뭔가가 싸늘했다.

팍!

선혈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그대로 히스가 고꾸라지는 것이 눈 안에 들어왔다. 로하나는 갑작스러운 눈앞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도대체 어떻게?

‘칼라드리우스!’

하늘을 올려다보며 히스를 부축했다.

다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서 히스가 큰 충격을 받은 듯 피를 쏟아 냈다. 로하나의 몸도 히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깃발을 달고 오던 황궁군은 빠르게 사라졌고, 로하나와 히스 둘만 남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둘뿐인 듯했다.

“히스!”

그제야 목소리가 나와서 로하나는 서둘러 땅에 쓰러진 그를 돌려 뉘었다. 팔목 부위가 새까맣게 변해 가고 있었다.

‘어째서 손목이?’

그러다가 로하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유 마력이라면 그녀가 마력이라는 존재를 몰랐을 때도 할 수 있었다.

‘정신 차려.’

로하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집중했다.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그때 케이든도 구해 낼 수 있었다. 이번에 히스도 구할 수 있다. 누가 왜 이랬는지, 어떻게 이 정도의 공격이 그들에게 가능했는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일단 중요한 것은 그를 안전하게 회복시키는 것.

‘히스가 죽는 건 말도 안 돼.’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맺히는 눈물을 서둘러 떨궜다. 시야에 방해가 됐다.

‘이건 갑자기 너무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없게 할 것이다. 로하나의 가는 어깨가 떨렸지만 꽉 깨문 입술과 단호한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

‘늦었어.’

새벽부터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도 늦었다.

케이든은 눈앞의 상황을 보고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리프에서 황궁군이 어떻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케이든은 바스락거리는 숲 사이를 누볐다. 아까의 전투로 피가 마구 튀어 케이든의 새하얀 얼굴에는 핏자국이 거뭇했다.

천년 된 숲을 포함해 숲 안에 산재한 작은 마을에서 내뿜는 엄청난 양의 연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당장에라도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때 로하나를 없애려 부린 수작하고 동일하게 불을 사용했다.

‘R. D.한테서 영감이라도 얻은 모양이지.’

케이든은 속으로 혀를 차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해 있었다.

“똑바로 서지 못해!”

포로로 잡은 황궁군에게 호령하는 카르크 군대 병사의 목소리가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울려 퍼졌다. 사망한 황궁군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앞으로 몰려올 병사가 더 많았다.

카르크족의 숫자는 아린족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다. 오죽하면 넓고 넓은 제국 땅에서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은 노프탈 한 곳이었겠는가.

그나마 중간 지대인 리프는 숲이 빽빽했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니 말을 타고 움직여야 하는 황궁군이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천년 된 숲을 말끔히 태우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도 그대로 산의 재가 되었다.

케이든은 얼음으로 만든 창을 그대로 던져서 잔불을 껐다. 새카만 연기에 살아남은 자들은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공작 전하.”

갈레드가 새까맣게 검댕이 묻은 갈색 머리카락을 털면서 다가왔다.

“리프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노프탈로 먼저 가셔야겠습니다.”

일 보 후퇴를 하자는 말이었다.

“리프를 버리라는 말인가.”

“파인체이서는 이미 큰 의미가 없어요.”

“갈레드 말이 맞습니다.”

이즈가 맞장구쳤다. 그녀도 역시 많이 지쳐 보였다.

이래서 전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노프탈을 점령하고 카르크족을 수하로 거둔 후에 이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되길 바랐다. 악스톤의 머리를 벤 후에는 다시는 이런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전투라는 건 이렇게 냉정한 법이었다.

“파인체이서에는 저희가 남겠습니다.”

트루디에게서 온 서신을 보이며 이즈가 말을 이었다.

“아니.”

케이든이 말했다.

“어차피 파인체이서는 노프탈로 가는 길목이야.”

케이든이 은발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지시를 내리겠다.”

케이든의 말에 나머지가 고개를 숙이며 모였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사람들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

“리프 쪽에서의 작전이 통한 모양입니다!”

부디에르가 기쁜 목소리를 절제하지 못하고 신이 나서 보고를 올렸다.

“그래?”

“아무려면 저희가 몇 달에 걸쳐서 준비를 해 놓고 그렇게 불을 지를 줄 알았겠습니까.”

케이든의 분노하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식의 싸움에 바르디는 늘 능했다. 그런데 그렇게 교양을 떨어서야 어떻게 제국을 통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케이든의 외모만 보고 쉽게 그를 강하다고 오해했다. 선황제도 그러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은 마음이 너무 약해 제 부인마저 저로부터 도망치게 만드는 남자가 아니었던가.

바르디는 잠시 오늘 아침에 느꼈던 황망함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설마 새벽에 그렇게 쏜살같이 도망을 칠 줄이야. 그리고 목격에 따르면 떠난 마차는 총 세 개. 바르디는 모두에게 미행을 붙였다.

“그것보다 그건 어떻게 되었나?”

바르디가 새빨갛게 무두질한 가죽조끼의 허리를 직접 조이면서 물었다.

탁, 탁 하고 신경질적으로 가죽이 조여 가는 소리가 울렸다.

“공작 부인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폐하?”

“그럼 내가 무슨 일을 물어볼까?”

신경질을 꾹 눌러 담은 황제의 말에 부디에르가 서둘러 몸을 움츠러뜨리고는 대답했다.

“그게, 미행을 하던 자에게 들었는데 약간의 돌발 상황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또 무슨…….”

로하나와 관련해서는 뜻대로 되는 것이 어쩌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바르디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부디에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미지의 공격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아아!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같이 가던 히스라는 자가 중상을 입어 두 사람 모두 남부의 한 집에 몸을 숨긴 것을 확인했습니다.”

바르디는 순간적으로 치솟았던 짜증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미지의 공격을 받아 무려 히스라는 자가 다쳤다고?”

이게 무슨 일이람?

바르디는 저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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