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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97화 (9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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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나와 케이든, 그리고 히스까지 실은 마차는 나흘이 걸려 황궁에 도착했다.

원래 그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그들이었지만, 케이든은 어째서인지 굳이 서두르지 않고 중간중간에 길게 쉬어 가며 여정을 늘렸다.

로하나는 이렇게까지 다정하면서도 조용한 케이든은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본 날처럼 이상하게 예의 바르고 냉정했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고나 할까.

“선황제와 케이든의 사이는 어땠나요?”

중간에 머문 파인체이서에서 히스에게 묻자 그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글쎄요.”

겨우 셔츠 하나를 걸치고도 덥다며 히스는 얼음이 동동 뜬 차를 마셨다.

“노프탈에 있는 동안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산 건가요?”

“흐음…….”

분명 아는 것이 있을 텐데, 히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를 이해하면서도, 로하나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케이든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게 된 것은 황궁에 도착하기 직전, 마차 안에서였다.

비가 너무 많이 와,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린 그는 창밖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든.”

차갑게 내려앉아 있던 눈이 조금 부드러워지면서 로하나를 향했다. 로하나는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보면서 저도 모르게 긴장되는 마음을 조용히 붙들었다.

“선황제 폐하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케이든의 눈이 차분하고 냉랭하게 다시 가라앉았다. 로하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에 잠시 다녀오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사이랄 것이 없어서.”

거짓말.

빙그레 웃는 예의 바른 입술 끝이 꽤 오래 그 모양을 유지했다. 케이든이 진심으로 웃지 않을 때는 저렇게 길고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러나 더 물을 자신도 없었다.

원래 누구에게도 사생활에 관한 걸 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다들 그래서 답답하다고 했었고.

로하나는 조용히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쩐지, 그녀가 물어 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한 그의 모습에 로하나는 그녀답지 않게 다시 질문했다.

“에드윈 렌트워스 일이 있기 전이나, 그 후에 노프탈로 가서라든가…….”

“그저 제국의 황제였을 뿐입니다.”

케이든이 대답했다.

“딱히 나의 조부라고 생각할 만한 사건도, 일도 없었고.”

중저음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아서 빗소리에 묻힐 것 같았다.

로하나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케이든이 약간의 침묵을 먼저 깼다.

“가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거든.”

“어떤 일이요?”

“뭐…….”

케이든이 꼿꼿이 앉아 있던 몸에 조금 힘을 풀며 계속했다.

“공식적으로 어느 한쪽을 택하라는 식의 상황이 나타나면.”

“네, 알아요. 애매하게 대답 잘 할 테니까 걱정하지…….”

“그것보다는…….”

심각해진 케이든이 미간을 좁히더니 몸을 앞으로 숙였다.

“네?”

“당신에게 안전한 방향으로 대답하세요. 그리고 아마도 그 정답은 일단 제국의 편, 아린족의 편일 겁니다.”

빠르게 말을 마친 케이든은 대답하라는 듯 눈짓했다.

“당신을 배신하라는 말인가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하며 어색하게 웃는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은 오히려 단단히 굳었던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그 정도로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케이든이 다시 몸을 뒤로 기댔다.

“말했잖습니까. 끝이 나도 찾아가겠다고.”

가늘어진 눈에 옅은 미소까지. 저 얼굴에 당황했던 지난 가을이 떠올라 로하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많이 뻔뻔해지셨네요.”

로하나의 말에 케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히스가 예전에 그러더군요.”

로하나의 궁금증 어린 눈짓에 케이든이 계속했다.

“원래 사람이 뻔뻔해지는 순간이 온다고.”

“그게 무슨 순간인데요?”

“알게 되실 겁니다. 아니다, 알고 계실 것 같은데 이미.”

케이든은 옅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대답 아닌 대답을 하고는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짙은 눈매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어째 대화로도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로하나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황궁에 도착해 가고 있었다.

*

황궁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을 보며 로하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번에도 그러했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정중앙 현관에서 내리는 델클리프 공작 부부를 맞이한 것은 드레고리 하노버였다.

샤톤웰 전투 이후 제대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는 못 본 사이 놀라울 만큼 야위어 있었다.

드레고리 뒤로는 꽤 많은 인원이 이들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는데, 새카만 복장에 새하얀 리본이 드문드문 장식되어 황궁의 장례식을 실감나게 했다.

“델클리프 공작. 그리고 공작 부인.”

지나치게 과하게 예를 갖춘 그는 나긋나긋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로하나는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

그들이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궁 대신들은 물론, 심지어 사용인 사이에서도 어색한 기운이 숨겨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분위기라는 것은 꾸며내기 어려운 법이었다. 설마 올 줄은 몰랐다는 기색이 황궁 전체에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케이든은 몸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꼭 맞는 검은 예복 차림이었다. 그 모습 역시 모두가 당황하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선황제의 손자로 장례식에 참석한 노프탈의 영주를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로하나는 저가 우겨서 행차한 황궁행인 만큼, 예민하게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느끼는 황궁의 미끄럽고도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그녀를 긴장시켰다.

