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
다시 그 소리였다.
로하나는 침대에서 놀라며 눈을 떴다.
칼라드리우스의 소리였다.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 소리였다.
항상, 이 소리가 있고 나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무슨 일일까.’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커튼을 마저 걷었다.
여름비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창밖의 공기는 티 없이 맑았다. 황궁은 평소보다 조용하면서도 많이 분주했다.
다음 날이 선황제의 장례식이었다. 아르드골드 제국에서 처음 있는 선황제의 장례식이라, 모두가 긴장을 하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누가 들어와 잔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다른 곳에서 잤거나, 아니면 또 예의 버릇대로 응접실 소파 같은 곳에서 목석처럼 앉았다 잠이 들었겠지.
로하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시녀가 내오는 대야에 손을 담갔다. 수도는 벌써 더울 지경이라 차가운 물이 반가웠다.
“좋은 아침입니다.”
준비를 마치고 다이닝 룸으로 가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앉아 있는 케이든이 보였다. 노프탈에서 자연스럽게 내리고 있던 머리도 다시 올리니 반듯한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아예 안 주무신 건 아니죠?”
로하나의 농담 섞인 말투에 케이든은 설핏 웃었다.
“아닙니다.”
역시나 거짓말이었다.
로하나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홍차에 설탕을 타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뗐다.
“혹시 오렐리아와 R. D.들은 여기로 언제 도착한다고 하던가요?”
“이미 도착해야 했을 것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라는 얼굴을 하며 케이든이 대답했다.
“도착했다고 굳이 연락을 할 것까진 없으니까. 여긴 황궁이라 보안도 걱정이고요.”
케이든이 별일 있겠냐는 듯 말했지만 로하나는 어쩐지 불안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모딘 상단이라고 했죠.”
로하나의 질문에 케이든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확인했으면 좋겠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케이든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사실, 꼭 그렇게 확인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상, 뭔가 마음에 크게 걸렸다.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관여하지 않을 테니 말하기만 하라고 했었죠?”
로하나의 말에 케이든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긴 했었죠.”
로하나는 케이든이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를 끝까지 계약 주체자로서 존중하는 것을 우선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럼,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대신 제가 하는 것에 토를 다시면 안 돼요.”
로하나의 말에 케이든이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잔을 내려놓았지만, 거기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마, 지금 모딘 상단을…….”
“거기에도 오래된 친구가 있어요. 어차피 하노버 공작가가 관리하는 상단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옛 생각이 나서 다녀왔다고 하면 그만 아니겠어요?”
케이든은 깊게 한숨을 쉬더니 드디어 잔에서 손을 떼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분명, 반대하고 싶지만 그럴 명분이 없어 답답한 것이 분명했다.
“오늘 칼라드리우스 소리가 들렸어요.”
로하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케이든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확인만 하고 올게요.”
케이든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한숨을 삼키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드린 칼 들고 가십시오.”
“물론이죠.”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너무 선선히 허락한 것 같아 이상했지만 어쨌든 이야기가 잘 끝난 것은 다행이었다.
“레이디, 좋은 아침입니다.”
히스가 웃으며 다이닝 룸에 들어오면서 침묵이 깨졌다.
“또 하나도 안 드셨네. 케이든, 이런 건 재깍재깍 확인해서 드시게 말씀을 드려야지.”
케이든은 방금까지 이야기를 하느라 그랬다고 항의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로하나는 웃으며 빵을 베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케이든이야말로 거의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선황제가 서거했다.
그것도 바르디가 관여되어서.
케이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그가 하는 속엣말을 온전히 들을 수 있을까.
그러다가, 로하나는 정작 마음을 열거나 고백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일단, 지금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다음에.
로하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모든 걸 미루고 눈앞의 급한 일에 집중했다.
*
“와, 어휴, 깜짝아!”
로하나는 작은 실크 모자에 달린 베일 너머로 생긋 웃었다.
“오랜만이네.”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에이미가 질겁했다. 놀란 토끼 눈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로하나를 올려다보다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운지 제 가슴에서 손을 내려놓지 못했다.
“공녀님! 아니, 공작 부인!”
세상에, 세상에, 하는 호들갑을 몇 번을 더 하고서야 에이미는 진정을 했다.
“미안, 많이 놀랐어?”
“당연하죠. 여긴 거의 아무도 모르는 곳이기도 하고.”
에이미는 때가 탄 앞치마를 벗더니 쓱쓱 의자를 닦았다.
“온 수도가 델클리프 공작 내외가 왔다고 시끌시끌해요. 혼자 오시기엔 위험한데.”
로하나는 의자를 닦는 그녀를 만류하며 직접 먼지를 털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에이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이 닦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분위기는 좀 어때?”
