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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02화 (102/125)

102

장례식 날 아침, 로하나는 이제 익숙해진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역시나 먼저 일어났는지 침대 옆은 거의 흔적이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로하나는 자신의 잠을 깨운 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노랫소리였다. 어제보다 훨씬 가까웠고.

꼭 이러면 무슨 일이 있곤 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로하나는 미간을 좁히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응접실로 나오자 케이든이 준비를 마치고 그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이제는 익숙한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조금 남아 있던 잠을 달아나게 했다.

“네.”

로하나는 간단하게 걸쳐 입은 가운을 여미며 그 앞에 앉았다. 장례식을 위해 입고 있는 검은 예복은 평상시 그의 복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무거워 보였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로하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다시 소리가 들려요.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소리가 들렸었는데…….”

“칼라드리우스가 근처에 있나 보죠?”

“네.”

케이든은 침착한 얼굴로 턱을 쓸더니 가만히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어제 오렐리아가 모딘 상단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셨죠.”

케이든의 질문에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질없는 고민 끝에 그에게 모딘 상단에서 오렐리아를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안 그래도 어젯밤에 전서구를 보내 놓았습니다.”

케이든이 이어서 말했다.

“전서구요?”

“노프탈 상황을 좀 보려고요. 도대체 그 둘이 어디로 갔는지. 이즈가 확인해서 다시 보내올 겁니다.”

로하나는 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불길한 기분이 든 적이 별로 없는데.

애초에 바르디가 그들을 초대한 것부터가 사실 대놓고 파 놓은 함정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각오하고 황족으로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온 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겨우 정치적 정당성 따위를 주장해서 케이든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걸까.

샤톤웰 전투에서도 그랬다.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는 것은 바르디의 주특기였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편이…….’

“로하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한창 생각에 골몰해 있던 로하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로하나.”

움찔했을 뿐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

뭔가 말을 하려 반사적으로 입을 떼는 그녀에게 케이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로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바르디가 함정을 파 놓았다면, 저번처럼 피하면 그만입니다.”

너무 태연한 목소리에 로하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그때 칼라드리우스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 줄 알고요.”

절벽 아래로 그가 떨어지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있지 않습니까.”

케이든이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앞으로 훅 숙였다. 가까워진 얼굴에 로하나가 잠깐 멈칫하는 사이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 당신이.”

순간 내쉬던 숨을 멈춘 로하나는 긴장한 얼굴을 애써 풀며 케이든을 조금 밀어냈다.

“원래 이렇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듯 케이든도 동의했다. 그러더니 다시 조금 차가워진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듯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로하나는 그의 장례 예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뗐다.

“케이든.”

케이든의 눈동자가 로하나를 향했다.

“선황제의 서거를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해요. 모든 것을 떠나서.”

진심이었다. 케이든은 잠시 일으켜 세우려던 몸을 소파에 기댔다.

“그러고 보니 저도 유가족이긴 하군요.”

씁쓸하게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소가 아닌 표정에 로하나도 덩달아 마음이 무거웠다.

“선황제와는 연락을 하고 지내셨던가요?”

“글쎄…….”

케이든은 항상 태워 버렸던 그의 편지를 떠올렸다.

“사실 궁금하긴 합니다.”

케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솔직하게 로하나에게 대답했다.

“어떤 점이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나에 대해서든, 그의 아들 에드윈에 대해서든, 나의 양친에 대해서든.”

케이든의 빈틈없는 얼굴에 쓸쓸한 빛이 스쳤다. 로하나는 어릴 때 마주쳤던 그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확인해 본 적은 없으시고요?”

“그걸 확인하려 했다가는 제국에 불만을 가진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케이든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로하나는 그랬겠구나 싶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충성을 맹세해야 했고, 그땐 실제로 그런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케이든이 계속했다.

“굳이, 다시 싸움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어요. 지금 카르크족들은 내가 항상 이날만을 손꼽아 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더니 케이든이 살짝 덧붙였다.

“아, 아린족이야말로 그렇게 생각하겠군요. 어쨌든.”

로하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제국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에요.”

그 말에 케이든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로하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당신 때문이 아니라, 상황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카르크족은, 당신이 아니어도 반란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난 경험들이 그걸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창밖의 새소리가 잠깐의 정적을 채웠다.

