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오렐리아!
오렐리아가 떠나갔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면서도 로하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렐리아의 몸은 아직 따뜻했다. 아주 가는 숨만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없다.’
어떻게 아는지 설명할 순 없었지만, 로하나는 분명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거의 떠나갔다.
“오렐리아.”
로하나는 테이블 위에서 그대로 힘없이 쓰러져 내리는 오렐리아를 붙잡았다. 힘없는 몸이 로하나에게 기대며 쓰러졌다. 빠르게 몸이 차가워져 가고 있었다.
“오렐리아!”
케이든이 바짝 다가왔다. 그 목소리 덕분이었을까. 파르르 잠자리 날개 떨리듯 긴 속눈썹이 떨렸다. 아주 흐린 눈빛의 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마지막 힘을 내 올라갔다.
늘 반짝이던 눈동자에는 힘이 없었다.
“라…… 라자…….”
로하나의 품에 안겨 있던 오렐리아가 최선을 다해 얕은 숨을 내쉬었다.
“라자르?”
속삭이는 로하나의 목소리에 오렐리아는 긴 속눈썹을 감았다 떴다.
“라자르가 왜…….”
“오라고…….”
오라고 했다고?
로하나의 눈빛에 오렐리아가 다시 힘겹게 눈을 감았다 떴다. 로하나는 오렐리아에게 그만 말해도 괜찮다는 눈빛을 보냈다. 오렐리아는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쿨럭, 밭은기침이 새어 나왔다. 아주 약간의 피가 붉은 입술에 맺혔다. 로하나는 서둘러 그 피를 닦아 냈다. 어쩐지, 아무에게도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 로하나에게 머물러 있던 오렐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옮겨 갔다.
로하나가 케이든에게 자리를 비켜 주려던 참이었다.
툭, 하고 그대로 하얀 팔이 제 몸 옆으로 떨어졌다. 다시는 볼 수 없을, 황금빛으로 빛나던 눈자위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순식간이었다.
마지막이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는데도, 갑작스러웠다. 놀랄 만큼 빠르고 쉬웠다.
어째서, 누가?
로하나는 알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오렐리아를 조금 흔들어 보았다.
“오렐리아?”
로하나의 목소리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케이든은 로하나 옆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미동도 없는 그의 주변 공기가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로하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정신 차려야 해.
애초에 원작과는 아무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옳은 판단을 내리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상황 파악을 하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탄식과 불안에 떠는 목소리가 웅성웅성 공간을 메웠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바르디 렌트워스 황제만을 제외하고.
“케이든.”
로하나는 천천히 오렐리아의 몸을 케이든에게 넘겼다.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현기증이 일었지만 로하나는 시선을 바르디에게서 떼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하자 어지럼증이 사라졌다.
케이든은 좁아진 미간을 풀지 않은 채 그녀에게서 오렐리아를 받아 들었다. 로하나도 쉽게 들 수 있을 만큼 그녀는 가벼웠다.
“황제 폐하.”
“아…… 대피하라고 했던가?”
로하나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며 바르디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몸을 돌려세우더니 부디에르에게 말을 걸었다.
“황제 폐하.”
사용인들은 고개를 차마 들지도 못했고, 나머지 귀족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나직이 울렸다.
“아니, 아까 델클리프 공작이 대피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힉슬리의 목소리였다.
“지금 광장에서 공격이 있었다는데, 어째서 그들의 우두머리인 오렐리아 브리가 죽은 거지?”
“죽은 거 맞아? 아직 모르는 거 아냐?”
최선을 다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곤 있었지만, 다 들렸다.
“황제 폐…….”
로하나가 이를 악물고 인내심 있게 바르디를 다시 불렀을 때였다.
“전 황후를 모셔라.”
바르디가 로하나의 말을 끊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조사하도록 하고. 아까까진 멀쩡했는데.”
태연한 목소리에 로하나는 발끝에서 허벅지까지 소름이 돋았다.
‘라자르라고 했다. 여기에 오라고 지령을 내린 것이.’
로하나는 천천히 오렐리아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로하나.”
그때 케이든의 목소리가 그녀를 생각에서 깨웠다.
“칼라드리우스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케이든이 바짝 다가오더니,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귓속말을 했다. 로하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조용했다.
위험한 상황이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이걸 알려 주고 싶어 했다. 로하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케이든의 눈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대피하라고 말한 이유가 뭐지, 델클리프 공작.”
굳이 작위까지 붙여 가며 바르디가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아니요.”
케이든이 대답했다. 로하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에게 동의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때 의사들이 도착했다. 이제 오렐리아를 넘겨주어야 할 것이었다.
“장례는 저희가 치르게 해 주십시오.”
로하나가 통할지 모를 부탁을 했다. 의외의 부탁인지 바르디의 푸른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가 이내 가늘어졌다.
“굳이 로하나 네가 오렐리아를 그렇게까지 챙겨야 하나?”
싸늘한 시선이 케이든을 향했다.
“남편 눈치를 보는 건가.”
