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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기사들이 아주 물러간 것을 확인한 후, 황궁군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겼던 오렐리아와 프란츠가 벽 뒤에서 나타났다.
“타이밍 한번 엄청나네요.”
오렐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프란츠. 이것에 대해서 하실 말씀 있지 않을까요?”
그때, 프란츠가 문에 기대선 채 있다가 입을 뗐다.
“델클리프 공작 부인. 저희 어머니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아시겠죠?”
“잘 알죠.”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 히스의 시선이 프란츠를 지나 로하나를 향했다.
“그런데 그걸 지금 왜…….”
로하나는 순간, 원작을 떠올리며 숨을 들이켰다. 원인 불명으로 갑자기 사망하는 선황제. 혹시?
“저희 집안의 의원이 대대로 황실의 중앙 의원을 배출했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네. 유명하시죠.”
“저희 의원들이 바르디 황제의 명에 따라 움직이게 된 이후, 그러니까 선위가 이루어진 이후로 제가 한 조사가 있습니다.”
프란츠가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팔짱을 꼈다.
“원래도 이래저래 오래 사실 운명은 아니었지만.”
약간 뜸을 들이던 그는 수염이 나서 약간 까칠한 턱을 쓸었다.
“선위가 있던 후로는 황제가 처방을 달리 한 거로 압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처음 본 수준으로 어두워졌다가 돌아왔다.
“따르지 않은 자는 모두 처리되었고요. 아주 간단하게.”
로하나는 바르디의 부친이 케이든 델클리프라는 골칫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 선택했던 잔인하고 단순한 방법을 떠올렸다.
“물론 제가 누가 나쁘고 좋고 때문에, 누구 편에 서고 서지 않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바르디 황제는 선을 아주 넘었죠.”
프란츠는 다시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권력에는 희망이 없다고 봐서 여기 편에 섰습니다. 카르크족이 조용히 핍박받다가 알아서 사그라질 족속도 아니고.”
로하나를 바라보며 프란츠가 말을 마무리했다.
놀랄 일은 아니라고 머리로 알면서도, 로하나는 속으로 다시 한번 놀랐다. 빌어먹을 원작 때문에 흐렸던 눈이 점점 더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원작을 아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있었다. 원작은 아린족의 누군가가 거짓으로 작성한 것들이었다.
몰랐거나, 알면서도 거짓말을 했거나.
“왜 이 이야기를 언질이라도 해 주지 않았어요?”
로하나의 질문에 프란츠가 대답했다.
“공작 부인께는 부인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무슨.”
오렐리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수도의 귀족께서는 명분도 실리도 챙기느라 머리가 정말 아프시겠어요.”
비꼬는 말에 로하나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 그래요.”
순순히 인정하는 로하나의 말에 오렐리아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누구처럼 그렇게 사람 목숨을 쉽게 이용하진 않아요.”
이번에는 로하나와 오렐리아 사이로 긴장이 옮겨졌다. 그러나 이내 로하나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케이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습니다.”
케이든은 할아버지이기 전에 제국의 황제였던 그에게서 오는 편지를 오랫동안 무시해 왔다. 이제 와서 장례식에 참가하는 촌극을 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하지. 그런 곳을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히스가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너무 위험하지요.”
프란츠도 덧붙였다. 오렐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때, 편지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흐르던 분위기를 깬 것은 로하나의 목소리였다.
“아니요.”
모두의 시선이 로하나에게로 향했다.
“가는 게 좋겠어요.”
케이든이 왜 그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뜨곤 가늘게 그녀를 내려봤다.
“자금을 위해서 오렐리아가 버려진 황후로 나선다고 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로하나가 계속했다.
“케이든 당신도 황족이에요. 그것도 선황제의 장녀인 유리에 렌트워스의 유일한 아들이죠.”
“정당성을 따지는 건……”
“황제가 된다고 하셨죠.”
로하나가 또박또박 말했다.
“전쟁에서 이긴다고 불쑥 황제가 될까요?”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쯤이면 당신도 내 말에 동의하겠지만 조금만 더 덧붙일게요.”
케이든과 로하나의 눈동자가 얽혔다.
“아린족이 카르크족을 굴복시키는 것보다 반대가 더 힘들지도 몰라요.”
로하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적으론 그렇지만……”
히스가 계속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면.”
로하나가 침착하게 이어갔다.
“가는 것이 맞아요. 이 싸움을 종족 싸움이 아닌 걸로 가져가는 게 맞아요. 아린족을 설득해야죠.”
케이든도 사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다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똑같이 잔인하고 무의미할지언정 종족 싸움을 하는 것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이미 혼혈로 오랜 세월 배척받았다. 그를 받아 준 것은 카르크족이었고. 그러니 아린족을 처단하고 싶었다.
당한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틀린 생각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굳이 케이든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 싸움에서는 다들 알다시피 장기적인 설득도 중요하니까.”
로하나의 낮은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가죠, 같이.”
케이든은 조용히 그녀를 내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갑니다. 당신은 있어요.”
“둘이어야 더 좋을 텐데. 당신도 그 사실은 아주 잘 알고.”
로하나가 말했다.
“날 지켜 주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면서요.”
