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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다니요?”
로하나가 물었다.
“정말입니까?”
“응, 정말.”
로하나의 질문에도 케이든과 히스는 둘이 대화를 나누었다. 히스의 푸른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고는 알겠다고 끄덕였다.
톡톡, 유리창을 치자 저 멀리에서 전서구가 날아왔다. 히스를 닮은 푸른빛의 전서구는 발을 쭉 내밀었다.
“무슨 일이에요?”
“노프탈에게 주의를 명하는 겁니다.”
히스 대신 케이든이 빠르게 대답했다.
“아…….”
하긴. 당연히 납득이 되었다. 지금 이런 난리가 터졌는데 노프탈이 아무런 경계도 하고 있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
히스는 간단하게 글을 쓰고는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새하얀 보름달 아래로 새가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럼.”
히스가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네.”
로하나도 짧게 대답했고 케이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천천히 나가는 소리를 끝으로 다시 적막함이 둘을 감쌌다.
로하나는 힘겹게 다리를 움직여 발코니에서 응접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황실의 고급스러운 벨벳이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게 느껴졌다.
“내일 아침에 바로 돌아가는 거죠?”
로하나가 물었다.
“네.”
케이든이 대답하며 그녀 앞에 앉았다. 케이든도 많이 지쳐 보였다. 아무리 그라도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로하나는 팔짱을 끼며 제 몸을 감쌌다. 차가워진 손가락이 꼭 남의 몸 같았다.
“라자르는 이럴 줄 알고 오렐리아를 보낸 거예요.”
로하나가 아까 하던 말을 마무리 지었다. 다시 떠올리니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이혼이 선포되었을 때, 당신 대신 오렐리아를 건드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케이든이 잠깐의 텀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어차피 샤톤웰 전투도 있었는데 이런 일까지 벌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로하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이건 옳지 않았다. 오렐리아에게 복수하겠다고 생각했고, 얼마든지 그럴 생각이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건 아니야.”
로하나의 혼잣말에 케이든은 아무 말이 없었다.
“도대체 라자르가 원하는 게 뭔가요? 뭔데 이렇게 사람을 자기 맘대로…….”
“통일 전쟁 때도, 그는 존재했다고 들었습니다.”
케이든이 설명했다.
“아마, 우리의 존재 이전과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하겠지요.”
순간, 케이든의 눈빛이 사실은 정체가 모호한 로하나를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 그도 어느 정도 이상하다는 눈치는 익히 채고 있었다.
“타이밍이 정말 엄청나네요.”
로하나는 그의 입에서 무서운 질문이 튀어나올 것 같아 말을 돌리려 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케이든은 긴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동의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하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카르크족이 마구잡이로 잡혀 들어가고 있는 마당에 전황후인 오렐리아가 황궁에서 죽었다.
황궁은, 그러니까 아르드골드 제국은 이 기회에 들고 일어날 카르크족을 철저히 밟을 계획인 것이다.
바르디도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기에 굳이 오렐리아를 로하나에게 넘겼을 것이다.
“저희가 오렐리아를 데려가게 둔 것도…….”
“증거 인멸을 할 생각조차 없는 거죠.”
“그렇다면, 저흰 내일부터…….”
“네, 오늘 밤은 제가 깨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움직이는 건 카르크족을 잡아들이는 경비병들의 눈에 너무 띄어서 무립니다.”
케이든이 설명했다. 짙은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걱정 안 해요. 히스는 노프탈로 먼저 보내시려는 건가요?”
케이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네.”
“군사 비밀이라도 숨기고 있는 거예요?”
로하나가 농담으로 질문한 줄 아는 듯 케이든이 겨우 엷게 웃었다.
“아닙니다.”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일단 쉬시죠.”
“……괜찮으신가요?”
“뭐가요?”
“오렐리아 일까지. 저보다 힘드실 텐데.”
로하나의 말에 케이든은 답을 생각하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뗐다.
“노프탈의 영주이자, 카르크족의 수장으로서 바르디가 한 행동은 선을 넘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우리에게 아주 좋은 명분이 생겼고.”
케이든이 다리를 꼬면서 말을 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지금 당장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 우리는 아직 그쪽 정보가 부족해 조금 곤란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더니 케이든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의 체취인 눈보라 향이 났다. 이제 여름이 다 왔는데도 희한했다.
“이 정도겠네요.”
“그렇게까지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냉정해야 합니다.”
케이든이 진심으로 말했다. 특유의 침착한 모습을 지운 채 툭 던진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당신을 이제 내가 정말 지켜야 하니까.”
달빛에 그의 수려한 얼굴이 비쳐 보였다. 하필 오랜만에 달빛 아래에서 그의 얼굴을 보아서였을까.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니까요.”
“압니다, 충분히 강하신 거. 아무도 못 다루는 칼라드리우스를 다루실 수 있으니까.”
“아직은 잘 몰라요.”
로하나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초조하게 두 손으로 무릎의 드레스 자락을 잡으려는 그녀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몰라도 괜찮고.”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게도, 쓸쓸하게도 들렸다.
