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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허리를 숙였던 오렐리아는 고고하게 고개를 올렸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아연실색한 와중에 바르디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전 황후께 예우를 갖추어 모셔라.”
로하나는 그런 말을 하는 바르디를 보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제법 담담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는 처음 보는 것 같은 냉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지.’
로하나는 아침부터 계속 느껴지던 불안함을 느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여운 사용인들은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오렐리아를 꽤 앞자리까지 안내했다. 부디에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 전 황후인 오렐리아를 바라보며 조금 옆으로 비켜섰다.
반면에 오렐리아는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뜬 채 다소곳이 서 있었다.
합창대가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바르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앞을 향해 섰고, 케이든도 일단 그렇게 하는 듯 보였다.
로하나는 몸을 조금 뒤로 틀어 오렐리아를 계속 바라보았다. 오렐리아는 의도적으로 로하나의 눈을 피한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야.’
로하나는 인상을 쓰며 하는 수 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어요?”
로하나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케이든은 잠시 대답이 없다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아직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까.”
로하나는 마땅치 않은 얼굴로 여전히 인상을 쓴 채 한숨을 내쉬었다.
공식적인 순서의 마지막인 장송곡이 마저 울려 퍼지고, 교주의 기도와 모두의 합창 기도가 마무리된 후에 장례식은 끝이 났다.
사람들은 제례에 따라 신분의 순서대로 차분하게 성당에서 나갔고, 오렐리아는 어이가 없게도 자연스럽게 케이든과 로하나의 앞으로 와서 걷기 시작했다.
로하나는 그녀가 그렇게 하게 일단 내버려 두었다. 이런 식으로라면, R. D.와의 연합이고 나발이고도 무리였다.
바르디는 성당에서 나와 꽤 길게 정돈된 화강암 바닥을 지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요즘 한창 바쁠 텐데, 어떻게 올 생각을 했어.”
“황제 폐하. 여기에서 이러시지 않으시는 편이…….”
부디에르가 급하게 바르디를 막았다. 뒤이어서 고위 귀족들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이런 망측하고 어이없는 일에 황제가 반응한다는 것 자체가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르디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손을 들어 부디에르의 입을 막았다.
“상심이 크실 것이라 생각되어서요.”
“여기에서는 솔직한 말을 안 하시겠다? 굳이 이렇게까지 한 걸 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필요했던 모양인데 왜?”
오렐리아는 잠시 한쪽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는 듯하다가 다시 예쁘게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럴 리가요. 무례를 심히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당연히 심히 범했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나?”
바르디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로하나는 이 상황이 이상했다. 뭔가 오렐리아답지 않았고, 바르디의 반응은 예전과 달랐다.
그가 그나마 마지막으로 꾸며 대던 표정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화가 난 얼굴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건 그것이 아니라, 마치…….
“오늘 저녁에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폐하.”
장례식이 끝난 후, 제국에선 자정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다만 고인을 애도하는 자들은 모두 모여 차나 다과 정도를 하며 시간을 가졌는데, 선황제의 장례이니 당연히 연회장과 수도 광장에는 모두가 그렇게 애도를 표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녁에?”
바르디는 굳이 그 시간이냐는 듯 물었다.
“폐하께서 지금 당장은 좀 힘드실 것 같아서…….”
오렐리아 특유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가 여름날 햇살 아래 조근조근 퍼졌다.
바르디는 재밌다는 듯 눈썹을 치켜뜨고는 잠시 로하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로하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지만 바르디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만 들리는 칼라드리우스의 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좋아.”
바르디는 여전히 로하나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선선하게 대답했다. 뒤에서 최선을 다해 이 둘의 대화를 엿듣던 모든 귀족들이 놀라는 소리를 오렐리아가 입을 열자 황급히 숨죽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오렐리아의 붉은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바로 가지도 않겠다는 모양인데? 심지어 독대를 요청했어.”
그새 귀족의 행렬 뒤로 오렐리아의 어이없는 부탁이 전해지고 있었다.
*
오렐리아는 내실로 돌아와 잠시 며칠 전을 떠올렸다. 노프탈에서 장례식을 위해 수도로 떠나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잘 다녀와요.〉
케이든은 어둑어둑한 실내에서 책상에만 환하게 초를 켜 놓은 채 일을 보고 있었다. 오렐리아는 그런 그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케이든은 늘 그렇듯 고개를 까딱했다.
〈그래.〉
오렐리아는 늘 그렇듯 케이든의 책상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더니 말을 시작했다.
〈로하나…….〉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치고 나서야, 오렐리아는 알겠다는 듯 과장되게 볼을 부풀리고선 말을 고쳤다.
