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05화 (105/125)

105

“같이 협력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라자르는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잔뜩 쓴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단 한 마디를 내렸다.

“지금, 칼라드리우스를 멈춰.”

원래의 마른 몸과 달리 유난히 더 커진 듯한 그의 몸은 위압감을 주었다.

“여기에서 승부를 내고 싶은 거야? 카르크족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어? 노프탈 군대는 아직 노프탈에 있다고!”

답답한 마음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라자르는 별다른 반응 없이 붉은 눈을 치켜떴다.

“다시 한번 말하지. 칼라드리우스가 광장으로 가는 걸 멈춰.”

“왜? 그럼 너가 계획했던 그 폭동에 차질이 생기나 보지?”

라자르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붉은 눈동자는 심연처럼 바닥을 알 수 없게 깊었다.

“정말로 원하는 게 뭐야?”

“로하나 하노버.”

오랜만에 듣는 결혼 전의 이름에 로하나는 움찔했다.

“그리고 너의 옛날 그 이름도 나는 기억해.”

로하나는 순간적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꼈다.

“어쩌다 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갖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라자르가 하늘을 노려보며 말했다. 칼라드리우스는 광장 쪽을 향하다가 이쪽을 향해 멈추어 있었다. 워낙 땅에 가까워 이제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정말 고지식하고 답도 없는 인간인 건 확실하네.”

로하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듣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굳이 그의 말을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다.

라자르가 칼라드리우스의 광장행을 원치 않는다는 건 한편으론 안심되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생각대로 다른 소란으로 폭동을 막으면 라자르의, R. D.의 말도 안 되고 무모한 계획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상대로 흘러가던데. 다들 누군가가 약간 찔러 주기만 하면 딱!”

라자르가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거짓말처럼 예상한 대로 행동하거든.”

“그렇게 잘 아나 보지?”

로하나가 기가 차 독기 어린 목소리로 비꼬았지만, 라자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너는 좀 어렵더라고.”

라자르는 순순히 인정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정말 놀랄 만큼 소름 끼쳤다.

‘이럴 시간이 없어.’

어쨌든 라자르를 무시하고 로하나가 기수를 돌려 광장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또 선택을 하게 될 거야.”

로하나는 몸을 돌렸다. 더운 듯한 여름 바람이 작은 회오리를 만들며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땐, 그래도 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선택을 하길 바랄게.”

고삐를 쥐고 있는 로하나의 하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정말로 네 마지막 기회일 테니.”

라자르는 칼라드리우스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짓더니 몸을 돌렸다. 두 번째 미소였다.

미소?

로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광장으로 향했다. 칼라드리우스를 따라가야 했다.

*

중앙 광장에는 건물만큼 높고 화려한 분수에서 시원하게 물이 쏘아 올라갔다 떨어지고 있었다.

케이든은 말에 탄 채 사람이 구름처럼 모인 광장 근처를 조용히 맴돌았다.

모여 있던 군중 속에서 프란츠를 찾는 것은 케이든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케이든은 우선 조심히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를 주시했다.

열심히 가린 스카프와 망토로 보았을 때 프란츠는 남부의 소예 후작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그들이 놓친 너무나도 어이없는 사실에 케이든은 탄식을 내뱉었다.

남부의 후작, 프란츠 소예. 그 정도 지위라면 선황제의 장례식에 반드시 참가했어야 했다. 그가 R. D. 편에 서 있다는 것은 거의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번 장례식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광장 폭동이 아닐 수도 있겠군.’

유난히 불안해하던 로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칼라드리우스의 소리가 그녀에게는 들렸을 것이다.

로하나가 그만큼 불안해했다는 것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케이든은 속으로 마음을 다시 한번 단단히 먹었다.

‘어차피 닥칠 싸움이라면 이것도 나쁘지 않겠군.’

장례식에서의 난이라.

선황제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의미 없는 상념에 젖었다가 케이든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는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은 계속 프란츠를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갑자기 그의 옆에 가까이 다가왔다. 의도적인 움직임에 칼에 손을 뻗어 내지르려는 그 순간,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막았다. 히스였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서해안에 칼라드리우스가 나타났어.”

히스가 빠르게 대답했다. 작은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긴장하고 있었다.

“뭐?”

“레이디는 지금 서해안으로 달려갔고.”

