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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셨습니까.”
히스가 정말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문을 닫고 나가자, 로하나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그래도 피를 나눈 혈육인데 초대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
바르디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로하나를 응시했다.
“네.”
짧게 대답한 로하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바르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네가 오자고 했겠지?”
로하나는 길고 큰 눈을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케이든은 절대로 오고 싶어 하지 않았을 거거든. 은근히 감정적인 면이 있어서.”
바르디의 말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선황제 폐하의 영원한 평강과 휴식을 기도합니다.”
제국의 의례적인 조례였다. 로하나는 선황제 말을 꺼내며 바르디의 기색을 살폈다. 프란츠의 말대로 그가 정말로 선황제를 어떻게 하기라도 한 것일까.
못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역시 눈으로 직접 그를 보니 그에게 확인하고 싶어졌다.
“돌아가실 때가 되었지.”
바르디의 말에 로하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로하나의 질문이 조금 이상한지 바르디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가 궁금해서 그래? 너도 이미 카르크족 사이에서 도는 소문을 믿는 거야?”
“무슨 소문이요?”
정말 몰라서 하는 질문이었다. 바르디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있어. 내가 선황제를 어떻게 했다나.”
“하지 않으셨고요?”
순간, 둘의 눈이 살벌하게 부딪쳤다. 커다랗게 뜬 새파란 눈이 로하나를 바라보다 이내 가늘어졌다. 로하나 역시 눈을 피하진 않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바르디가 먼저 입을 뗐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바르디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애매한 위치에 남아 있어? 그냥 돌아오면 얼마든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내 옆에 있을 수 있잖아.”
말의 뒷부분에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로하나는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제국에서 멈추려고 하면 멈출 수 있는 전쟁입니다.”
역시나 제 말이 통하지 않자, 바르디는 이제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로하나의 말을 들었다.
“통일 전쟁에 대해서 저는 잘 모릅니다만…….”
로하나가 계속했다.
“어쨌든 카르크족을 끝까지 없애지 않고, 샤톤웰의 독립도 인정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바르디의 눈썹이 움찔했다.
“지금이라도 말도 안 되는 정책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하시면…….”
“마력을 쓰는 사람들에게.”
바르디가 로하나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좁혀진 미간을 두꺼운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그는 손가락 사이로 로하나를 쳐다봤다.
“그런 배려가 가당키나 해?”
“마력이…….”
“마력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뭘 엉망으로 만들었는데요?”
로하나가 정말 궁금해서 한 질문에 바르디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아린족이 기득권이 될 수 없었던 통일 전쟁 전의 시대에서, 아린족에게 있어 마력을 쓰는 것들은 이길 수 없는 거대한 벽 같았다는 걸.
“마력을 쓰지 못하던 아린족이 카르크족에게 불만을 품은 건 아니고요?”
로하나의 반문에 순간 바르디의 얼굴에 미묘하게 금이 갔다.
“하…….”
사실 그녀 말이 옳았다. 그래서 늘 그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이렇게 마력자를 미워해 온 것이라는 걸.
아린족도 마찬가지란 걸 알고는 있었다.
“약하다고 늘 약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바르디가 조용히 말했다.
“마력을 못 쓴다고 약할 것도…….”
“로하나,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바르디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랜만에 듣는 유약한 목소리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그들에게 지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냥 더 상식적인 세상이 올 수도 있지 않을…….”
“아니.”
바르디의 목소리가 꽤나 크게 울렸다.
“로하나, 당신은 너무 순진해. 아린과 카르크가 서로 피를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둘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아린족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돼, 로하나. 카르크족의 피가 섞인 자라면 그게 누구라도 널 지키지 못할 거야.”
바르디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진심으로, 친구로서 하는 이야기야.”
“누가 지켜 줄 필요 없어요.”
로하나의 대답에 바르디가 미간을 좁히다가 두 눈썹을 치켜떴다.
“그렇지. 너에게는 그 엄청난 새가 있었지.”
아직도 겨우내 준비했던 함정이 고작 그 새 하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것이 거짓말 같았다. 바르디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네.”
로하나의 무던한 대답에 바르디는 피식 웃었다.
“이상하네.”
“어떤 점이요?”
“이제야 너하고 처음으로 대화를 하는 것 같아.”