〈공작 부인께서 가자고 하신 것도 정말 의외죠?〉
〈아니. 로하나다워.〉
케이든이 보고 있던 서류철을 탁 덮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할 거고.〉
〈위험하진 않겠어요?〉
〈위험하지 않아. 위험하더라도 언젠가는 올 위험이니 반갑게 맞이해야지.〉
냉랭하지만 농담이 미묘하게 섞인 말을 하는 그를 올려다보며 오렐리아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았던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좋았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갑옷을 칭칭 두르고 있는 모습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허술해 보이기도 했다. 자기 자신한테 아무런 여지를 보이지 않는 것, 그거 하나만 빼고.
〈공작 부인을 정말로 좋아해요?〉
주변에서는 너무나 당연히 여겨서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을, 그래서 용기 내어 해 보았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오렐리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라자르가 비밀 임무를 명령하긴 했어도, 그가 옆에 있을 테니 자기 자신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서 이 밤을 붙잡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질문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왜 궁금하지?〉
케이든은 끝까지 곱지 않은 말투로 되물었다.
〈대답해 주면 어디 덧나요?〉
검은 눈동자가 깊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들은 필요는 없었다. 눈으로 듣는 진실은 마음이 시릴 정도로 선명했다.
〈허…… 진짜요? 언제부터?〉
〈그게 중요한가?〉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린 그의 얼굴에 오렐리아는 오랜만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 듣고 나니 놀라울 만큼 힘이 빠졌다.
〈오렐리아.〉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던 걸까, 케이든의 목소리가 새삼스럽게 귓가에 울렸다.
〈나한테 더 이상 무리하지 마.〉
무리한다라…….
오렐리아는 잠시 그의 말을 곱씹고는 피식 웃었다. 무리하고 있다는 걸 그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오렐리아는 최대한 사뿐히 일어났다. 무거운 목소리와 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잘 다녀와요.〉
케이든은 어쩐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은 오렐리아를 보면서 미심쩍은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지만, 오렐리아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오렐리아 브리 자작 영애님.”
현실의 소리가 오렐리아를 깨웠다. 시녀가 가늘게 떠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마 황후였던 그녀를 다시 그렇게 부르는 것이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여기…….”
오렐리아가 부탁한 얼음이 든 차가운 물 잔에 벌써 물방울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더운 날이다.
“그래, 고마워.”
오렐리아는 찬물을 한 번에 마시고는 이어서 얼음까지 깨물어 씹었다.
역시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라자르는 로하나를 재물로 쓸 것이라 했다. 오늘 자신이 여기 이 장례식장에 온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러니, 라자르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있으면 된다.
와그작와그작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조용한 내실에 울렸다. 그런데 그 소리에 맞춰서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찾아올 사람은 케이든이나 로하나 정도일까.
문 앞에 배치된 시종도 따로 없었기에 오렐리아는 혼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의외의 사람을 올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응접실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로하나는 케이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노프탈에서 뭐라고 하나요?”
케이든은 로하나 옆에 걸터앉은 채 작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암호로 간단하게 두 줄 정도로 요약된 글이 보였다.
“R. D.의 핵심 인물들이 사라졌군요. 프란츠도 없다고 하고. 노프탈 경계를 강화한다고 합니다. 일단.”
이즈의 짧은 보고를 읽으며 케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줄 익히 예상했지만, 역시 R. D. 그러니까 라자르가 이미 로하나에게 경고한 대로 뭔가를 저지르고 있었다.
“또 당신을 건드리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케이든이 욕을 섞어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녁에 있을 추모 행사에는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하고 히스랑 여기 계십시오.”
케이든이 두말할 것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오렐리아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그러나 말하면서도 로하나는 확신이 없었다. 칼라드리우스는 오늘 아침에 더 가까운 곳에서 충분히 경고를 했다.
그렇지만 그런가 하면서도 로하나는 석연치 않았던 점을 몇 가지 떠올렸다. 라자르는 광장에서 그녀를 만나고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움직이면 자꾸 판이 어그러지더라고.〉
마치 로하나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장기말인 것처럼. 이제는 중요한 타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로하나가 떠오른 생각을 말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노크의 기색도 없이 덜컥 문이 열렸다. 케이든이 귀신같이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히스였다.
“히스?”
그리고 뒤이어서 새파랗게 질린 여자가 그를 뒤따랐다.
에밀리였다.
“에밀리?”
에밀리라는 말에 케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야?”
케이든의 질문에 히스가 먼저 대답했다.
“이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보셔야겠습니다.”
에밀리가 아린족으로 돌아선 카르크족 출신의 상징으로서 황궁에서 마지막 서열 정도로 장례식에 초대된 것은 로하나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굳이 할 이야기가 있다니?
“주방에서 들은 이야기예요.”
에밀리는 평소의 껄렁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은 간데없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늘 광장에서 공격이 있을 거라고.”
카르크족 특유의 연한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마력자들이 모두를 죽일 거라고 합니다. 아무런 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