아까 둘만 있을 때 나왔던 대화를 꺼내자 케이든이 조금 움찔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켜요. 칼라드리우스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위험할 때마다 나타난 걸 보면 방법이 있겠죠.”
“너무 대책 없는 거 아닌가요.”
프란츠가 껄렁하게 묻고, 그런 그를 히스가 못마땅하게 저지했다.
“대책 없어요. 어차피 아무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존재를 무슨 수로 미리 가늠하겠어요.”
로하나가 그녀답지 않게 감정의 요동 없이 말했다.
“칼라드리우스는 반드시 나타날 거야.”
케이든이 덧붙였다.
“늘 그랬으니까.”
모든 순간, 칼라드리우스는 그녀와 있었다. 공작저에 라자르가 나타났을 때에도, 혼자 노프탈을 벗어나 에밀리를 보러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샤톤웰 전투에서도.
그녀는 어쩌면 잃지 말아야 할 전력이었고, 케이든은 그 사실이 죽기보다 싫었다.
잃지 말아야 할 전력. 마물의 현신.
그런 핵심 전략이 되어 버린다는 건 다른 의미론 ‘사용되어 버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알면서도, 그게 싫어서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천하의 무지한 남편이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더 이상 방법이 없어 보였다.
“같이 가죠.”
“케이든!”
히스가 말리자 케이든은 그만하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로하나는 당연한 결정이라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
오렐리아는 히스가 R. D.에게 마련해 준 저택으로 돌아와 창가에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에는 흐리지만 분명하게 연둣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선황제의 서거라.
‘다 같이 수도로 향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때였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기척이 등 뒤에서 일었다.
“그렇게 좀 안 나타나면 안돼요?”
“이런 걸로도 불만을 갖는군.”
비쩍 마른 몸에 새하얀 얼굴. 흑발에 붉은 눈의 마력자. 라자르는 소년의 모습을 주로 하던 예전과 달리 완전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라자르를 바라보며 오렐리아는 생각했다.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한 존재지.’
오렐리아는 창가에서 일어나 탁상 앞에 앉았다. 나풀나풀한 드레스 자락이 팔랑였다.
“R. D.는 나한테 떠맡겨 놓고, 참 빨리도 찾아왔네요.”
“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으니까.”
라자르의 말에 오렐리아는 비릿한 실소를 터뜨렸다. 도대체가 누구 편인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대부분의 일은 프란츠 소예가 하고 있잖아.”
오렐리아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버림받은 황후가 누구보다 필요한 건 이쪽이면서.
‘진짜 어이없는 족속이야.’
그래도 확실한 건, 이 자는 카르크족의 승리를 반드시 이끌어 내고야 말리라는 것. 오렐리아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일단은.
“계획 변경이 있어서 왔어. 프란츠도 알아선 안 되니 직접 너에게 온 거고.”
“뭔데요?”
오렐리아가 턱을 괴며 물었다.
“원래 가기로 했던 모딘 상단을 만나는 건 추진해. 로하나 하노버가 없어도 그만이야.”
“언제는 있어야 설득이 될 거라더니.”
“당연히 넌 실패할 거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오렐리아는 조금 더 진지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상단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서 너도 장례식에 참석해.”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이 조금 커졌다. 치켜 올라간 가는 눈썹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눈에 가깝게 붙었다.
“일단 입장도 안 되겠지만, 무슨 명목과 방법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R. D.들이 다 구축해 놓을 거야.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오렐리아는 가늘어진 눈으로 라자르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초대를 받아서 왔다고 말하면 돼.”
“황제의 초대? 바르디가 날 초대했다고 우기라고요?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해요?”
“통하든 말든 상관없어.”
라자르는 오렐리아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성가신 듯 목소리에 조금 날을 세웠다.
“너는 그저 거기에서 단지 출신 때문에, 그것도 입양되기 전의 출신 때문에 버림받은 여자이면 되는 거야.”
“여론전?”
“그런 공식적인 행사에서 제아무리 바르디라고 하더라도 너를 어찌할 순 없을 거야. 혹시 모를 무력 사태는 케이든 쪽에서도 방어할 거고.”
라자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도 그곳에 있을 거야.”
새빨간 눈이 번뜩였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오렐리아는 그런 라자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좋아요. 근데…….”
“말해.”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내 조건은 들어주는 건가?”
라자르는 피식 웃더니, 눈앞의 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죽이진 않아도, 최소한 떨어뜨려 준다고 했잖아요.”
‘로하나 하노버를.’ 이라는 뒷말을 삼키며 오렐리아가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라자르가 능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를 데려온 건 나야. 없애는 것도 내가 하지.”
라자르의 말에 오렐리아는 불안한 마음을 눌렀다. 전쟁에서 케이든이 이길 거라는 사실을 당연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기고 나서 그의 옆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그들은 행복했었다. 잠시 높은 자리에 가기 위해 떨어져 있다 보니, 다른 방해물들이 생겼을 뿐이다.
라자르는 로하나를 ‘데려왔다’고 표현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그가 원래대로 돌려줄 수만 있다면 오렐리아는 뭐든 할 것이었다.
그리고 엉뚱한 초대를 받은 양 황궁에 달려가 예쁜 얼굴로 우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