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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은 굳이 이 저녁에 바르디가 그를 불러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말 형식적인 연습이 오갔다. 사실상 케이든이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해서 자신이 황제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
설마하면서도 바르디 렌트워스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 케이든은 팔짱을 낀 채 그가 상단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선황제의 관이 놓일 곳은 금장을 두른 막대가 사방으로 세워져 있고, 붉은 끈으로 둘러져 있었다.
저곳에 누운 선황제를 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케이든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공작께선 이제 올라가시면 됩니다.”
단상을 올라가자, 붉은 튤립이 준비되어 있었다.
“굳이 꽃잎을 뿌리는 것도 연습을 해야 하나?”
“황실의 법도가 그러해서요.”
부디에르의 대답에 케이든은 별말 없이 꽃잎을 조금 집어 허공에 뿌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남보다 못한 혈육이었으니까. 악스톤을 죽이는 짓을 해서까지, 어떻게든 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했다. 그래야 에드윈도, 이어서 바르디도 가만히 있을 테니까.
평화를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죽는 것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서.
악스톤도 그것이 맞다고, 그러니 자신을 죽이라고 했다. 어차피 오늘 아니면 내일 죽을 아픈 몸이라면서. 히스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동안 그를 증오했지만 케이든은 그것도 감수했다. 그래도 괜찮았으니까.
“공작. 이제 내려오시면 됩니다.”
케이든은 천천히 단상에서 걸어 내려왔다. 바르디의 푸른 눈이 그를 훑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에게 신경을 쓰기엔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로하나는 라자르와 만난 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도 라자르와의 사이에 대해서 물었을 때, 로하나는 말을 극도로 아꼈다. 의외로 솔직한 사람이었기에 많이 의외였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일까.’
처음 만났던 15년 전 그 순간부터 이날 이때까지, 로하나만큼 잡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로하나가 라자르에게 오늘 했던 말이 떠올라 케이든은 미간을 더욱 좁혔다. 히스는 듣지 못한 눈치였지만, 케이든은 분명히 들었다.
<왜 하필 내가 필요했던 거야? 로하나가 될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았을 텐데.>
로하나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라자르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자신과 히스가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자르가 그때 알았든, 그 전부터 알았든 저들이 엿듣고 있다는 걸 알았고, 그걸 원치 않았다는 뜻이다.
‘당신은 로하나 하노버가 아닌가.’
그러나 그럴 리는 없다. 누구보다 드레고리 하노버와 닮은 것이 그녀였다.
그럼 무슨 뜻일까. 악스톤은 라자르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물어보면 간단한 것을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겐 솔직하게 뭘 물을 수가 없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말곤, 케이든은 뭘 어떻게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느닷없는 목소리에 케이든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황제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막상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기분이 어때?”
“유감이죠.”
짧은 대답을 마친 케이든은 다시 입을 뗐다.
“이제 그만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바르디는 잠시 할 말이 있는 듯 모두를 물렸다. 넓은 성당에 둘만이 남았다. 달빛에도 스테인드글라스는 꽤 영롱하게 빛난다는 걸 케이든은 새삼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형은 선황제 폐하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이제 와 형이라니. 이상할 정도로 친밀해졌다가 정색을 하는 변덕은 어려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그대로였다.
“모릅니다, 거의.”
“난 그래도 잘 아는 편인데.”
바르디가 느긋하게 말했다.
“당신을 많이 아꼈지. 답장이 오지 않는 편지를 계속해서 쓸 만큼.”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걸 바르디가 아는 줄은 몰랐다. 케이든은 처음 딱 한 번 열어 본 이후, 줄곧 불에 태우기만 했던 편지들을 떠올렸다.
“가시는 길에 가장 소중한 손자가 와 있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노프탈과 샤톤웰의 연합국, 그리고 원하는 자들의 이민을 인정해 주면 더 이상 싸움은 없을 겁니다.”
케이든은 미뤄 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먼저 말을 꺼냈다.
“어차피 함께할 수 없다면 독립이라도 하게 해 주는 것이 모두에게 가장 무탈한 방법입니다.”
바르디는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뚫어지게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기어이 그런 말을 해야겠어?”
“형으로서 하는 말입니다. 기어이 일국의 공주를 납치하는 일까지 저질러 가며 이웃국을 침략하는 낮은 수를 써야 할 정도라면,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이 아닙니다.”
