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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100화 (100/125)

100

“내가 뭘 믿고 그 마차에 타지?”

로하나의 말에 라자르가 피식 웃었다. 달라진 모습이었다.

“내 앞에서 당신이 정말로 삭제 마차에 타고 안 타고가 중요하진 않지 않나.”

스르륵, 미끄러지듯 움직인 마차는 로하나와 닿을 듯 한층 더 가까워졌다.

로하나는 조용히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난 밖이 더 좋은데.”

로하나는 까맣게 변해 있던 히스의 몸을 기억했다.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조용히 칼에 손을 대 보았다. 서늘한 손잡이가 느껴졌다.

“그래, 뭐.”

라자르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마차에서 내렸다. 새 구두 굽같이 낭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차는 라자르가 내리자 미련 없이 길을 떠났다.

지나치게 마르고 키가 큰 라자르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워 보였다.

“원래도 바다를 좋아하지 않았나?”

로하나는 소름이 끼치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불쾌했다.

그가 그녀의 전생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마치 지금의 삶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이.

“당신 뭐야?”

“빨리도 묻네.”

“기회가 없었어.”

“나도 너한테 그걸 묻고 싶은데.”

라자르가 로하나에게 가까이 걸어오면서 말했다. 새하얀 얼굴엔 진심으로 궁금증이 서려 있었다.

“당신 뭐냐고.”

로하나는 조금씩 거리를 띄워 가며 다시 물었다. 대답해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글쎄, 내가 누굴까.”

라자르는 여전히 듣는 사람이 불쾌하게 말을 돌리다가 자못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렇지만, 예전에도 말했듯이 너를 여기에 부르게 된 건 나도 정말 유감으로 생각해.”

로하나는 빙의하던 날 처음 들은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어린 소년은 정말로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필요했다고.

“왜 하필 내가 필요했던 거야? 로하나가 될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았을 텐데.”

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라자르가 로하나의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쉿, 하는 입소리와 함께.

질색하는 로하나를 다시 꾹 눌러 잡으며 라자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누군가에게 들릴 뻔했어.”

“뭐라고?”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무래도 장소를 이동하는 게 좋겠는데.”

라자르는 언제 그렇게까지 가까이 붙었냐는 듯 성큼 거리를 띄우더니 먼저 부둣가를 향해 걸었다.

로하나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탁 트인 바닷가에는 일하느라 오가는 몇 사람을 빼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눈에 띌까 걱정하는 로하나와는 달리 라자르는 평온해 보였다.

“원래도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지 않아?”

“이제 기억도 거의 안 나.”

거짓말이었지만 라자르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고 싶진 않았다. 로하나의 괜한 어깃장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라자르는 잠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그녀를 돌아봤다.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했어.”

“지금 여기에서 날 죽이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어떻게든 그녀를 죽여서 전쟁의 기폭제 로 삼으려 했던 그이다. 그 과정에서 조디도 희생되었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왜 하필 나였어야 하는 거야?”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될 것 같은데.”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 하는 거 주변에서 짜증 내지 않아?”

진심으로 짜증을 내는 그녀를 보보고 라자르는 양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이 나를 싫어하긴 하지.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항상.”

‘인간들’이라…….

케이든과 히스가 말했듯이 역시 라자르는 인간이 아니었다. 하긴, 그러니 이 세계, 저 세계에서 사람까지 끌어오겠지.

“원하는 게 뭐야?”

로하나의 질문에 라자르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역사를 바꾸는 것.”

“그 역사라는 게 내가 아는 원작인가 보지?”

“그래.”

라자르는 고개를 끄덕하고는 로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을 통해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꾼 것 같아.”

“나를 내버려 두겠다는 소린가?”

“장담은 못 하지만, 아마도.”

대화를 계속해 봤자 짜증만 더 날 것 같아 로하나는 그만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나를 오늘 찾아온 이유는?”

그 순간이었다.

콰과과과광!

저 멀리에서 폭발음이 났다. 굉음과 함께 연기가 확 퍼졌다.

“저걸 피하게 하려고. 당신이 지금 죽을 필요가 없었거든.”

로하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연기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에서 사람들이 놀라 그쪽을 바라보다가 도망치든, 그쪽을 향하든 하는 것이 보였다.

“당신을 노리는 무리들이 있길래 내가 손을 봐 뒀지.”

로하나는 어이가 없어서 라자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린족들이 당신을 카르크족 편이라고 생각하고 죽일 계획을 했더라고.”

“뭐라고?”

“그런데 난 당신이 아린족이면서 카르크족 편을 들다가 죽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건 별로 좋은 전쟁의 시발점이 아니야. 아린족은 끝까지 카르크족의 적이어야 하니까 말이야.”

“그래서 저 아린족들을 당신이 죽였다는 거야, 지금?”

“그렇지.”

“당신은 인간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럼 그만해.”

로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듯 말했다.

“뭐라고?”

라자르가 미처 못 들은 듯 되물었다.

“그럼 작작 하라고. 멈추라고. 사람들끼리 알아서 살게. 이건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

라자르는 로하나가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아서 못 하니까 그렇지.”

라자르는 태연히 말하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기며 멀어졌다.

“일단 오늘 너를 만난 건 저걸 막기 위해서였으니 이만 가 봐야겠어.”