“오늘이 아마 그나마 편히 잘 수 있는 마지막 밤이 될 것 같으니까.”
케이든이 가까워졌던 거리를 조금 더 좁히더니 훅, 하고 멀어졌다. 순간 숨까지 참고 있던 로하나는 그가 가는 곳을 바라보았다.
리큐어 바 위에서 반짝이는 크리스털 잔에 호박색 액체가 조금씩 담겼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이 한잔하고 쉴까요?”
로하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 옆에 섰다. 달빛이 쏟아지는 유리창 옆으로 위스키가 반짝였다.
“위하여.”
무엇을 위하는 걸까.
어쩐지 그답지 않게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로하나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케이든은 그런 그녀를 보더니 처음 보는 미소를 지었다. 이상할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왜 그래요?”
로하나의 질문에 그는 아주 가볍게 잔을 꺾어 위스키를 마시고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 사이로 위스키가 흘러 들어왔다.
짧지만 깊은 입맞춤 후에 케이든은 그녀의 몸을 쓸어내리고는 안아 올렸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침실로 향한 둘은 조용히 누워 서로를 바라보았다. 로하나는 이상할 만큼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상하게 피곤하네요.”
“쉬십시오.”
케이든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내렸다.
“당신도요.”
그 말을 끝으로 로하나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덜컹덜컹.
이상한 소리에 로하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덜컹덜컹.
여전히 다시 그 소리였다.
‘이게 뭐지?’
로하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상했다. 분명히 침대에서 잠들었는데.
이상할 만큼 몸이 가뿐했다. 정말 오랜만에 푹 자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뜨니 옆에 한 사람의 무릎이 보였다. 검은 망토에 짙은 갑주. 케이든은 아니고…….
“히스?”
“아, 레이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히스가 서둘러 일어나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마차 안이었다.
“이게 무슨…….?”
당황하니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몸은 좀 어떠세요?”
“이게 무슨 일이에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린 로하나가 달려들 듯 물었다.
“지금…… 제가 왜 여기…….”
“레이디.”
당황하는 그녀의 양손을 붙잡는 히스의 손길이 너무 능숙하고 다정해서,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일단 그가 진정시키는 대로 앉았다.
“내가 기절이라도 했던 거예요?”
밖이 지나치게 밝았다. 아침도 아니었다. 창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밖을 내다보니 태양이 머리 한중간보다 더 서쪽으로 떨어져 있었다.
“지금 몇 시예요?”
“레이디, 일단 물을 좀…….”
“지금 몇 시냐고요!”
버럭 성을 내는 로하나를 보며 히스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3시가 다 되어 갑니다.”
“말도 안 돼. 지금 이게 무슨…….”
“저도 찬성하진 않았어요.”
겨우 설명다운 설명을 하는 히스를 보며 로하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지금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노프탈이요?”
노프탈이면 그래도 이해해 보려고 로하나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
“히스, 앞으로 빨리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저흰 남부로 갑니다. 제국 밖으로요.”
“뭐라고요?”
“마력을 사용해서 꽤 멀리 왔습니다, 이미.”
“그게 무슨……. 왜요?”
히스의 눈동자를 보자 질문에 대한 대답은 딱히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기가 막혀 로하나는 재차 물었다.
“왜요?”
히스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 물을 내밀었다.
“물을 드셔야 합니다. 아무리 해가 가장 적은 마력을 걸었다고 해도, 몸이 상하셨을 겁니다.”
“지금 그런 소리를 날 걱정한다고 하는 거예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히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지금 나한테 두 사람 다 어떻게 이럴 수가…….”
너무나 당황해 목소리가 떨렸다.
“당장 돌려요.”
“안 됩니다.”
“그럼 나 혼자라도 갈 거예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 충분히 알잖아요.”
“이미, 수도에서 싸움이 시작되고 있어요. 황궁군이 노프탈을 쳤다는 소식도 정오에 들었습니다.”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뭐라고요?”
왜, 칼라드리우스는 지금 울지 않는 거지?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울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당연한 사실이 로하나의 머리를 스쳤다. 칼라드리우스는 로하나가 위험에 처할 만한 상황에서만 울었다.
지금은, ‘안전’하니까 울지 않는다.
“케이든은 어디 있어요?”
“이제 모릅니다.”
“뭐라고요?”
“수도, 황궁 근처 어딘가에 있겠죠.”
히스가 대답했다.
“저는 지금부터 레이디만을 수호합니다. 전쟁에서는 아주 빠지게 되었어요.”
“지금 이게 무슨…… 당장 돌아가요!”
거의 소리를 지른 로하나가 마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강한 악력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로하나!”
당황함과 황망함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고였다. 히스는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지만 손목을 쥐어 잡은 손에 힘을 풀지는 않았다.
“무력을 쓰지 않게 해 주십시오.”
“어떻게 이런 행동을……. 이건 너무 비겁하지 않나요?”
로하나의 입술이 떨렸다.
“그냥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로하나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히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미드 섬머.”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카르크 식으론 오늘이라고요.”
하.
로하나는 눈을 감은 채 이마를 창에 기댔다. 낮은 탄식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