“거기를 혼자 가게 내버려 뒀다고?”

히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사실상 그녀를 더 내버려 두고, 싸움에 방치했던 케이든이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며칠 전에 그가 부탁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그가 왜 이러는지 너무나 자명했기에 히스는 순간 들었던 편협한 마음을 서둘러 털어 내어 버렸다.

“어쩔 수 없었어. 칼라드리우스를 다룰 수 있는 건 레이디뿐이야.”

케이든과 히스는 군중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나오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알다마다. 케이든은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이건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그녀는 ‘떠날 사람’이었다. 호기롭게 그녀에게 다시 찾아가겠노라고 늘 말했지만, 사실은 그것조차 자신이 없었다.

목숨을 그때까지 보존할 수 있느냐는 둘째 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 최선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으니까.

“제기랄.”

낮게 욕을 지껄이는 케이든은 그럼에도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히스도 그를 눈치채고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프란츠 소예가 있었다.

“저 새끼가…….”

“기다려.”

케이든은 흥분해서 달려 나가려는 히스를 막아 세웠다.

“왜.”

“아직 아니야.”

지금 공연히 프란츠를 멈춰 세웠다가는 그들이 다른 계획을 그새 세울지도 몰랐다. 반드시 멈춰야만 할 때 멈춰야 했다.

우선 케이든과 히스는 조용히 그에게 접근했다. 광장에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구름처럼 모이기 시작했다.

일부 마실 거리나 음식을 파는 상인들도, 앉을 의자를 마련해 놓는 가게들도 조금씩 분주해졌다. 땅거미가 내리고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저기 하늘을 주시하던 케이든의 눈에 칼라드리우스가 들어왔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이어 들리기 시작했다.

케이든의 시선에 프란츠가 다시 꽂혔다. 프란츠의 얼굴이 당황한 듯 굳어지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수하가 뭐라 뭐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R. D.에서 이 정도 일을 수행하는 데 분명 프란츠가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케이든은 확신을 가지고 집요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저게 뭐야?”

“어머, 저거 그때 그거 아니야?”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제 나름대로 지켜지고 있던 질서가 조금씩 흐트러지며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세상에, 점점 가까워지잖아!”

여름 저녁의 하늘에 새하얀 새는 빠르게 고도를 낮췄다. 그때, 케이든의 눈에 프란츠가 눈을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케이든의 검은 눈동자가 분수대를 향했다 돌아왔다.

아직.

아직이었다.

프란츠가 수하로 보이는 몇몇과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케이든은 조용히 말에서 내려 무리에 섞였다.

지나치게 큰 몸이 눈에 띄었지만, 프란츠도 그 어떤 R. D.도 지금은 최소한의 경비와 치안을 위해 서 있는 황궁군을 신경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광장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좋은 곳은.’

R. D.에 제아무리 마력자가 많다고는 하나, 개인이 할 수 있는 공격은 한계가 있다. 분명 무기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들이 자주 사용했던 폭탄이 가장 유력하겠지.

웅성거림이 빠르게 커져 가고, 혼란이 거의 해산으로 이어질 것 같은 순간, 프란츠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바로 분수대 가장 꼭대기였다.

‘그럼 그렇지.’

폭탄을 터뜨리기 가장 좋은 곳은 광장의 정가운데일 것이다. 그리고 분수대는 광장의 정가운데, 그것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몸에 박힐 만한 구슬을 쏟아 내는 폭탄을 터뜨린다면, 대량 살상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할 만큼 칼라드리우스가 더 가까워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멀어지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미 공황 상태인 사람들이 우왕좌왕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할 때였다. 프란츠의 입술이 떨어졌다.

‘역시나.’

케이든은 순식간에 마력으로 분수대를 겨냥했다. 바닥에서부터 냉기를 품은 마력이 온 광장을 치고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주위의 모든 액체를 얼렸다. 바닥에 새하얀 성에가 어렸다.

폭탄이 설치되어 있던 곳에도 반드시 약간의 습기가 있을 것이다. 분수대니까.

‘모두 얼려 버리면 그만이다.’

쩡 하는 소리를 내며 분수대의 모든 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폭탄이 터지는 그 순간에 얼어붙은 물줄기는, 그것도 마력의 힘이 담겨 기이할 정도로 강하게 강화된 얼음은 폭탄을 잡아먹을 듯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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