“그저 황궁에서 장례식을 치를 만한 인사는 아니라고 생각하여 드린 제안일 뿐입니다.”
낮게 가라앉은 로하나의 눈을 바라보며 바르디의 시선이 잠시 동안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래.”
바르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맞겠네.”
바르디는 이내 몸을 돌려세우더니 제 휘하의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최대한 잰걸음으로 빠르게 황제의 뒤를 쫓았다.
“추모식은 예정대로 진행한다.”
바르디의 말에 부디에르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양새가 점점 멀어져 갔다.
“로하나, 잠시만.”
가만히 옆에 서 있던 케이든이 로하나의 손을 잡았다.
“네?”
그러더니 그가 로하나의 손가락에 묻은 오렐리아의 피를 살펴보았다. 뒤늦게 도착했었는지 문가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히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히스.”
“응.”
히스가 마력을 사용해 로하나의 손에 뭍은 피를 떨어냈다. 공중에 머물던 피는 히스가 가지고 있던 작은 병으로 흘러들어 갔다.
“피가 아직 굳지도 않았는데.”
텅 빈 공간에 씁쓸한 히스의 목소리가 조용히 흩어졌다. 로하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추모회는 그 후로 아무 일 없이 흘러갔다. 초여름 밤은 조용했다. 광장에서의 사태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황궁에서만큼은 성대한 추모회였다.
보름달이 지나칠 만큼 환했다. 오랜만에 하늘을 보는 것 같아 로하나는 테라스에서 가만히 달을 바라보았다.
‘라자르가 장례식에 가라고 했다라.’
굳이 원래 야심 차게 준비했던 계획을 바꿔서, 그것도 일단은 한 배를 탄 케이든이나 노프탈의 사람들 모두에게 비밀로 한 채 장례식에 나타난 오렐리아.
죽는 순간, 그녀는 굳이 라자르가 그녀를 여기로 보냈다는 말을 남겼다.
조디가 죽던 날이 떠올랐다. 저절로 몸서리가 쳐져서 로하나는 몸을 떨고서 다시 집중했다.
칼라드리우스가 알리려고 했던 것은 오렐리아의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그 밖의 것들은 칼라드리우스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밀리가 찾아왔고, 케이든이 자력으로 사건을 막았다.
오렐리아가 갑자기 살해를 당했다. 절대로 자살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건 확실했다.
‘누가?’
순간, 짙은 구름이 밝은 보름달을 가렸다. 한밤이 더 짙게 느껴질 때였다.
“로하나.”
일을 마쳤는지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케이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요.”
로하나는 테라스에 자기가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케이든.”
케이든은 복잡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바짝 옆에 선 그는 계속하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자르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 존재가 ‘항상 존재’하는 곳이 있습니다. 조디 일이 있었을 때 제가 히스랑 갔던 곳이죠.”
“‘항상 존재’한다고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그렇습니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죠. 어차피 사람이 아닌지라.”
이어서 케이든이 물었다.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오늘 일로 카르크족이 어마어마하게 체포되었고, 앞으로도 될 거예요.”
로하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리고 카르크족의 상징인 오렐리아가 죽었어요.”
로하나는 여태까지 무던히도 자주 떠올렸지만, 다시 떠올릴 때마다 소름 끼치는 소년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미안해.〉
아스팔트에서 죽어 가는 자신이 들었던 그 목소리.
〈네가 필요했어.〉
필요하다라.
‘잠깐만.’
로하나는 케이든의 팔을 무심코 짚으며 생각을 이어 갔다.
“라자르가 당신이 필요하다고 했었다죠.”
케이든이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말했다. 둘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마주쳤다.
“이제는 제가 아니라도 쓸 만한 사람이 생겼던 거네요.”
오렐리아 브리.
라자르는 늘 그러했다. 자기가 움직이지 않고 남을 이용해 누군가를 움직였다.
조디를 이용해서 로하나를 해치려 했고, 오렐리아를 이용해서 조디를 해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로하나는 깊은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바르디를 이용했나 봐요.”
어두운 구름 속에서 다시 환하게 보름달이 비추었다. 창백한 로하나의 얼굴에 달빛이 빛났다.
〈네가 움직이면 자꾸 판이 어그러지더라고.〉
광장에서 만났던 라자르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라자르는 바르디가 이럴 줄 알았던 거예요.”
“대단하군.”
케이든의 목소리에 쓰디쓴 냉기가 어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히스였다. 그도 상당히 지쳐 보였다.
“어떻게 됐어?”
“검출이 되지 않는 독이지만…….”
“찾아내셨나 봐요.”
로하나가 조금 급하게 그의 말을 대신 이었다.
“네.”
히스가 대답했다.
“황궁에서는 원인 불명의 심장마비로 결론 내렸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다만, 저 멀리 중앙 수사관이 외치는 소리가 여기 손님 내실까지도 울렸다. 카르크족들의 체포 소리였다. 고함 소리와, 둔탁한 둔기의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히스, 먼저 가는 게 좋겠어.”
그때, 케이든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