‘오는 것이 맞아.’

로하나는 다시 생각해도 제 결론이 맞았음을 되새겼다. 케이든도 그걸 알기에 이렇게 함께 온 것이고 말이다.

마치 이런 로하나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하는 듯 오직 한명, 드레고리만은 오히려 어색한 기색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 앞에서 하나 마나 한 안부 인사를 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케이든은 짧게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너른 보폭이 빠르게 움직여 준비된 내실로 향했다. 도착해서 방에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델클리프 공작.”

케이든이 몸을 돌렸고 이어서 로하나도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오랜만에 만난 딸아이와 이야기를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드레고리답지 않게 굳이 그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조금 우스워 로하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시지요.”

“여기서 말고…… 제 서재에 가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만.”

안 된다고 하기에는 너무 구차하지만, 된다고 하기에도 불쾌해 케이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안 됩니다.”

케이든이 안 된다고 할 줄 몰랐는지 순간 드레고리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불편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나가 드리죠. 하지만 히스는 남을 겁니다.”

케이든은 냉랭하게 말하곤 드레고리가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먼저 방에서 나갔다.

“말씀하시지요.”

로하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드레고리에게 말을 걸자, 그의 얼굴은 더 당황한 듯 굳어졌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모두가 물러났지만 당당하게 남아 있는 히스를 보며 드레고리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세린 공주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많이 봐드린 거죠.”

로하나가 찬찬히 대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느긋하게 왔다곤 하나 먼 거리였다. 피곤했다.

“무슨 일이시죠?”

드레고리는 말이 없었다.

“설마, 하노버 공작저로 절 불러내서 뭐라도 하실 생각이셨던 건가요?”

드레고리는 너무 많이 변해 버린 제 딸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생각해 보면 늘 심중에 다른 뜻을 품은 듯 의뭉스러운 아이였다. 분명 그날부터였다. 그날부터 아이가 분명 더 이상해졌다. 그 재수 없는 유모년이 죽던 날부터.

“황제 폐하께 찾아가거라.”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드레고리가 용건을 말하자 로하나는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바르디 황제 폐하께서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사람을 보내 절 소환하시면 될 것을…….”

로하나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 드레고리에게 물었다.

“왜 굳이 이런 번잡스러운…….”

“넌 이미 아린족 사이에서 믿을 수 없는 자가 되었어.”

드레고리가 답했다.

“그러니, 너와 대놓고 사적인 만남을 하실 순 없다.”

“고작 절 만나면 소문이 돌까 봐 겁이 나서 직접 찾지도 못하신다, 뭐 이런 뜻인가요?”

“네가 다루던 그 마물은 무엇이냐.”

“제가 다뤘다고요?”

“난 분명히 보았어.”

드레고리는 생각보다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하나가 발뺌하려다가 주춤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단호한 말이었다.

“지금이라도 그 마물을 데리고 제국 편에 서거라. 그럼 구제의 길이 있을 거야.”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아린족이 이길 거라고 확신할 수가 있죠?”

로하나의 질문에 드레고리는 입을 벌렸다 닫더니 이내 다시 대답했다.

“통일 전쟁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지.”

“그 기록은 다 사라졌다고…….”

“하노버 서재에 내가 보관하고 있으니 원한다면 찾아와서 봐도 좋아.”

로하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브란드는 어떻게 하고 있지?”

한참의 침묵 끝에 드레고리가 먼저 입을 뗐다.

“잘 지내고 있어요. 심지어 감옥에도 가두지 않았으니까.”

“대신 감시가 붙겠지.”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너도 그 애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건 알 거다.”

드레고리가 말했다. 다른 쪽을 응시하던 로하나가 다시 드레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륜을 무시하는 짓은 적당히 하거라.”

드레고리가 말을 마칠 때쯤이었다.

곧이어, 사용인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들렸다. 목을 가다듬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공작 부인, 그리고 하노버 공작님.”

그의 떨리는 목소리만으로도 뒤에 연달아 나올 이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히스는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을 부른 후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문이 열렸다.

“황제 폐하.”

굳이 여기까지 이렇게 행차를 다 하시고.

로하나는 차분하게 눈을 들었다. 드레고리가 허겁지겁 일어났다.

검은 예복에 황제임을 뜻하는 붉은 튤립 핀이 가슴에 꽂혀 있을 뿐, 여태까지 본 중에 가장 수수한 모습이었다.

“황제 폐하! 어떻게 여길!”

당황해하는 드레고리를 물리며 바르디는 천천히 로하나 앞에 앉았다.

오랜만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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