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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악!”
사람들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얼음 깨지는 소리와 기이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히스는 프란츠의 뒤에서 목에 칼을 들이댔다.
“그만.”
프란츠는 깜짝 놀라 숨을 몰아쉬고는 양손을 바짝 들었다. 그는 늘 그렇듯 직접적으로 누구와 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뭡니까.”
단지 깊게 팬 미간에서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는 강한 항의가 배어 있을 뿐.
“이게 뭐냐니. 너희야말로 누가 함부로 움직이라고 했나.”
“약간의 자극이 필요한 황자 폐하 아니셨나.”
여전히 능글거리는 목소리에 히스는 불쾌감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프란츠를 내리눌렀다.
R. D.의 나머지 수하들 대부분이 케이든의 얼음을 보자마자 반항하지 않고 그대로 흩어졌다. 유난히 침착하고 빠르게 자리를 비우는 R. D.의 움직임이 대혼란 중에도 히스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케이든은 얼어붙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긴장을 늦추긴 일렀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제압이 너무 쉬웠다.
히스가 프란츠를 잡고 있는 것이 우선 시야에 들어왔다. 황궁군이 뭐라 뭐라 사람들에게 외치다가, 언뜻 보이는 카르크족들을 무작정 잡아 세우는 것도.
“케이든!”
익숙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비명 소리, 군인들의 고함 소리, 정신없이 무언가가 넘어가고, 박살 나는 소리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분명 멀리서 작게 들렸는데도, 아주 선명했다.
‘로하나.’
그 미친 라자르가 그녀를 이번에도 건드릴 수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케이든은 그 순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확실하게 알았다. 전쟁에서 이기겠다고 그녀를 최우선으로 두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확실히 깨달은 덕분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저건……!”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하늘과 주위를 둘러보던 로하나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멈췄다.
로하나의 시선이 얼어붙은 광장 바닥에 이어 분수대에 머물렀다. 기이할 정도로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을 보여 주듯이 작은 쇠구슬 같은 파편 하나하나가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순간을 포착해 낸 사진처럼, 비현실적인 찰나의 순간이 얼어붙어 있었다.
“일단은.”
케이든은 재빨리 주변을 다시 경계하며 대답했다.
“일단 저긴 히스가 저렇게 잡아 뒀습니다.”
케이든이 가리키는 곳에 히스가 프란츠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히스는 요령 좋게 황궁군의 눈을 피해 인파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희도 빨리 벗어나야죠.”
로하나가 손을 내밀었다. 케이든은 내민 로하나의 손을 붙잡아 말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어떤 점이?”
로하나가 모는 말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자, 뒤에서 황궁군이 멈추라고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하나는 당연히 그 말을 무시하며 말을 달렸다.
“칼라드리우스가, 여기에 멈추지 않았어요.”
“뭐라고요?”
케이든은 바짝 로하나에게 몸을 기대며 되물었다. 로하나는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가며 능숙하게 황궁군을 따돌렸다.
“이번엔 황궁이에요.”
살짝 뒤를 돌아본 로하나의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오렐리아는 가만히 앉아 라자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함께 같은 자리에 있기만 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지척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찻잔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높고 넓은 황궁의 창 너머로 땅거미가 지는 하늘이 비쳐 보였다. 그때,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작은 응접실에 바르디가 들어왔다.
오렐리아는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빈틈없이 올려붙인 적갈색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달라보였다.
“오랜만이네.”
바르디는 모든 사용인을 한 손으로 물린 뒤 그녀 앞에 섰다.
아마, 그녀가 나타났을 때 딱딱하게 굳은 케이든의 얼굴을 보며 그는 또 기뻤을 것이다.
그의 세상은 케이든 필립 델클리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케이든이 힘들어하는 모든 일은 그에게 기쁨이었고, 케이든의 즐거움은 그가 반드시 빼앗아야 하는 것이었다.
오렐리아는 자신이 그 빼앗아야 하는 것이 되어 봤기에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네, 오랜만입니다 황제 폐하.”
오렐리아는 사뿐하게 말하며 그가 자리에 앉기까지 기다렸다. 바르디는 비스듬하게 앉아 오렐리아에게 앉으라는 듯 턱짓을 했다.
“요즘 카르크족들에게서 아주 명성이 자자하던데?”
바르디가 테이블을 탕탕 치자, 다시 문이 열리고 다과상이 들어왔다. 장례식 예의에 맞추어 아무 간도 하지 않은 크래커와 민트 티였다. 사용인은 조용히 다과를 내려놓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오렐리아는 입을 뗐다.
“네. 그렇더라고요. 제가 뭘 어쩌려는 것은 아닌데…….”
“그쯤 해 둬.”
오렐리아의 뻔한 이야기가 지겹다는 듯 바르디는 비웃는 웃음을 섞어 툭 말을 던졌다. 오렐리아마저도 이 상황이 우스워 결국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해서 나를 도발하고 싶었나?”
“아니요.”
“그쯤 해 두라니깐.”
이번엔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낸 바르디는 크래커를 하나 집어 입에 툭 던져 넣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넌 나한테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지?”
의외로 서정적인 질문에 오렐리아는 황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도 정확히 그게 궁금했는데, 절묘하네요.”
“뭐가 궁금했는데?”
