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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거야?”
로하나가 에밀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주방에서 그걸 어떻게 알아?”
“카르크족은 황실의 사용인으로 많이 근무하고 있어요. 대부분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신분을 갈고 들어온 것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신분까지 간 사람들은 다시 카르크족으로 돌아가지 못하죠.”
에밀리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처럼요.”
“이걸 우리에게 알리는 이유는?”
케이든의 냉정한 목소리에 에밀리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시선은 로하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카르크족이 질 거라고 제가 예전에 말했었죠.”
“그래.”
“그러니 지는 편으로 굳이 기어들어 가는 것은 바보 같다고요.”
“그래.”
로하나 역시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정말로 질 거예요. 어차피 광장에 있는 사람을 다 죽여도 황궁은 멀쩡할 거잖아요.”
카르크족의 전략이 답답하다는 듯 에밀리가 말했다.
“에밀리, 넌 카르크족이 지는 편이 낫지 않아?”
로하나의 질문에 에밀리의 눈썹이 움찔했다.
“대량 학살이 다시 시작되면 나도 무사하지 못할걸요. 여기 주방이 그래서 난리가 난 거예요. 전면적인 색출 작업이 시작되면 어설픈 신분 위조 같은 것은 금방 들통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길 원하는 거지?”
“말려 주세요.”
케이든의 질문에 에밀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장례식까지 오신 건 화해의 뜻도 있는 것 아니셨어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기도 했겠구나 싶어서 로하나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보면 그래도 좋았을지도 몰랐다.
“무의미한 짓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즉시 공작님도 위험해지실 거고요. 공작 부인도요.”
에밀리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조디도 참 똑똑했는데, 에밀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고마워.”
로하나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에밀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지 생각해 볼게. 시간은?”
“추모 행사 중이라는 것밖에는 몰라요.”
해가 질 때부터 사람들은 모두 광장에 모여 금식하면서 선황제를 추모할 것이다.
“그래, 알았어.”
에밀리가 나가고 나서 셋은 생각에 빠졌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케이든이었다.
“내가 나간다. 지금 그런 같잖은 폭동을 일으키는 걸 난 허락한 적 없어.”
“나도 같이 가지.”
“아니, 넌 로하나 옆에 남아.”
오렐리아까지 나타난 걸 보면 황궁도 알 수 없다고, 지금 하는 수작들이 또 로하나를 건드리려는 것이 분명하다는 케이든의 말에 히스도 주춤했지만 이내 동의했다.
두 남자가 주고받는 말을 듣던 로하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둘을 가로막았다.
“혼자서 그런 공격을 막는 건 무리예요.”
로하나의 말이 사실이었다. 어떻게, 무슨 수로 막겠는가.
“괜히 그 자리에 있다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습니다.”
케이든이 조용히 말했다. 로하나의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 역시 불안하고, 불길하다 했다.
“이러나저러나 위험해지긴 어차피 마찬가지야.”
갑자기 편한 어투로 조용히 그녀를 달래는 낮은 목소리에 로하나는 바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일단 당신의 안전이 최우선이에요.”
케이든이 로하나의 어깨를 살짝 잡고는 이내 히스에게로 다시 몸을 돌렸다.
“행사가 시작되는 시간을 알아봐 줘. 나는 황궁이 아니라 광장에서 참석하겠다고 일러 놓고.”
“부부가 따로 있는 것이 보기 이상하지 않겠어?”
히스의 질문에 케이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야.”
행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케이든은 굳이 한 번 더 말리려는 로하나를 두고 단호히 걸음을 옮겼다.
*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자 히스가 추모회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렸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칼라드리우스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로하나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칼라드리우스.”
“네?”
옆에 앉아 있던 히스가 되물었다.
“칼라드리우스를 사용하면 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 그렇게 가깝게 다가왔던 거야.”
로하나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대답했다.
“칼라드리우스가 나타났습니까?”
히스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것 같아 로하나는 재빨리 설명했다.
“그런데 그것이 나타나면 뭐가 달라질 거란 말입니까?”
“제아무리 R. D.이고 라자르라고 해도 마물이 나타나는 상황에선 당황할 거예요. 칼라드리우스는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니까 반드시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만들 수 있어요.”
흥분해서 말하는 로하나를 히스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칼라드리우스를 광장으로 데려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레이디가?”
히스가 묻는 말에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했다.
“소란은 좀 있겠지만……. 그리고 제국 쪽에서 좋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인명 피해만 없으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거예요.”
히스는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히스!”
“황궁으로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케이든에게 말을 하지 않고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어요.”
로하나는 답답한 마음에 다시 여러 번 호소를 해 보았지만 히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히스가 다시 질문을 했다.
