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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09화 (109/125)

109

케이든은 로하나가 빠르게 잠이 드는 것을 확인했다. 위스키에 건 마력으로 그녀를 잠재운 것은 비겁한 행동이었다. 그녀가 일어나면 얼마나 분노할지 눈에 훤했다.

그래도 이게 최선이었다.

케이든은 천천히 일어나 오렐리아를 확인하기 위해 지하로 향했다.

“아니……! 안, 안녕하십니까!”

당황한 말단 경비병이 놀라서 경례를 올려붙였다. 케이든은 그만하라고 손을 내저은 뒤, 그에게 물었다.

“확인을 좀 하려고 왔네.”

“그…… 그게 확인은 내일 오전이나 되셔야……. 지금은 폐하께서 밤새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했지? 증거 인멸의 의지도 전혀 없어 보였는데 굳이?

케이든은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꼈다. 그때 저를 본 한 경비병이 빠르게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가는 것이 보였다.

“특히 나는 들이면 안 된다고 했던가?”

“그…… 그게…….”

경비병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진땀을 흘렸다. 아린족들 입장에서 지금 카르크족, 그것도 마력을 쓴다는 소문까지 파다한 케이든을 마주하는 건 긴장되는 일일 터. 케이든은 느긋한 얼굴로 곧 나타날 사람을 기다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역시나.

케이든은 익숙한 목소리의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일단 따라오겠어?”

바르디는 아까와는 달리 어릴 때와 같이 자연스럽게 적갈색을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 채 간단한 옷차림으로 서 있었다.

케이든도 마찬가지였기에, 둘은 서로를 조금 낯설게 바라보았다.

“네.”

그래, 마지막일 테니. 대화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케이든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지하를 눈에 담았다가 바르디의 뒤를 따라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길은 유난히 길었고, 침묵은 유난히 무거웠다.

황제의 집무실은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각종 동물 박제까지 벽에 치렁치렁했다.

“알아, 한심하게 보는 거.”

바르디가 비꼬는 목소리로 말하며 털썩 제 자리에 앉았다. 두껍고 푹신한 가죽 의자에 사람이 털썩 앉는 소리가 울렸다.

“그래도, 그게 나야.”

“저를 보시고자 했던 건?”

앉지도 않은 채 서서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질문에 바르디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딱 두 개만 물어보고 싶어서.”

“하시죠.”

바르디가 턱, 하고 두 다리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어땠어?”

“뭐가 말입니까.”

“일이 이렇게 되니까.”

“오렐리아를 말하는 겁니까.”

절대 말실수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말씀’을 ‘말’이라고 골라서 말하는 케이든을 보며 바르디는 미간을 좁혔다.

“응.”

케이든은 침착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케이든의 답에 바르디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책상 위에 올렸던 다리까지 내리며 가까이 다가온 바르디가 입을 열었다.

“많이 슬펐나 보네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제 아버지를 그렇게까지 많이 닮을 필요는 없을 텐데.”

순간, 바르디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굳이 그렇게까지 닮고 싶었을까.”

케이든의 목소리가 차가운 칼날처럼 바르디의 얼굴을 베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또 하나 물으실 것은?”

케이든이 다시 물었다. 바르디는 일그러져서 폭발하기 직전이 되었던 얼굴을 서서히 풀며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나을 정도로 뒤틀린 미소였다.

“우리의 조부가 너에게 보냈던 편지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어?”

케이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모릅니다.”

“뭐?”

“본 적이 없어서.”

“본 적이 없다고?”

“네.”

“어째서? 당장 돌아오라는 연모의 서신이었을 텐데.”

케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읽어 보지 않았는지 진짜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는 건 그에게 로하나 뿐이었다. 조부가, 선황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자세히 아는 것이 두려워서 차마 읽지 못했다고, 바르디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질문은 다 하신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했으니 이제 가 보아도 괜찮겠지요?”

태연을 가장했지만 바르디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아마, 황제는 선황제의 마음이 어디 있었는지 그렇게나 불안했던 모양이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조부의 지나간 뜻에도 저렇게 몸이 떨리는가.

케이든은 검은 눈동자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나약한 인간.’

나약해서 악한 인간이 있다. 바르디가 그런 사람이었다. 케이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실을 나와 오렐리아가 잠든 곳을 확인했다.

그녀는 잠자는 듯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선명했다. 케이든은 겨우 그 순간, 진심으로 그녀를 추모했다. 부족한 사람이었고,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에게 추모의 인사는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곧 따라갈 수도 있겠어.’