그 말에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저도 내내 솔직하지 못했었어요.”
사실이었다. 빙의된 이후,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해 그에게 잘했었고, 그와 연인이 된 이후로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그와의 관계가 그녀의 목숨을 지켜 줄 것이라는 생각에 더 안심했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수단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 마음이 유지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로하나는 씁쓸하게 속으로 생각했다.
“뭔가 항상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어, 너는.”
바르디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랬군요.”
“지금도 그 느낌이 아주 없어지진 않았지만, 조금은 솔직해진 것도 같네.”
로하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공연히 가는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솔직해진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로하나가 바르디를 바라보았다.
“케이든하고는 정말로 무슨 사이야?”
로하나의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둘 사이를 가르더니, 이내 벌컥 문이 열렸다.
“황제가 있는 방에 대답도 듣기 전에 들어오다니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네.”
바르디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케이든은 그저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굳이 최대한의 격식을 차린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어서 나가라는 말을 대신했다.
바르디는 입소리를 내더니 두 손을 서로 마주 잡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조심 해, 로하나.”
로하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그때, 케이든은 조용히 로하나 앞에서 문을 닫았다. 바르디는 저를 따라오는 케이든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로하나는 또한 케이든이 굳이 바르디를 따라나서는 것이 의아해 조금 놀란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
“잠깐 대화 좀 하시죠.”
“무슨 일이야, 나에게 말을 다 걸고.”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제 존칭도 안 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제국에 반기를 든 주제에.”
“직접 초대하신 마당에 굳이 이렇게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에 바르디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부탁이든 들어줄 생각은 없는데.”
“저도 그냥 드리는 말씀입니다. 일단 말은 해 놔야 나중에 제가 따질 수 있지 않습니까.”
어린아이에게 어르면서 설명하는 듯한 케이든의 말투에 바르디의 웃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이상 제 아내에게 저 없는 자리에서 접근하지 말아 주십시오.”
바르디가 기가 차다는 듯 하, 하는 소리를 내더니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형이 정말 이런 소리까지 할 줄은 몰랐네.”
“저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공격하기 직전이시라는 것, 수도에 사는 아이들도 알 겁니다.”
알긴 아냐는 표정을 하고 있는 바르디를 보며 케이든은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반역자의 부인을 따로 보는 것 같은 행위는 정치적으로 너무 위협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바르디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케이든의 얼굴에서 미묘하게 날이 섰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일 없게 하라고.”
케이든이 솔직하게 말했는데도 바르디는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감히.
“정치적으로 너무 얕은수처럼 보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케이든이 다시 냉랭한 제 목소리로 돌아와 건조하게 말했다.
“굳이 정적의 아내를 협박하는 ‘선황제’로 남고 싶지 않으면.”
“이런 미친……!”
순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바르디가 올라간 제 팔을 내렸다. 케이든은 전혀 동요 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굳이 온 걸 보면, 정말로 나에게 선전 포고를 하겠다는 거겠지?”
“이제 와 그런 식의 이야기는 좀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케이든이 이어서 물었다.
“그러니 굳이 왜 절 초대하셨죠?”
바르디는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그 이유가 너무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설마, 정말 나타날 줄도 몰랐고.
“할아버지가 편지를 했다고 들었어.”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바르디가 말했다.
“그래서 저를 장례식에 초대하셨다고요?”
당연히 아니었다. 바르디는 속으로 ‘라자르’와의 만남을 회상했다. 그 미친 카르크족 마력자인지 마법사인지를 믿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하는 말은 너무 그럴싸했다.
거부하기엔 지나치게 달콤했다.
바르디가 제 질문에 한참 동안 답이 없자 케이든은 결국 먼저 인사를 하며 자리를 뜨려 발을 맞추었다.
“그럼, 이만.”
“그 편지에서 뭐라고 하시던가.”
바르디는 질문을 하고도 순간 아차 싶어 후회를 하며 이를 앙다물었다. 케이든은 부들부들 떨며 제 속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황제를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든 용서하고 돌아오라고.”
케이든이 선선하게 대답했다.
“들어드릴 수 없는 부탁만 하셨었죠.”
바르디는 이내 새파란 눈을 질끈 감아 버렸고, 케이든도 발을 돌려 제 내실로 향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