“레이디.”
사뭇 낮아진 목소리에 흥분해서 마구 그를 설득하던 로하나가 순간 차분해졌다.
“네.”
“어째서 그렇게까지 온몸을 던지시는 겁니까.”
단정하게 올린 연한 푸른빛 머리카락이 노을에 비쳤다.
“네?”
“어차피 계약일 뿐인 결혼이었고, 레이디는 너무나 사람 좋게 최선을 다하셨어요.”
순간, 힘이 들어가 있던 로하나의 손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힘이 빠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또 불안했다.
“케이든이 당신과의 결혼을 그냥 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케이든의 성격에 그랬을 리가 없어요. 아마 당신을 보내 줄 날을 미리 정했겠죠.”
히스에게 굳이 발뺌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로하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지금 제 도움 없이는 이기는 것이든 전쟁을 막는 것이든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 히스도 잘 알지 않아요?”
“레이디가 위험해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네?”
“케이든이.”
히스는 몇 초의 정적 후에 케이든의 이름을 댔다.
“케이든이 원치 않습니다.”
“알아요.”
로하나는 순간 든 미심쩍은 느낌을 훌훌 털어 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그래요.”
“레이디도…….”
“아니다. 알아서가 아니라.”
로하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내가 좋아해서 그래요, 그 사람을.”
말하면서도 새삼 어이가 없었지만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무모하지 않아요. 여태까지 단련한 게 있고. 아린족이 마력을 다룰 땐 그 능력이 출중하다고 고서에도 쓰여 있는 걸 도서관에서 우리 함께 확인하지 않았던가요?”
로하나가 한층 가깝게 다가와 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히스는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웃었다.
똑똑.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마님, 히스 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함께 노프탈에서 온 사용인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히스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지금, 서해안 쪽으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답니다.”
복도에는 서둘러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장례식 때문에 장식해 놓았던 새하얀 튤립이 정신없는 와중에 엎어지며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무슨 경보?”
“그게…… 다시 ‘그것’이 나타났다고.”
“그것이라니.”
“칼라드리우스요.”
로하나가 히스의 등 뒤에서 대신 대답했다.
“칼라드리우스요?”
로하나는 한쪽 귀를 손으로 감쌌다. 들어 본 적 없이 강한 소리였다. 소름끼치게 아름답다기보단, 소름끼치게 불길한.
*
다각 다각 다각.
도로의 돌판을 부술 듯이 빠르게 짙은 밤색의 말이 달려 나갔다. 고삐를 단단히 쥔 로하나는 히스를 어떻게든 케이든에게 보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케이든에게 가야 해요. 가서 이 사실을 빨리 알려요.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푹 눌러쓴 망토와 얼굴 주위를 두껍게 두른 스카프를 뚫고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다 내음에는 미묘한 화약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때 로하나가 서둘러 말을 멈춰 세웠다. 급하게 서느라 거의 미끄러질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선 로하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주도로가 이미 군인들로 막혀 있었다.
‘이런.’
로하나는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일전에 오렐리아 납치 사건 때 이리저리 돌아간 기억이 있어서, 감시를 피해 해안가로 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칼라드리우스의 소리는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어째서, 왜 부르는 걸까. 왜 거기에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을까.
‘무엇을 원하는 거지.’
현신이라면 이제는 칼라드리우스의 말뜻을 알아들을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주치지 않으면 아무래도 어려운가 보다.
‘어서 칼라드리우스와 마주쳐야 해.’
빠르게 달려 나가던 로하나는 어느새 서해안에 도착했다. 추모 행사에 참여하려고 이동하고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소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황궁군은 여전히 공중을 장악하지 못하고 함대에서 의미 없는 폭탄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로하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땅거미가 진 하늘에 새하얀 칼라드리우스가 넓은 날개를 펴고 떠 있었다.
‘뭘 원하는 거야?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맞아?’
그런 로하나의 질문에 대답을 할 생각은 없는 듯 칼라드리우스의 오팔색 눈은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다시 발사해! 함대는 뭘 하는 거야!”
한 소대가 소란을 피우면서 옆을 지나갔다. 로하나는 서둘러 그들에게서 비켜났다.
그때였다.
칼라드리우스가 커다란 날개를 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로하나는 숨을 들이켰다.
광장 쪽이었다.
로하나가 광장으로 기수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새하얀 말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가로막았다. 가까스로 충돌을 피한 그녀가 노려본 말 위에는 어제 본 얼굴이 또 있었다.
“라자르.”
“움직이지 말라니까, 진짜.”
그의 빨간 눈이 짜증을 애써 감추며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