“저야 아린이니까 좀 나은데…… 카르크들 사이에서는 분위기가 좀…….”
역시 그렇지? 하는 로하나의 눈빛에 에이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케이든 델클리프가 직접 와서 수도를 접수할 거라고 기대하는 카르크도 많아요.”
로하나는 조용히 들었다.
“어느 쪽…… 이에요?”
“케이든이?”
“네.”
“글쎄, 황족으로서 당연히 와야 할 곳을 온 것 아닐까? 황제의 초대도 있었고.”
로하나는 다분히 정치적으로 대답했고, 에이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셨다.
“너무 정치적인가?”
덧붙이는 로하나의 말에 에이미는 웬일이냐는 듯 짙은 눈을 크게 떴다.
“정치적으로 이 상황에서 서로 공격을 할 순 없는 거고. 그러니까 케이든은 황족으로서의 제 신분을 다시 한번 확실히 하는 데 이 기회를 쓰는 거지.”
에이미는 늘 로하나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었다. 역시 그렇구나, 하는 탄성을 낸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로하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부인께서 왜 여기까지…… 그것도 굳이 제가 숨어 쉬는 이런 작은 창고에…….”
“에이미. 나에게 하나만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방금 들은 이야기가 있으니, 그럼요.”
에이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혹시, 여기 오렐리아…… 그러니까 전 황후가 나타나지 않았어?”
“네?”
에이미는 제가 잘못 듣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귀를 로하나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오렐리아 브리. 전 황후 말이야.”
“아니요오?”
에이미는 이렇게까지 오리발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굳이 그녀에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정말? 온다는 연락도 없었고?”
“그 사람…… 아니, 그분.”
에이미는 예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말을 고쳤다.
“R. D.인지 뭔지 하는 카르크 쪽 지도자 같은 게 되었잖아요.”
“모딘 상단에 협력을 요청하러 올 예정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로하나의 말에 그렇냐는 듯 에이미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떴다.
“하긴. 우리 단장님도 카르크 출신으로 보기 드물게 거기까지 올라갔으니까요.”
“거의 없는 일이지.”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저한테 비밀로 해야 했다면 저도 모르겠지만…….”
에이미가 천천히 생각하며 말했다.
“굳이 저한테까지 비밀로 하시진…….”
“알아, 두 사람 만난 지 오래됐잖아.”
에이미는 화들짝 놀랐다가 붉어진 얼굴을 황급히 제 두 손으로 가렸다.
“안 왔단 말이지. 이상하네.”
“이상할 것까지 있을까요? 아무래도 장례식 기간 중에는 자중하는 것이겠죠, 그게 뭐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로하나는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고마워 에이미.”
“가시게요?”
“응, 들어가 봐야지.”
에이미가 둘이 함께 앉아 있던 창고의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단장은 안 보고 가셔도 되겠어요?”
“에이미 봤는데, 충분하지.”
로하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가 어스름하게 질 때 출발해서 그런지, 이미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들어가는 길 조심하시고요.”
에이미는 로하나가 비밀스럽게 가문의 문장을 가린 말을 타고 오는 것을 자주 봐 왔다.
익숙한데도, 그녀의 행보가 오늘따라 불안했다. 아마 이제 시대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조건 빨리 댁으로 향하세요. 벌써 해가 지려고 하네요.”
“응, 고마워. 에이미도 몸조심하고.”
에이미가 손을 저으며 인사를 하고 로하나는 말에 올라탔다.
타닥타닥, 말굽 소리가 화강암으로 만들어 놓은 부둣가 길을 울렸다.
선황제의 서거 때문인지 늘 분주하던 항구조차 희한하게 조용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을 할 뿐, 특별히 눈에 띄는 언행을 삼가는 듯했다.
로하나가 망토를 다시 여미면서 천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부둣가와 시내의 광장을 지나, 큰길로 가기 위해 골목길에 들어설 때였다.
‘앗!’
로하나는 엄청난 반사 신경으로 고삐를 끌어 쥐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차에 부딪칠 뻔한 것이었다. 마차는 고급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이쪽에선 마차가 나올 수가 없는데?’
로하나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면서 놀란 숨을 내쉬었다.
마차의 문이 달칵 열렸다.
설마 지금 여기서 따지려는 건가 싶어 로하나가 마차에서 내리는 자를 지켜볼 때였다.
익숙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마차는 문이 열렸을 뿐, 아무도 내리진 않았다. 깜깜한 중에도 그의 붉은 눈은 번뜩이면서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로하나는 피식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늘 그렇듯, 모두를 손 아래에 두고 있다는 저 눈빛과 목소리.
라자르였다.
오랜만인데도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