케이든은 다른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더 이상 바르디의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카르크족의 불만도, 그 와중에 아린족의 반발도 멈추지 않을 겁니다.”
황제는 당황한 기색을 내지 않으려 일부러 얼굴을 단단히 굳혔다.
“생각해 보시고 대답해 주십시오.”
케이든은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손님에게 마련된 내실에 돌아온 케이든은 아직 응접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로하나를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피곤하실 텐데, 라는 말이 입가에 머물렀다. 케이든 자신이 지금 그걸 알아서는 안 되니까. 라자르를 만났다는 걸 알아선 안 되니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뭐.”
로하나는 특유의 여유를 부리며 기지개를 켜더니 앉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무슨 일입니까.”
“음…….”
로하나는 잠시 망설이는 듯 잠시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가 양손으로 볼을 쓸어내렸다.
“예행식은 잘 진행되었나요?”
“단상에 걸어 올라가 꽃잎을 뿌리는 것도 연습해야 하는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케이든은 농담을 하며 비스듬히 소파에 기대 앉았다.
촛불이 일렁이며 로하나의 얼굴을 다양하게 비추었다. 꼭 보였다 보이지 않는 그녀의 마음같이.
“케이든.”
“네.”
별말을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편하게 앉아 있던 케이든의 귓가에 의외의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라자르를 만났어요.”
로하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든은 잠시 멍하니 그 말을 되새겼다.
“그렇군요.”
“모딘 상단에서 친했던 에이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갑자기 마차가 나타났고, 그게 라자르였어요.”
케이든은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라자르는…….”
로하나는 열심히 단어를 고르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제 꿈에 자주 나타났었어요. 전에도 얘기했듯이.”
케이든은 가만히 계속하라는 눈짓을 보낼 뿐이었다.
“저를 더 이상 죽이진 않겠다고 하더군요. 카르크족의 동정을 받는 아린족의 죽음은 필요 없다고요.”
“그렇군요.”
듣고 보니, 너무나 라자르다운 말이라 케이든은 짧게 긍정했다.
“오늘 사고도 있었어요.”
“로하나.”
케이든은 여기에서 로하나를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에게 라자르 이야기를 숨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미드 서머에 떠날 것을 계획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러니 그녀 나름대로 라자르와 세운 계획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었고.
자기 혼자 그녀에게 품은 마음이었으니, 어떻게 배신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아, 다시 찾아가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고.
전쟁이라는 불가항력 앞에 아린족인 그녀를 과연 어디까지 지킬 수 있을지 사실 정말 두려웠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두렵지가 않았다. 배신당해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았고, 배신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알고 있습니다.”
로하나의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 동그랗게 커졌다.
“당신을 뒤쫓았습니다. 위험할까 봐.”
로하나의 눈썹이 조금 쳐졌다.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당신의 행적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감시하는 건 더더욱.”
케이든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그래야 했습니다. 라자르가 나타난 건 의외였지만…….”
케이든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 뒤를 쫓고 있던 아린족 패거리는 저희가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라자르가 그들을 없애려고 하기에, 마력으로 그들을 일단 보호했고요.”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차라리 속 시원했다.
“마력에 아린족이 죽었다는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당신을 해치려고 한 개새끼들인데도.”
케이든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비속어까지 저도 모르게 쓰며 고백했다.
“그래서 당신을 지킨다고 못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케이든은 한숨을 쉬며 로하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로하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촛불의 빛은 사람의 표정을 읽기 어렵게 했다. 특히나 로하나처럼 표정을 가만히 하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때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드레스 자락 소리가 들렸다. 로하나는 케이든 옆에 와 앉았다. 다리가 서로 부딪쳐 닿았다.
“케이든.”
로하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선황제 폐하의 장례식 전날이니 내가 말은 아낄게요.”
로하나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케이든의 턱을 쓸었다.
“그래도 하나만 말할게요.”
케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는 괜찮을 거예요.”
로하나의 가는 숨소리와 짙은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케이든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그녀의 손에 기댔다.
“당신도 나를 믿어요.”
거부할 수 없었다.
아주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
케이든은 거역할 수 없는 마음에 이젠 그냥 순응하기로 했다. 그리고 로하나는 처음으로 긴장하지 않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밤이 조용히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