“황제 폐하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바르디는 너도 그건 알지 않냐는 듯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이 너무 싸늘해 그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가진 적 없던 오렐리아도 가슴이 철렁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황후가 되고 싶었다?”
“네.”
“카르크족이라는 천박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네.”
“케이든은?”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고 생각해 오렐리아는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라자르가 굳이 어떤 대화를 하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시간에 원했던 대화를 하는 것으로 보내도 나쁠 것은 없겠지.
“제가 많이…….”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뭔가가 꾹 누르기라도 하는 듯 목이 메었다.
‘맙소사, 미쳤어.’
오렐리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정도인가.”
바르디는 예상했다는 듯 말하고는 찻잔의 차를 마셨다. 오렐리아는 저도 당황스러운 목메임을 풀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조금 전과 달리 손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찻잔이 잔 받침과 부딪쳐 소리가 났다. 민트 티는 그 와중에 향긋했다.
뭔가를 넘기고 나서야 그나마 여력이 생긴 오렐리아는 말을 이었다.
“옛날 일이지요.”
“케이든은?”
“아니요.”
더 가슴 아픈 현실을 받아들여서인지 말이 술술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는 헛수고를 하신 셈이지요.”
생글 웃는 오렐리아를 보자 바르디의 빙글거리던 얼굴이 험악하게 굳었다. 오렐리아는 이상한 통쾌함을 느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바르디의 시선은 오렐리아의 눈에서 손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이 이동하면서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밝아졌다.
그 시선과, 밝아지는 표정이 말할 수 없게 불쾌했다.
똑똑.
느닷없는 노크 소리가 숨 막힐 듯한 정적을 깼다.
“뭐지.”
“폐…… 폐하!”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미친 듯이 벌컥 문을 연 사람은 부디에르였다.
“뭔데 또.”
“과…… 광장에서…….”
그의 뒤로 대규모의 황궁군이 집결을 한 것이 보였다. 군사를 담당하는 귀족들의 얼굴도. 오렐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에서 뭐!”
바르디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 별 피해까지는 없었지만, 뭔가 시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무슨 시도.”
“카르크족이 마력인지 뭔지를 사용하여 중앙 광장 분수에서 뭔가를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별 피해가 없었다는 거지?”
“그…… 그게…….”
부디에르는 횡성수설 보고받은 바를 설명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분수대의 폭발을 막은 것은 케이든일 것이다. 그럼 R. D.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인데.
“카르크족을 모조리 붙잡아 이 사태의 전말을 밝혀야 합니다.”
뒤에 서 있던 귀족들과 군인들이 그 말에 강하게 동의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바보들. 누구 덕에 다들 목숨을 구한 줄도 모르고.’
오렐리아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험악한 시선이 그녀에게 꽂히고 있었다. 카르크족의 여신 같은 존재가 된 전 황후가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그들 눈에 지금 어떻게 보일지 불을 보듯 훤했다.
오렐리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라자르가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러니 긴장하지 말자.’
그런데 그때였다. 뭔가 이상했다. 자꾸 긴장을 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이래, 이 정도 일로 내가 긴장을 다 하고.’
두근두근.
심장의 두근거림은 점점 더 빨라질 뿐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장이 빨라지는 만큼 호흡이 가빠오고,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다들 진정하지.”
바르디의 목소리가 미끄러지듯 유려했다.
“현장에 있었던 카르크족은 물론 수도 안의 카르크족까지 전부 체포해.”
그때, 쾅 소리가 나면서 모두의 시선이 복도 끝으로 쏠렸다. 내실 안에 앉아 있던 바르디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서 있는 사람들의 반응만 보아도 누가 나타났는지 바르디는 알 것 같았다.
“어디를 다녀온 건가.”
빠르게 바르디와 오렐리아가 있는 내실 앞에 도착한 케이든과 로하나는 그 둘을 바라보았다.
“일단 대피하시죠.”
“뭐?”
바르디는 케이든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대피라니?”
“그…… 그리고 그 이상한 마물이 나타났습니다.”
“그걸 이제 보고하나?”
바르디가 부디에르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 일단 카르크족 체포 명령이 중요했어서…….”
“미친 새끼들. 한심하긴.”
바르디는 화를 내다가 케이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여기 있는 편이 공격하기 더 좋을 텐데?”
“그렇게 여유를 부리실 때가 아닙니다.”
“악!”
둘의 실랑이 사이로 단말마적인 비명이 울렸다. 로하나의 비명이었다. 로하나는 손으로 양쪽 귀를 감싼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왜 그래.”
케이든이 로하나를 재빨리 붙잡았다. 바르디 역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케이든은 그런 황제를 경계하면서도 일단 로하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아닙니다.”
로하나는 조금 넋이 나간 얼굴로 허리를 바로 펴고 섰다.
“뭔가 늦었어요.”
“늦다니요?”
“로하나, 왜 그래.”
케이든과 바르디의 말이 잇따라 귓가에서 울렸다. 로하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오렐리아를 바라보았다.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였다.
“꺄아아아악!”
시녀의 비명 소리를 필두로 여러 사람의 비명이 내실과 복도를 채웠다. 선혈이 순식간에 대리석 바닥에 뿌려졌다. 작은 체구가 쓰러지는 소리는 가냘플 만큼 작았다.
로하나의 눈동자에 핏대가 서고, 눈물이 어렸다.
오렐리아의 목숨이 떠나갔다. 로하나는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