“물어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쉽네요.”

“어떤 대답을 듣더라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러셨겠지요.”

로하나의 말에 케이든은 잠시 로하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케이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을 더 한들 그녀의 마음을 새삼스레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그의 마음을 그대로 알아차릴 때면 저도 모르게 속이 울렁거리곤 했다.

그걸 당신은 조금이라도 알까.

케이든은 재차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곤하실 텐데 조금 더 쉬시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로하나에게는 쉬라고 말했다.

“아니에요, 저도 준비할래요.”

로하나의 단단한 목소리에 케이든은 다시 가슴이 일렁이는 기분을 느꼈다. 기분 나쁜 울렁거림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

말로는 그녀를 믿는다고 했지만, 이런 그녀를 싸움에 끌어들일 생각은 없다.

케이든은 문을 열고 나가며 저 멀리 앉아 비스킷을 먹고 있는 히스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다.

*

차분한 검은색 베일로 가려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사이로 빛나는 여름 햇살이 비쳐 들었다.

황실의 예법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있는 장례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황후가 주도하여 진행했을 가장 큰 ‘집안의 일’이었으나, 모두가 알다시피 아르드골드 제2대 황제 바르디 렌트워스에게는 황후가 없었다. 그럼에도, 행사의 준비는 빈틈없이 완벽해 보였다.

아린족으로만 꽉 차 있는 실내에 로하나와 케이든이 발을 내딛자 좌중의 시선이 매섭게 꽂혔다.

술렁이던 실내는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가, 이내 그들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경사가 있을 때와는 달리 실내는 붉은 튤립 대신 새하얀 튤립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금색 띠로 둘러져 있는 성당 바닥의 깊은 구멍이 관이 놓일 곳으로 보였다.

“세상에, 어떻게…….”

간간이 들리는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의 제지로 말을 맺지 못했고, 배신감에 가득 찬 따가운 시선은 케이든보다 로하나에게 더 꽂히는 것 같기도 했다.

케이든은 혹시나 로하나가 긴장할까 염려되어 그녀를 내려다보았지만, 로하나의 얼굴은 담담하고 평온해 보였다.

그들의 자리는 예행연습 때와 같은 상석으로 안내되었다. 바르디 황제의 오른쪽 뒤편. 자리에 도착하자 드디어 황제가 입장했다. 조용한 장송곡이 울리기 시작하고, 이어서 선황제의 관이 들어왔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를 맞이하여…….”

주교의 인사말이 시작되었다. 케이든은 의미 없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아침에 로하나와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차례가 되어 바르디가 일어나 하얀 장미를 무덤에 안치된 관 위로 뿌렸다.

‘물어도, 대답을 들어도 의미가 없을 사이였으니 묻지 않았습니다.’

케이든의 구두 소리가 탕탕 울렸다.

‘서로 질문을 할 수도 없는 사이였네요 저흰.’

선황제가 누워 있는 관 위로 뿌려진 새하얀 튤립 잎은 그들의 관계만큼이나 부질없어 보였다. 사람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처음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케이든은 미간을 좁히며 최대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자리에 돌아온 후, 음악이 울렸다. 합창대의 장엄하고 조용한 장송곡이 조용한 실내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채웠다.

그때였다.

로하나가 덥썩, 케이든의 팔꿈치께를 잡았다.

“로하나?”

속삭이는 목소리에 로하나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귓속말로 속삭이는데 로하나가 아주 작게 대답했다.

“소리가 너무 커요. 저번처럼. 최소한 수도이거나, 그보다 가까워요.”

“괜찮습니다. 지금은 일단…….”

“아무래도…….”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성가의 화음이 흔들렸다. 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일부는 입을 딱 벌리기도 했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살짝 주저앉는 듯한 동작을 취하기도 했다.

바르디가 뒤를 돌아보고, 이어서 케이든과 로하나 역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는 그곳에, 절대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왜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서 있었다.

“오렐리아.”

신음에 가까운 탄식이 로하나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아름다운 검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의 가슴 위로는 빛나는 금발이 파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미있네.”

바르디의 목소리에 로하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재미있어.”

로하나는 미간을 좁힌 얼굴로 다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오렐리아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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