순간순간, 소년 같이 제멋대로였다가도 성숙한 목소리로 돌아가는 라자르의 모습은 기이하고 소름 끼쳤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 정도는 말해 주겠는데.”

그는 어느새 부둣가 돌길에 도착한 마차의 문을 열며 로하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움직이면 자꾸 판이 어그러지더라고.”

어깨를 으쓱한 그는 미끄러지듯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영 나도 불안하네.”

진심인지 아닌지 이상한 말을 남기고서 라자르는 문을 닫았고, 마차는 빠르게 로하나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로하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큰일 날 뻔했네.”

단단히 얼굴을 감싸고 있던 복면을 조금 푼 채 히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케이든이 폭발이 일어날 것을 눈치챈 것이 기적적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라자르가 헛소리를 빙빙 돌려 할 때부터.”

케이든이 마력으로 폭탄을 하늘로 올린 덕에 로하나 암살단으로 보이는 자들이 죽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다.

R. D.든, 마력자든, 카르크든 전투가 아닌 곳에서 아린족을 죽게 하지 않겠다.

그것이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일수도, 아직도 순진하게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의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케이든은 단호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했음에도 케이든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누구보다 그들을 죽이고 싶었겠지만 살린 것이 억울했을 것이다.

히스는 혼비백산해서 사라지는 아린족 패거리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케이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자르가 로하나를 굳이 구해 낸 속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히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노프탈에서 히스를 인질로 잡아서 오렐리아를 데리고 사라졌던 그날에도, 이상하게 라자르는 로하나를 오래 안 사람처럼 굴었다.

더 이상한 것은 로하나도 라자르를 그렇게 낯설어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죽이지 못해 안달 나지 않았었나? 전쟁의 기폭제로 쓴다고 했던가.”

“음.”

히스의 말에 신음 소리를 내며 동의를 한 케이든은 제 얼굴을 감싸고 있던 복면을 조금 풀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돌아가지.”

“응, 레이디보다 먼저 들어가야지.”

히스는 아무 말 없이 말에 올라타는 케이든을 보며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얽힌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순정적이라니.

‘그냥 포기하면 간단할 텐데.’

사랑 같은 걸 신경 쓰면서 살 수 있을 만큼 삶이 녹록지가 않았다.

‘안 된다면 포기하면 간단하던데.’

케이든 델클리프의 삶은 그녀보다 열악하면 열악했지, 결코 더 나은 삶이라 볼 수 없었다. 히스는 혹시 그러해서 케이든이 오렐리아에게도 곁을 주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다.

둘은 그림 같이 어울렸지만, 너무 닮아 서로를 더 어두운 곳으로 끌어내릴 것 같이 보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랑에 빠지면 저런 모습이 되는 사람이었다면, 히스는 장담할 수 있었다.

케이든은 로하나 하노버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이유 모르게 쓰린 마음을 붙잡으며 히스도 빠르게 멀어져 가는 케이든의 뒤를 쫓았다.

*

“다녀오셨습니까.”

로하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케이든이 흰 셔츠만 입은 채 응접실에 앉아 있던 것이다.

“놀랐어요.”

“죄송합니다.”

빙긋 웃는 케이든을 보며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모자를 벗어서 테이블에 내려놓던 로하나의 손이 멈칫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우선 외출했던 이유부터 설명하자고 생각하며 로하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모딘 상단에 오렐리아가 오지 않았다고 하네요.”

의외라는 듯 케이든이 조금 놀란 눈치를 보였다.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고요.”

“네.”

로하나도 천천히 케이든 앞에 앉았다. 푹신한 황궁 특유의 벨벳 소파가 편안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왜 오지 않은 걸까요? 장례식이 내일이니 지금 움직이는 건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한 걸까요?”

“글쎄.”

케이든은 바르게 앉아 있던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다리를 꼬고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상하긴 하군요.”

“네?”

“분명, 여기에 올 것처럼 얘기했습니다.”

로하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케이든과 마주쳤다. 케이든은 별일 아니었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출발하기 전에 오렐리아가 몇 마디를 건네왔습니다. 별말은 아니었는데…….”

“확실한가요?”

“분명 올 겁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일 거예요.”

케이든은 간단히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잔을 기울였다. 호박색 액체에 담긴 얼음이 짤랑 울렸다.

“그렇군요…….”

로하나가 이어서 오늘 칼라드리우스의 노랫소리가 왜 들렸는지 알았다고, 라자르와 폭탄 사건이 있었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네.”

로하나가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히스였다.

“무슨 일이에요?”

“내일 있을 장례식의 예행 연습에 참가하셔야 한다고…….”

히스는 로하나에게 인사를 한 뒤,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케이든을 향해 말했다.

“그런 것도 리허설씩이나 필요한 모양이지?”

케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원래 장례식 예행 연습은 해가 진 뒤에 하는 것이 관례라는군요.”

뒤에 있는 황궁군을 바라보며 히스가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설마, 별일이야 있겠는가 생각하면서도 불안해지는 로하나의 얼굴을 보며 케이든은 피식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로하나의 앞을 지나치던 케이든은 긴 손가락을 뻗어 로하나의 뺨을 쓸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아니, 걱정까진…….”

그렇게까지 속이 빤히 보였나 싶어서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부정하는 소리를 했지만 케이든은 여전히 빙긋 웃을 뿐이었다.

“피곤하면 먼저 쉬십시오.”

순간 몸을 기울인 그에게 로하나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짧게 입술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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