케이든은 조용히 생각했다.

‘그래도 이 세상을 조금은 제대로 만들어 놓고 따라가지.’

황금빛 머리카락은 희미한 불빛에서도 아직 빛났다.

‘로하나는 한참 있다가 오게 할 거야.’

케이든은 추모의 기도를 마치고, 내실로 돌아갔다. 히스가 마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준비는?”

“케이든, 정말 이게 최선…….”

“최선이야.”

케이든이 대답했다.

“카르크 방식대로라면 내일,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이네.”

케이든이 대답했다.

“오늘이 미드 섬머거든.”

히스가 인상을 쓴 채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완벽한 약속의 이행이지.”

케이든이 선선하게 말했다.

*

케이든은 지난밤을 떠올리며 말에 속도를 붙였다. 빠르게 달리는 말의 발굽에 여름의 습기를 머금은 흙바닥이 푹푹 파였다.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할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조차도 그녀에게 이런 식의 행동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마력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도 말리지 못했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게 했다.

막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이번엔 그렇게 고상한 척할 수 없었다. 파렴치한이 되는 것이 그녀가 전쟁에 휘말리는 것과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아마, 용서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까 어떻게든 돌이키려 들지도 몰랐으나, 히스에 의해서 번번이 가로막히면 그녀도 포기할 것이었다.

포기하고 나면,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편하게 살면 된다.

그녀를 위해 사 둔 토지와 저택, 사업체만 해도 돈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어떻게 끝이 나든, 별문제가 없게끔 제국 밖에 있는 아주 작은 왕국, 에톤에 마련했다.

거기에서는 그녀가 아린족이든 아니든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전쟁이 끝난 후에 돌아오고 싶다면 간단하게 재산을 처분하면 될 터.

히스가 잘 설명할 것이다. 로하나도 잘 이해할 것이다. 칼라드리우스는 그녀의 안위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으니, 그조차도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되었다.’

케이든은 다시 한번 고삐를 강하게 말아 쥐었다.

그때였다.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마력으로 얼음을 만들어 올리는 순간, 수십 개의 화살이 그대로 얼어붙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공중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즈였다. 이즈는 재빨리 하강하더니 새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짧은 단발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케이든은 서둘러 말을 멈춰 세웠다.

빨리 달리던 말을 멈추다 보니 땅이 다시 깊게 파였지만, 케이든은 채 말이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뭐야.”

“리프입니다.”

황궁군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칠 것을 생각해서 여기저기 노프탈의 군대를 포진해 놓은 상태였다. 숲이 빽빽해 시야 확보도 어려운 리프보다는 다른 곳을 노릴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이지?’

그때, 다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잠깐 일단 이것부터 처리하지.”

케이든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즈에게 보고를 받아야 하는데, 너무 거슬렸다.

화살이라기엔 너무 두꺼운 화살을 제 등 뒤에서 꺼내 올린 케이든은 천천히 앞을 조준했다.

“네.”

이즈도 다시 새로 변모하면서 하늘을 날았다.

*

마차는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잘도 달렸다. 로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히스는 오히려 이렇게까지 조용한 그녀가 너무 신경 쓰였다.

케이든이 준비한 사항을 다 전해 준 후였다. 몇 대가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재산이었다. 심지어 원한다면 바꿀 수 있는 가짜 이름과 신분까지 은쟁반에 고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뛰어내릴 듯 굴다가 오늘이 미드 섬머라는 말과 함께 히스의 설명을 다 듣고는 이상할 만큼 조용해진 채 저렇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스름하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끝도 없이 너른 청보리밭이 그 마지막 푸른빛을 다하고 있었다.

“레이디.”

결국 그녀가 난리치며 소란스러운 것보다 더 불편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히스였다. 로하나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짧은 대답을 마친 로하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옆모습이었다.

히스는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때 마차의 속도가 차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청보리밭이 양 옆으로 한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길 한가운데였다.

로하나가 약간 의아해하며 고개를 더 앞으로 내밀려는 것을 히스가 말렸다. 마부가 워워 하는 소리를 내며 말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말 몇 마리 정도인 듯했다.

“잠시만 계십시오.”

로하나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서인지 얌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짓고, 마차 문을 열고 혼자 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히스 앞에는 낯선 복장의 남자들이 막 말에서 내린 채 서 있었다.

“에톤으로 가십니까.”

히스는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에톤으로 가는 길이긴 했다. 그러나 에톤까지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해도 아직도 사흘은 더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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